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작성자신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6 조회수62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3년9월6일 연중 제22주일 금요일 복음묵상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루카5,35)
---.
지난 주일인 9월1일(로마시간)에,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9월7일 토요일 저녁 시간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감도는 중동 '시리아의 평화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로 정한다고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발표하셨다.
또한 이러한 기도와 단식에 가톨릭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교나 여타 종교들,
그리고 뜻을 같이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왜 교황님께서는 기도와 함께 단식이라는 행위를 선택하셨을까?

단식(斷食)은 보속(補贖)의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보속이란 말인가?

먼 중동의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남의 나라 일에 신경 쓸 일이 없다는 생각도 한심한 생각이다.
사실 시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우리에게 쉽게 방송매체들이 들려주는 것처럼 간단한 흑백의 논리로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다.
약자들을 억압하는 악한 세력을 정의 세력이 단죄해야 한다는 만화와 같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利害關係)가 교묘하게 숨겨 있다.
전쟁이 일어나야 이익을 보는 세력과 기존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세력이 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극히 일부의 세력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수없이 많은 죄 없고 힘없는 이들이 철저하게 유린되고 희생된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일어나서는 안 될 악마의 폭력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보속의 행위를 해야 하는가?
보속에는 개인적 보속과 연대적 보속이 있다.
개인적 보속이란 개인적으로 저지른 과오에 대해 참회의 눈물과 함께 용서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연대적 보속이란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이상 연대 책임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내 사랑하는 가족의 누군가가,
내 사랑하는 친구 중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에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도 국가도 인류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이러한 시각으로 보속을 이해해야만 한다.

세상의 죄에 대해 가장 가슴 아파할 존재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를 그리스도가 대속(代贖)하셨듯이, 우리 역시 보속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악(惡)이 아닌 선(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의 행위가 세상에 있는 한,
우리는 평생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보속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인간의 어리석음의 바탕이 되는 욕심에서 기인한다.
우리 안에도 악에 협력하는 욕망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단식은 다시 말하지만 보속의 행위이다.
건강이나 미용을 위한 단식, 혹은 시위를 위한 단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교황님의 절박한 요청의 의미를 이해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이 작은 보속행위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무력화(無力化) 시킬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하트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