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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7 조회수890 추천수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Lk.6,2,5)
 
제1독서 콜로 1,21-23
복음 루카 6,1-5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날리게 한 예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즉,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배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또 피카소 옆에 스케치북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물론 또 다른 분야에서 부각을 낼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모차르트에게 피아노가 없었고 피카소에게 스케치북이 없었다면 아주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도구들이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잘 생각해보면 나를 있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요. 새벽마다 써서 올리는 묵상글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강의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특별히 글을 잘 쓰고, 말을 잘 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믿고 있고,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사제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저를 있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종종 착각 속에 빠집니다. 저를 존재하게끔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다른 부차적인 것들을 특히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주님을 가장 마지막 자리에 놓으라고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즉, 가장 중요한 분을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인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왜 주신 것일까요? 힘들게 살아보라고,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자체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이나 신법의 요청이 있으면 얼마든지 관면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이 율법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 자체에만 매달렸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들을 우리 역시 따르는 것은 아닐까요? 돈, 명예, 세상의 지위... 등등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율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서 내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순간, 주님의 그 따뜻한 사랑은 절대로 체험될 수 없습니다.

간밤에 비가 내려 춥더니, 그 비 맞고 오늘은 꽃이 활짝 피었구나. 인생의 회복도 저와 같은 것이려니(정약용).


산티아고길을 걷고 있는 정병덕 신부의 신발. 현재 400키로 걸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경계하는 삶

사제의 삶은 겸손해야 하고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생이 되었지요. 그런데 신자들은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제게 존댓말을 쓰고 맛있는 것도 먼저 먹게 하고 좋은 자리에 앉도록 늘 배려해 주시더군요. 그저 하느님과 더 가까이 살겠다고 들어왔을 뿐인데, 단지 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부끄러워서 “저 젊어요.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신학생 시간, 또 15년이라는 사제의 삶을 살면서 바뀌어버린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은 제게 반말을 하는 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니 저분 왜 그러시는 거야?’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교만이라는 것은 천천히 일상 안에 이렇게 물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만이라는 유혹에서 자유롭게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스스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하면서, 스스로를 낮추고 대신 주님을 높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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