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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2회/ 모세의 입 아론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6 조회수707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 2

 

제12회 모세의 입 아론: 탈출 4,10-17/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탈출 4,18-23/할례: 탈출 4,23-26

 

탈출 4,10-17: 모세의 입 아론

 

 

 

아론이라는 인물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지금까지에 있는 모세가

야훼의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조금 철학적인 내지는 신학적인 차원이

었다면, 정체성의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은 실재적인 문제들입니다.

 

문제가 뭐죠? "내가 말을 잘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 죄송합니다."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을 하지요? 이게 어떻게 번역할 지 모르는 그런

히브리 말이기 때문에 주교회의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저더러 번역하라고 했다면은 저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야훼여, 제발~!", "제발 야훼여~!"이렇게 좀 약간 감탄사적인 그런 어감이 있는

대목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주님! 뭐 이와 같은 대목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왜 자기가 야훼의 부르심을 따를 수 없는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히브리 성서를 그냥 직역하자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말들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상한 표현이긴 해요.

나는 말들의 사람이 아닙니다.

 

주교회의 성경에서는 나는 말을 잘 한다는 소리입니까, 못한다는 소리입니까?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얘기합니까?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까 내일도 역시 못할 겁니다라는 뭐 하나의 그런 시간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11절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이 첫 번째 질문에는 구약에 있는 동사가 여러 형태

가 있는데 완료형이 쓰입니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완료형 동사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음 질문에는 미완료형을 사용합니다.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그런데 이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이니까

조금 미래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할 수 있고, 귀먹게 할 수 있고, 보게 할 수 있고, 눈멀게도

할 수 있느냐?"라는 약간은 좀 열려 있는 이미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자, 조금 이상하죠? 앞서서 야훼 하느님이 얘기했을 때 "당신이 누구입니까?"라고

얘기 했을 때 끊임없이 나왔던 표현은 "나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바로 나다."라는 이야기로 자기를 소개

했는데 여기서는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말하게도 하고 말 못하게도 하고,

듣게도 하고 못 듣게도 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성조들의 하느님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

사람에게 입을 준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입니까? 창조주입니다. 인간을 만든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소개하는 것은 앞선 하느님의 자기 소개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습니다.

 

여기서 "누가 너희에게" 창조적인 그런 창조주의 하느님으로부터 약간은 좀 새로운

신관과 함께 야훼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합니다.

 

여기서 "도와 주겠다." 라는 그런 말인데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신자들을 위해서

의역한 성경이다보니까. 직역을 하면 뭐냐하면 "바로 내가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라는 소리입니다. 앞에서는 모세가 표징을 요구하자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하느님께서 어떤 표징을, 좀 표징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라는 얘기를 하셨지요?

 

근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뭐를 얘기하는 겁니까? "내가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니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가르쳐 주겠다."

그런데 여기서 '가르쳐 준다'라는 그 동사가 뭐냐하면 '야라'라는 동사인데 '아라'

라는 동사와 모세 오경 전체를 지칭하는 '토라'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라' 안에는 '가르침'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너의 입과 함께 있겠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라는 두 가지 중요한 진술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모세가 얘기 하지요?

다섯 번째 입니다. "제발, 야훼여~!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 그러자

야훼가 참을만큼 참았지요? 화를 냅니다.

 

직역을 하자면, 고대 문헌이기 때문에 제가 자주 직역을 이렇게 말씀 드리는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화를 냈다고 그러는데 직역을 하자면 "야훼의 코가

타올랐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코가 좀 작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에서 누가 코가 빨개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 뜻입니까? 술 많이  먹었나보다.^^*~

생각을 하는데 제가 서양 가서 살아보니까 정말 서양 사람들이 흥분하면은 어디가

빨개지냐 하면 코끝이 빨개지더라구요. 그러니까 루돌프 사슴코가 빨간 것도 이

혈압 때문에 관계가 있을 지 모릅니다. ^^*~~~ 아무튼 이 코가 빨개지더구요.

 

아무튼 이 팔레스티나 쪽에 있는 인종들도 이제 좀 코가 큰 인종들이다 보니까

코가 빨개지는 모양이죠? 누구의 코가 빨개졌다라는 거는 그 사람이 조금 뭐

완곡하게 표현하지면은 흥분했다. 좀 세게 표현하자면은 화가 났다라는 표현인데

야훼의 코가 타올랐습니다.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상하죠? 왜 레위인이라는 말을 거기다 굳이 갖다 붙였을까요?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탈출기 처음부터 아론과 모세의 아빠가 레위인이라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레위인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갖다 붙입니다.

 

거긴 어떤 뉘앙스가 있는 겁니다. 나중에 아론은 어떤 역활을 수행합니까?

사제의 역활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모세는 전체적인 탈출기의 흐름 안에서

예언자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아론은 사제적인 역활을 수행하게 되는데 사제의

역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지파여야 합니까? 레위 지파여야 합니다.

따라서 레위인이라고 여기서 한번 더 강조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너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여기까지는 조금

무난해요. 그럴 거 같습니다.

 

자, "아론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서" 이것도 좀 직역하겠습니다.

첫째, 이집트에서 나와서입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라고 얘기 했지

마는 그가 그가 지금 이집트에서 괄호치고 그 말은 안 나옵니다. 그가 지금 나와서.

두 번째, 너를 볼 것이고, 그리고 셋째, 기뻐할 것이다.

 

나와서 보고 기뻐할 것이다라는 세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러구 나서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일러, 그가 해야 할 말을 그 입에 담아 주어라."

야훼의 말이 마치 페키지처럼 그 하나의 택배처럼 포장도 안 끄른채 모세의 입

속으로 들어 갔다가 모세가 다시 자기 입에서 그걸 꺼내서 누구의 입에 넣어 주는

겁니까? 아론의 입에 넣어 주는 겁니다.

 

그것이 유다인들이 갖고 있는 말에 대한 또는 말씀, 우리가 로고스라고  얘기하는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표상입니다. 그냥 말이 우리는 말이 그냥 허공에 흩어지면

그만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말에 대한 그런 것들이 좀 약하지마는 이 유다인들의

그런 철학 안에서는 내지는 사상 안에서는 말이라는 것이 하나의 형상이 되는

그와 같은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나중에 요한 복음에 그것이 반영이 되서 요한 복음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의인화 됩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느님이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여기서는 그 말이 형상화 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에 와서는 형상화 단계를 더 넘어

가서 그 말씀이 의인화 되는 겁니다.

 

15절: "그리고 너는 그에게 말하여라. 그리고 그 말들을 그의 입에 두어라."라고

얘기합니다. 비슷한 표현들이 신명 18,18과 예레 1,9에서도 등장합니다.

 

신명 18,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에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예레 1,9: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예,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거지요?

16절: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엘로힘이 될 것이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 "너는 그의 엘로힘이 된다."

너는 그에게 뭐와 같이 된대는 겁니까? 신과 같이 된대는 겁니다.

나중에 탈출 7,1에서도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뭡니까? 아론이 모세의 입이고 모세는 아론의 엘로힘이 되는 게

관계라면 나중에 탈출 7,1에서는 비슷한 표현입니다만 조금 다른 구도 안에서

파라오에게 모세는 엘로힘이 되고 아론은 모세의 예언자가 되는 그와 같은

관계들이 설정이 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설명할려고 애를 씁니다. 누구에겐가 엘로힘이

된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예,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엘로힘이 된다는

것은 말씀의 주체가 된다는 뜻으로 우리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모세와 아론은 형제의 관계지만 신학적 관점에서는

마치 엘로힘과 엘로힘의 말을 백성에게 전하는 예언자와 같은 관계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같은 파격적인 표현이 조금씩 등장하고 나중에 요한 복음에

와서도 요한 복음 10장에 오면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지는 장면이

습니다. "당신이 분명히 인간인데 어떻게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합니까?"

라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거기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하면, 시편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시편 구절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불렀다.'라는

시편 구절이 있고, 하느님께서 따라서 우리들을 '신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율법 구절이 있는데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희에게

왜 그렇게 못 마땅하냐?"라는 그와 같은 대목들이 나옵니다.

 

나중에 좀 충분한 시간이 있게 되면 충분한 시간이 있을 때 요한 복음의 관계와

구약의 요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상세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17절로 넘어 오면서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너는 그것으로 표징들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계속 요 표상이 계속해서 쭉 나옵니다.

즉 지팡이라는 표상이. 맨 처음에 양을 치기 위해서 들고 간 모세의 지팡이가 이제는

엘로힘의 지팡이가 되어 놀라운 표징을 부리는 그와 같은 상징으로.

 

나중에는 그 지팡이가 결국 어디까지 갑니까?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 때

성전의 가장 지성소에 놓이게 되는 계약의 궤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도 이 지팡이가 결국에는 어디까지 가게 되는 겁니까? 주교님들 지팡이까지

가는 겁니다. 주교님들이 힘이 없어서 그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이게

교황님 즉위 미사에서도 힘이 없어서 지팡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누굴

때릴려고 그 지팡이가 있는 게 아니라 지팡이는 뭐를 상징합니까?

 

예,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맡겨 주신 교황 또는 주교에게 맡겨 주신 그 권위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 그 지팡이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조금 기억해 두시면은

좋겠습니다.

 

자, 다음 탈출 4,18-23 : 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 가는 대목입니다.

 

 

 

자, 18절부터 23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사는 두 동사입니다.

하나는 '가다' 또 하나는 '돌아 가다'라는 동사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삶의 길을 가다가 야훼의 길로 돌아가는 겁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이제 모세는 장인 이트로에게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18절: "저는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친척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보아야겠습니다. 그러자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

하고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 장면에서 창세기의 어떤 장면이 떠올라야 합니다. 어떤 장면일까요?

옛날에도 보면은 누군가 이스라엘을 떠나서 어디로 갔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지요? 야곱입니다. 야곱은 누구를 떠나서 돌아가지요?

라반을 떠나서 돌아오는데 라반이 가게 합니까? 못 가게 합니다. 더군다나 라헬이

신상을 훔쳐 가지고 오잖아요. 그래서 라반이 끝까지 추적하잖아요.

 

그러다가 경계를 넘잖아요. 경계를 넘어서 결국 라반과 야곱이 함께 계약 비슷한

것을 맺고 그 다음에 야곱이 두 아내와 자신의 가축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와 같은 대목을 우리가 기억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우선 두 가지를 나중에 비교해 볼 텐데, "이집트에 있는 친척들

에게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보아야겠습니다." 이 좀 웃기지요?

모세가 그러니까 장인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다.

왜 안 할까? 모릅니다. ^^*~~텍스트에 안 써 있는 거는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19절 대목을 또 한번 봅시다.

19절: "야훼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이 대목만 보면은 야훼가 모세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네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라고 얘기

하는데 앞선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전제되고 있는 거 같습니까, 아니면 좀

무시하는 거 같습니까? 예, 앞에 있는 것들과는 다는 전승인 거 같습니다.

 

따라서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고 탈출시켜 나가는 그런 공적인 삶의 이전에 있는

이야기들에 관해서는 한 가지 전승만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여기 좀 텍스트의

순서는 바꿨습니다만 모세가 장인에게 가서 "아, 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 가겠

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그런 장면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20절: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다 나귀에 태워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 좀 이상하지요? "아들들을  데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 안에서 모세의

아들은 몇 명이었지요? 지금까지는 아들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게스솜이었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땅에서 너를 낳았구나." 그래서 게스솜이라는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 4장 24절 이하. 나중에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다라는 고 장면에서도 보면

아들이 한 명처럼 등장하는 거 같습니다. 반면에 탈출 18,3-4을 보면 아들의

이름이 두 명이 나옵니다.

 

 

 

하나는 게르솜 또 하나는 엘리에제르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엘리에제르'는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도움이 되시어, 나를 파라오의

칼에서 구해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에제르' 우리가 어떻게 끊어 읽으면

될까요? 엘리 에제르.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 가실 때 시편 기도를 하시면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라고 기도하십니다.  '엘리'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그 대목에서 다시 한번 "아들들을 데려다"에 대해서,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앞의 이야기와 역시 또 어긋납니다. 아들들은 두 아들을 얘기하는 거 같습니다.

 

"그 모세의 손에는 하느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따라서 전승은 서로 다른 전승이지만 적어도 무엇에 대한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겁니까?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 아들이 하나인지 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에 관한 이야기, 아내에 관한 이야기, 장인에 관한 이야기 이런 것들이 함께

엮여 있는 겁니다.

 

여기서 18절에 보면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하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인사라기보다는 이트로는 사제였잖아요. 사제가 자신의 사위에게,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내리는 축복과 같은 겁니다. 

 

 

 

* 판관 18,6: 그 사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평안히 가시오. 그대들이 가는 길은 바로

주님 앞에 펼쳐져 있소."

 

다섯 명의 단 지파의 사람들이 땅을 얻기 위해서 가다가 이제 사제를 만났고, 그

미카의 사제가 그들에게 말하는 그와 같은 장면입니다.

 

* 1사무 1,17: 이제는 엘리가 한나에게 얘기하는 겁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 주실 것이오."

 

* 1사무 20,42: 그리고 나서 요나탄이 다윗에게 하는 축복입니다. "평안히 가게.

우리 둘은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 내 후손과 자네 후손 사이에 언제까지나

증인이 되실 것이네.'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는가?"

 

2열왕 5,19: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나아만에게 "안심하고 가십시오. 나아만이

엘리사를 떠나가 얼마쯤 갔을 때였다."

다 축복하는 겁니다. 우리들도 헤어질 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얘기할 때

그것이 단지 인사일까요, 아니면 본래는 하나의 축복이었을까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그렇게 축복을 비는 마음이 있습니까? 따라서 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이제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겁니까? 누군가와 헤어질 때

아, 내가 상대방을 축복해 줄 수 있구나! 축복은 사제만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까?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번 교황님이 교황 되시면서 첫 강복을 하시기 전에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먼저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구 머리를 숙이잖아요.

전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축복해 줄 수가 있구나.

 

여러분들이 저를 축복해 줄 수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제만 미사 마지막에

여러분들에게 뭐 십자표를 하면서 강복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특별히

드릴 수 있는 사제의 축복이지만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모두에게 서로를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영세하지 않은 사람도 하느님의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빌어 줄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세례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우리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줄 수 있습니다. 세례받지 않은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까? 교회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예를들어 세례 받지 않은 두 사람이 무인도에 갔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가

세례를 받고 싶어요. 예비자 교리 받다가 무인도에 갔어요.^^*~~~

이제 우린 어떻게 하느냐? 우린 세례도 못 받고 죽는 거냐? 아닙니다.

거기서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상황이라면은 상대방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서로 세례를 주면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단지 자기가 자기한테는 못 줍니다.

성사는 자기가 스스로에게 베풀지는 못합니다.

 

예,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축복은 다음과 같은 겁니다.

누구네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가정에, 이 건물이 아니라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

그게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자들, 비신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또는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마음 속으로 그와 같은 축복을 해 주는 것.

 

복음에 따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이 축복을 받아 들이면 그 축복이 거기에

머물 것이고, 받아 들이지 않으면 축복은 떠날 것이라는 곧 축복을 빌어 준 이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적어도 우리들이 어디, 누군가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 가정의 평화를 빌어주는 그런 축복들.

 

그리고 상대방과 만나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서로 인사할 때 이게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 좀 축복해 주는 그와 같은 마음가짐. 이런 것들은 중요한 거

같습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간음한 여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가거라.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마라." 이것도 축복일까요?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의미있는 그런 축복일 거 같애요.

"당신은 더 이상 가서 죄 짓지 않고 의로움, 그런 선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거 같습니다.

 

자, 그런데 21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쥐어 준 그 모든 기적을 명심하여 파라오 앞에서 일으켜라.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

 

자, 직역합니다. 21절 후반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로 내가 그의 심장을 강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또는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심장을 강하게 한다.', '그의 심장을 딱딱하게  한다.'

아까 무슨 '코가 타올랐다.'라는 표현과 함께 '심장이 강해졌다.'

전에 말씀 드렸지마는 심장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뇌와

비슷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따라서 모든 지성적인 작용, 또는 감성적인 작용이,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하는 활동이 유다인들의 전통 안에서는 어디서 일어난다고 보는 겁니까?

심장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그 심장이 우리가 얘기하는 감성, 지성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 기관에서 일어난다고 본 겁니다.

 

그것이 강하게 일어나니까 자신의 판단을 바꿀꺼래는 겁니까, 아니면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자, 여기서 야훼가 파라오의 심장을 강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예정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부터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둘러 보면서, 모든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안배가

있었다라는 그 모든 것의 주체로서 주인으로서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이 예정돼 있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알고 계셔야 합니다.

 

즉 예정론만 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까지 가게 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마는 예, 스티븐 호킹

박사가 그런 얘기를 "나는 예정론을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길을 건널 때는 좌우를 살피더라."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다면은 좌우를 살피든 안

살피든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텐데 살피는 거를 보니까 뭐 그들도 철저한

의미에서 예정론자는 아닌 모양이다라는 뭐 그런 어떤 우스개 소리를 했던 것처럼

여기서 얘기하는 것도 우리가 결코 이 대목을 예정론으로 얘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야훼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것이 무엇이었나?에 관해서

탈출기의 저자가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보는 거기에서 머물러야지

그 이상으로 우리가 해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22절: 그러면 "너는 야훼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이것도 역시 직역합시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 나의 맏아들이다. 나의 장자이다."

 

그런데 23절: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라고 말하였거만

너는 거부하여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파라오가 야훼의 맏이에게 자신이

야훼가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이제 야훼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파라오의 맏아들을 죽인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죽인다라는 겁니다. 이 전체를 통해서 사실은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이 뭐지요? 이스라엘의 맏이들을 죽이는데 이스라엘의

맏이를 죽이는 야훼의 행동이 합법화 됩니다.

 

니가 내 아들에게 내 맏이에게 이런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앞으로 열 개의 재앙을 통해서 계속해서 경고 했지마는 그 말을 듣지 않았기에

나는 이제 너의 맏이를 친다라는 일종의 열 번째 재앙에 대한 어떤 합법화 내지는

정당화 과정입니다.

 

그 근본적인 바당에 있는 사상은 뭐냐하면 동태복법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적인 사상이 그 밑에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4,18에서 아까 얘기로 좀 돌아 갑시다.

이트로가 모세를 떠나며 축복을 하는데 "평안히 가게."  그 안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평화라는 주제가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는 복음서는

어떤 복음서일까요? 요한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서입니다.

 

루카 2,29 이하를 보면, 시메온의 노래에서 시메온이 뭐라고 노래하냐 하면,

"당신의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또는 루카 24,36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에게!" 라고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에서 상대방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그와 같은 전통은 신약, 구약을

꿰뚫으면서 진행되고 있고 오늘날 전례 안에서도 미사가 시작하면서 사제가 뭐라고

인사합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예, 미사가 끝나면서도 "이제 미사가 끝났으니 여러분들은 가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또는 하느님의 평화를 우리가 함께 누립시다."라고 인사를 하는, 평화를 기원하는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미사의 시작과 마무리 부분에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서로 만나서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또는

떠나면서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그 모든 것 안에 어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또 축복에 관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 다음 4,24-26. 할례에 관한 대목입니다.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 중에 하나이고,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시나이 계약이라든지 이런 굵직한 주제들을 제외하고 짧은 텍스트들을

골랐을 때 가장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논란이 많은 텍스트라는 겁니다.

 

 

 

 

 

되게 많은 대명사들이 쓰였지요? 이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선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야훼가 모세에게 일을 시켜 놓고 모세가 하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 "오, 세상엔 믿을 하느님이 하나도

없다." ^^*~~ 이런 생각이 드는. 이거는 참 이상하다라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합니다.

 

이거 정말 학자들이 한 얘기입니다. 근데 좀 웃겨요.

왜 야훼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까?

 

첫째, 야훼가 원했던 것은 모세가 홀로 이집트로 가는 거 였는데 가족을 데리고 갔다.

이게 야훼의 명령에 잘 순종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면 정말로 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가 나중에 광야로 나가니까 모세의 장인이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마 그렇게 때문에 카일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론을 냈는데요. 이런 얘기가 좀

나오는 것 같고 .

 

또 다른 사람은 두 번째,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가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까

코가 빨갛게 됐었잖아요. 야훼가 화가 나가지고 했지마는 뒤늦게 우리도 왜 그때는

참았는데 며칠 있다가 ^^*~~~ 자다가 갑자가 벌떡 일어나서 혈압오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뭐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주장하는 그와 같은 사람.

 

또는 탈출기 2장을 보면 모세가 사람을 죽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뒤늦게 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 라는 그와 같은 거. 또는 아직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야훼가 창세 17장에 보면은 계약을 맺었는데 할례를 받도록 그 계약을

지키지 않은 모세에게 또 경고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을 의미한 게 아니냐?

라는 여러 가지 내용의, 여러 가지 뜻의 그와 같은 해석이 나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해석입니다.

자, 피를 가지고 구원을 얻는다라는 이야기지요? 이 사건은 우선 열 번째 재앙과

연결되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고, 두 번째로는 '하탄 담밈'이라는 말에서

'하탄'이라는 말은 '장인'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모음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사위'라는 뜻도 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냐하면, 본래는 인척 관계가 아닌 남자예요. 그런데 혼인이라든지

뭐 이런 것을 통해서 이제 인척 관계가 생겼을 때 그를 '하탄'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본래는. 따라서 A라는 남자와 B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둘이 서로 혼인하기 전에는

남이죠? 이웃까지는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혼인하고 나면은 그 B라는 여자의

형제나 아니면은 아빠나 아니면은 그 다른 친척에게 이 남자도 '하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게 뭐냐? '피로 맺어진 인척 관계가 되었습니다.'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자, 그리고 봅시다. 복사물을 보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석하냐하면, 우리 말과 아니면 다른 주석가들과 조금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그냥 딱 드러내서 저는 이 이야기의 등장 인물이

야훼와 치포라와 모세의 아들, 셋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24a) 그리고 (그) 길에서 (그) 숙소에 있었을 때였다.

(24b) 그리고 야훼가 그를 만났다라고 했는데 24b에 야훼가 그를 만날 때

그를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야훼는) 그를(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야훼가 모세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겁니다.

 

(25a) 그리고 치포라는 돌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아들의 포피를 잘랐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대었다. 여기서 그의 발은 아들이 아니라 야훼입니다.

포피를 자른 다음에 그 피를 누구에게 대야지 인척 관계가 연결이 되는 겁니까?

야훼의 발에 대야지 인척 관계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야훼의 발에 닿아야 되는

겁니다.

 

(25b)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당신은 야훼입니다.

야훼, 당신은 이제 나에게 하탄 담밈입니다.  당신과 나는 이제 친척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26a) 그리고 그는(야훼는) 그 아들로부터 떠났다."라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알고 있는 한 이렇게 해석하는 주석가는 없습니다.^^*~~~

이 전체 구절을 해석하는 100가지 주석가들의 의견이 다 다르기 때문에 101번째로

제가 의견을 낸 것이라고 생각하시면은 되겠습니다.

 

아무튼 창세기 17장에 있었던 그 할례의 주제가 이제 탈출기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고 이어서 여호수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도 날카로운 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여기서도 역시 돌칼을

만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는 할례를 받았지만

이집트를 떠나고 나서는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거예요. 그리고 이제 약속의

땅에 와서 할례를 받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간 백성들은 옛날에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에 있었던 그 할례의 계약을, 할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게 되는

그와 같은 시작 부분을 여호수아기 5장은 저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3회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탈출 4,27-31/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다: 탈출 5,1-5이 계속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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