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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3회 탈출기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8 조회수779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 2

제13회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탈출 4,27-31/

            모세와 아론 파라오에게 가다: 탈출 5,1-5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는 탈출기 5장에 있는 내용들을 이제 좀 살펴 볼려고

하는데요. 그 앞에 있는 내용 중에서 좀 놓쳐 버린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좀 정리 하면서 5장 이후의 내용들을 같이 읽어 나갔으면 합니다.

 

  

 

먼저 4장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게 4장 24부터 나오는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도망을 나오지요? 그리고 미디안으로

갔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거지요?

 

창세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까? 누군가 어디를 떠나서 한참 살다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에사오를 피해서 삼촌인 라반에게

가서 있다가 결혼하고 아내 둘을 얻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와 같은 일을

기억합니다.

 

야곱은 모두 몇 년을 있었지요? 20년 있었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얻는데 14년이

걸렸고, 그 다음에 자기 재산을 얻는데,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도합 20년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얼마를 살았을까요? 40년 맞습니다. 정확하게 얼마인지에

관해서 탈출기에서는 우리가 만날 수 없지마는 나중에 유다 전승이라든지 아니면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테파노의 연설, 변호 이런데서 이야기를 보면 모세의

생애를 모두 40, 40, 40으로 구분하는.

 

이집트 왕궁에서 살았던 40년,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살았던 40년,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있는 40년. 그래서 120년으로 모세의

삶을 보는 그와 같은 틀로 우리가 이해해 본다면은 모세는 야곱보다 두배를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모세는 40년을.

 

그 외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 탈출기 4장에 나오는 모세.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다음에 그 장인의 이름. 그들은 어디에 있었지요?

라반의 집에 있다가 돌아가는, 모세는 이트로의 집에 있다가 돌아가는.

 

모세도 아내를 얻지요? 이트로의 딸들 중에서 하나 치포라라고 하는 그 딸의 이름을

여러분들 기억하실 겁니다. 여기서도 마지막 부분에 그 치포라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모세의 장인 이름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가 나옵니다.

르우엘이라는 이름도 나오고, 호밥이라는 이름도 나오더라.

 

그리고 나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만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야곱은 자신의 형 에사오를, 모세는 자신의 형인 아론을 만나더라.

그런데 만나러 돌아오는 길에 순순히 돌아오지 못하지요? 중간에 누굴 만납니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이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에서는 엘로힘을 만나서 또는

엘로힘의 천사와 씨름을 이렇게 합니다. 약간은 좀 싸우는 그와 같은 이야기예요.

모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야훼가 등장해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그와

같은 장면과 맞딱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이야기는 사실은 원인담입니다.

 

원인담이 뭔지에 관해서 제가 여러번 설명을 드렸는데 한번 더 설명을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원인담, 영어로는 etiology 라고 그러는데 원인담이라는 게 뭐냐하면,

"그래서 뭐 한참 이야기를 한 다음에 그곳을 뭐 호랑이 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매년 음력 7월 7일이면 비가 온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겁니다. 또는

어떤 이야기가 그들의 현재를 설명해 주는 겁니다. 이거를 원인담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 앞에 있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라반을 떠나 에사오를 만나러 가는 과정

안에서 엘로힘, 또는 엘로힘의 천사와 만나서 씨름을 하다가 뭐 어딘가를 다치고

그러는데 그 이야기의 전체의 중요한 기능은 뭐냐하면,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다라는. 지금 그들의 이름이 이미 이스라엘인데 그 이름이

어디에서부터 오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인 겁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뭐라고 부르지요? 한족 또는 배달민족 이렇게 부릅니다.

우리 그와 같은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원인담을 알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온 줄은 알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 정체에 대한

원인담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지 못한 겁니다. 조금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될 일인 거 같애요.

 

예, 반대로 모세가 이렇게 자신의 아들을 할례하는 탈출기 4장에서의 이야기는

하탄 ㅡ 담밈, '피의 신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체적인 이야기에 따라서

원인담적 기능이 있는 겁니다.  '하탄 ㅡ 담밈', '피의 신랑'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그 이야기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왜 그랬을?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우선 고대 종교적인

입장에서 설명을 합니다. 옛날에는 각각의 신들이 자기 영토가 있잖아요. 그런데

한 영토에서 다른 영토로 넘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고속도로

같으면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서 통행료를 내야 되잖아요. 옛날에도 굉장히 중요한

세원 중에 하나가 누군가가 국가를 만들면, 아니면 도시를 만든다면은 그 도시를

운영하고 있는 운영비의 가장 중심이 뭐냐하면 통행료였습니다.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돈을 내야 한다. 그래야지 지나갈 수 있다라는.

따라서 이것도 신들이 통행료는 받는 그와 같은 개념. 하나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갔을 때 본래는 어떻게 하고 가야 하겠습니까? 본래.

 

우리가 신들한데 뭔가를 드리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뭔가를 드리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고대 사회에서는 제사였겠지요. 제사를 드리든지 아니면 그 신들에게 마음에

드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제 모세가

그곳을 떠나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는 과정 안에서 하나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 가면서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야곱이 라반이 섬기던 그와 같은 신들, 그와 같은 지역에서 자기 형이 있는 고향으로

오면서 종교적으로 새로운 신의 영역으로 들어 오면서 거쳐야만 했던 하나의 통과

의례가 아니냐? 폼나게 얘기하자면 통과 의례지마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통행료를

바치는 그와 같은 하나의 과정이 생략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것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하고 있는 1차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세 오경의 맥락 안에서는 모세가 고향으로 돌아

가는데 가서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와서 그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모세 자체가 그럴려면 충실한 이스라엘인이어야 되겠지요?

충실한 이스라엘인이라는 거는 어디에서 표시가 납니까? 그가 할례를 했는지 안

했는지.

 

따라서 모세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온전한 이스라엘인

이어야 하겠다. 미디안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미디안의 사제의 딸인 치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온전한 이스라엘

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라는 그와 같은 틀 안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대목에서는 그들이 계약의 징표로 갖고 있는 것은 앞선 창세기

 

뭡니까? 할례를 받았느냐입니다.

 

누군가가 천주교 신자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뭡니까? 세례를 받았느냐?

그와 같은 틀 안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것도 재미있는데요. 할례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잠시 후에 5장을 지나

가면서도 등장합니다만 어디에서 등장하느냐하면 탈출기 12장과 13장에서

등장합니다. 파스카 사건과 함께. 파스카 사건도 어떤 사건이지요?

 

파스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뭡니까?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른다라는 게 중심이거든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이집트를 떠날 때

누가 함께 떠나서 파스카를 함께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틀이 파스카 예절을 함께 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틀이 그가 할례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지난 번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여호 5,2-5의 내용입니다.

 

 

 

 

* "그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두 번째로 할례를 베풀어라.'"  여기서 두 번째라는 건 그겁니다. 이스라엘이

파스카를 하기 전에 이미 할례를 한번 했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 "그래서 여호수아는 돌칼을 만들어, 알랄롯 언덕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베푼 까닭은 이러하다.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백성

가운에 남자들, 곧 군사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도중에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섬기던 사람들은 모두 다 40년 동안 주고 맙니다. 그리고 나온

백성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죄를 지은 다음 세대들인데, 죄가 없는 그 세대들인데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겁니다.

 

* "그때에 나온 백성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이집트에서 나와 도중에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할례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기 5장이 뭐에 관해서 얘기하느냐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는 첫 번째 파스카 예절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파스카 예절을 지내기 위해서

그들은 우선 뭐를 해야 했던 겁니까?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뭐라고 그럴까요? 첫 영성체를 하기 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첫 대부가 되기 전에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 어떤 틀 안에서

파스카와 할례가 밀접하게 연결이 돼 있다. 그리고 파스카도 그렇고 할례도 그렇고

중심에 있는 표징은 '피'라는 표징이다.

 

피를 통해서 뭔가 구원을 얻어내는 그와 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그와

같은 표징이다. '피'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지상에 속한 것입니까,

아니면 천상에 속한 겁니까? 천상에 속했습니다. 피를 만지지 못합니다.

특별한 경우에 피를 사람들에게 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나중에 만나게 되겠지만 시나이 계약을 맺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뿌립니다. 피로 맺은 계약이라는 뜻에서. 또는 사제가 임직식을

할 때 누군가가 사제로 뽑힐 때 그가 피를 받게 됩니다. 거록한 것에 대한 그와 같은

어떤 하나의 표징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 그 다음 마지막 모세와 아론이 이제 만나서 백성 앞에 서는 장면입니다.

 

 

 탈출 4,27-31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아론을 만납니다. 아론이 길을 떠나서 어디까지 옵니까? 하느님의 산까지

옵니다. 하느님의 산은 어디입니까? 모세가 야훼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제 밝혀집니다만 다 같은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곳, 아론이 모세를

만난 곳,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는 곳 모두 시나이 산에 대한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시나이 산의 또 다른 이름은 호렙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다 같은 장소를 가지고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조금 다른 이야기

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지명들이 하나로 맞추어 진다고 우리가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가거라.' 그래서 아론은

길을 떠나 하느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좀 우리에게는 이상하지요?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은 본래 접촉을 안 하는 거 같애요. 우리는 인사를 하면서 그냥

"안녕하십니까?"  그러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 거 같애요. 서양 사람들한테 우리가

배운 거는 악수 하는 거 정도 배운 거 같애요. 특히 미국 사람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만나면 어떻게 할까요? 서로 친한 친구들은 볼을 비빕니다.

두번 비비고 네번 비비고. 저는 학생 시절에 학생 신분으로 로마에서 살았잖아요.

한국에 돌아오니까 그 습관이 남아 있는 거예요. ^^*~~~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이렇게 안으려고 그러는데 그 친구는 한 걸음 뒤로 가는 거예요. ^^*~~~

 

아무튼 그런데 이런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입을 맞추는 겁니다. 우리도 왜 어른들끼리는 이렇게 못하지만 애들이

랑은 입을 맞추고 그러는 것이 가능하듯이 여기서도 서로 입을 맞추는.

 

아직 교회 전례 안에서 이건 남아 있습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는 입을 맞춘다고

하지 않고 '친구(親口)'한다고 그럽니다. 언제 합니까? 성 금요일날 십자가 예절할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있으면은 예수님 발에다가 친구하지요? 입을 맞추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문화가 아니어서 그런지 좀 익숙하지 않으신 거

같애요.

 

본래의 천주교 예절 안에서는 친구한다. 예수님 발에다가 입을 맞춘다라는.

또는 사제가 미사를 시작을 하면서 제대에 친구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예절

안에서는 교회 전례법 안에서 꼭 친구하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의를

표시하면 됩니다. 서양에서는 친구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깊은 절만 합니다만

친구하는 것.

 

여기에서 아론은 모세를 만나서 그에게 입을 맞춥니다.

비슷한 내용이 창세 33,4에서도 나옵니다.

 

 

 

둘 다 형제들과 상봉한.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입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웁니다. 여기서는 입만  맟춥니다. 울지는

않습니다.

 

예, 그 다음에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원로들을 불러 모아서 아론과 모세가 야훼

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모두 그들에게 들려 줍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표징을 일으

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믿습니다. 요 믿었다는 이야기는 히브리 말 동사로 '아만'

이라는 동사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보고 믿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어 경배합니다.

 

* "그러자 백성이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

 

무릎을 굻고 절을 하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우리는 절을 할 때  어떻게 절을 합니까?

손바닥이 하늘을 향합니까, 땅을 향합니까? 땅을 향합니다. 근데 고대 근동에서는

팔꿈치가 땅에 닿고 손바닥은 하늘을 향합니다. 예, 그렇게 절을 합니다.

비슷한 대목이 창세 43장에도 나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아직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절을 하고 있는 겁니다.

또는 1열왕 1,16에서 밧세바가 무릎을 꿇고 임금에게 절하자 임금이 "무슨 일이오?"

하고 물었다. 따라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합니까?

뭐 좀 낮은 사람이 조금 높은 사람에게,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꼭 신적인 존재에게만 이렇게 합니까?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들이 이렇게 아멘 하고 그들이 믿었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이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는 이야기들은 굉장히 긍정적인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단지 혹시 잘못 생각하셔서, 따라서 이거는 야훼 하느님을 정말로 신적인 존재로

어떤 극한적인, 절대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거다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부터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아 갈 겁니다.

천천히, 천천히. 몇 년 동안? 40년 동안 천천히 알아 갈 겁니다.

 

아멘이라는, "그러자 백성이 믿었다." '아만'이라는 동사가 사용됐습니다마는

구약 성경에서는 굉장히 많은 경우에 '아멘'이라는 말이 직접 사용됩니다.

 

 

또는 저주랑 관계가 있습니다. 신명기 27장에 12가지의 저주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고 응답해야 됩니다.

 

 

 

예를들어 15-16절: "주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새겨 만든 우상이나 부어 만든 우상, 곧

장인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은밀한 곳에 두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하면 온 백성은

'아멘.'하고 응답해야 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온 백성은 '아멘.'하고 말해야 한다."

 

어떤 뜻입니까?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멘하고 응답하는 겁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만'이라는 동사가

사용된 겁니다.

 

 

 

 

예레 11,5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만'이라는 동사가 사용된 겁니다.

 

 

 

 

느헤 5,13: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하자 회중은 "아멘!"하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는 일부러 우리 말 성경이 번역을 안 했습니다.

주교회의 성경이. 그리고 이렇게 그냥 놔 두었습니다. 왜 번역을 안 했을까요?

뭐 회중은 "참으로 그렇습니다!"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럴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아멘"이라는 말이 이미 구약 시대에 그 뜻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례적은 응답으로 자리를 잡아버린 겁니다. 아무도 아멘이라고 얘기 하면서,

아멘이라는 것의 그 동사의 본래의 뜻은 '아주 굳건하다', '믿는다'. 뭐 이런 의미가

안에 숨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서로 만났을 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러지요? 그런데 정말 상대방의 '안녕'에 관심이 있습니까?^^*~~~

관심이 없잖아요. 그냥 만나서 첫 마디가 그런 거 아니예요. 그리고 또 떠날 때

"안녕히 가세요!" 하고 얘기하잖아요. 하지만 상대방의 안녕에 관심이 없더라도,

없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다라도, 아니면 요새 통화하면은 전화로 상품 파는 그런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고객님, 사랑합니다.!" ^^*~~~ 자기가 나를 언제

봤다고.^^*~~~

 

예, 이런 걸 뭐라고 그러지요? 이런 거를 상투적인 어투라고 얘기하지마는 성서

주석가들은 이런 것들을 문학 양식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한 의미 없이,

성찰 없이 그냥 항상 그렇게  사용되는 거.

 

예를들어 누군가에게 공문을 보낼 때 첫째 줄은 항상 그거죠?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경쟁기업이라 할지라도 아니면은 성직자들끼리 누군가에게 뭔가를 보낼 때

굉장히 싸울만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조금 이렇게 섭섭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존경하는 누구누구 신부님께, 누구에게, 장상에게 이렇게 보냅니다.

존경하는 마음과 관련이 없더래두 이런 하나의 문학적 양식입니다.

 

예, 따라서 아멘도 그렇대는 겁니다.  시편에 보면 가장 전례적으로 많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구약 성경의 책인시편을 보면,

 

 

 

앞에서 우리가 본 내용은 저주의 내용들에 관해서 정말 그렇게 벌 받을 겁니다라는

것에서도 아멘 했지마는 여기서는 하느님은 영광과 찬미를 받으십시오." 하는데서도

아멘. 아멘. 한번 하는 게 아니라 앞에서도 그랬지만 두 번씩 대답하는 겁니다.

한번 가지고는 뭔가 부족한 겁니다.

 

나중에 신약으로 넘어오면 주교회의 성경 중에서 아, 내가 번역했으면 이렇게 안

했겠다라는 것들이 있는데 예수님도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굉장히 많이

시작합니다. 그리스 말로 다음과 같습니다. "아멘. 아멘. 레고 휘민."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주교회의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했냐 하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아멘이라는 말은

그리스 말입니까, 히브리 말입니까? 히브리 말입니다. 그리스 말로는 그런 말이

없어요. 그 말은 번역 안 하고 그냥 놔 두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애요.

 

제 느낌인데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이 이어졌으면은 참 좋았겠다고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마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신자들이 알아야 된다라는 그런 뜻으로 아마 새로 번역된

성경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고 번역한 거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아멘. 아멘이라는 형식은 나중에, 따라서 어디까지 쓰인 겁니까?

신약시대까지. 요한 묵시록 맨 마지막이 뭐라고 끝납니까? '아멘.'하고 끝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진실입니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쓰였을 것이고 전체적인

내용을 하나의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고백, 나의 기도입니다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쓰여졌을 겁니다.

 

아무튼 이 아멘이라는 것은 전례적인 틀 안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전례적인 틀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냥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만나는 그

자리 안에서 하느님이 초대된 그 자리 안에서 사용되었던 응답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그리고 그 마지막은 모세는 과연 의로운 사람이었다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집중이 됩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 오면서 이제 야훼는 파라오

에게 누구냐?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누구냐? 이런 질문으로 조금씩 조금씩 같은

질문이 다른 문맥 안에서 재차 던져지게 됩니다.

 

 

 

앞선 대목에서 저희가 조금 빼 먹은 게 있습니다.

하나는 3. 4장 이야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학적 모티브가 하나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본래의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가 장인의 양떼를 치기 위해서 목자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입니다. 목자는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회적 약자입니까? 사회적 약자

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들고 다녔던 어떻게 보면 좀 볼품

없는 지팡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그 지팡이는 이제 모세가

지니는 신적 권위를 갖는 지팡이로 변합니다.

 

물론 첫 번째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뭐 그런 어떤 작은 표징의 도구이지마는

나중에 열 가지 재앙으로 넘어 가면은 그 지팡이를 가지고 굉장히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나중에 갈대 바다를 건널 때도 그 지팡이를 뻗치자 바다가

갈라지고 그 다음에 나중에 광야로 가서도.  결국 이 지팡이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어디에 자리 잡을까요?

 

계약의 궤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굉장히 커다란 신학적 역설입니다. 한 목자의

지팡이가 나중에 하느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와 같은 신학적 역설이 아주  자주

일어납니다. 가장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소용이 없을 거 같은 그  무엇

으로 하느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셨다.

 

신약으로 넘어와서도 가장 배울 것 없는 그런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그와 같은 역설들. 로마 시대에 가장 죄 많은 그와 같은 정치범들을 처형하던

십자가가 구원의 징표가 되는 그와 같은 역설들.

 

우리는 인간적은 면에서 판단해 본다면  도저히 그 쓰임새가 아닌 거 같은데

하느님께서는 그곳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한 어린 아이가 갖고

온 정말 별 것 아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루셨대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드리는 볼품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신 대는 겁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을 통해서 하느님은 세상을 바꾸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아,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하셔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런 내가 한

작은 정성을 통해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것이 우리들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세의 이야기에서부터 마지막에 예수님의 복음, 또 뭐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 안에서 그런 신학적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치 없는 일이었는데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더라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예, 이제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갑니다.

 

 

 

 

after라는 그런 의미의 히브리 말이 쓰였습니다. '아하르'라고 부르는 뭐뭐뭐의 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뭐뭐뭐의 다음을 이야기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간에 대한 표시가 쓰였대는 것은 새로운 단락이, 새로운 문학적

단위가 시작한다는 일종의 작은 표시입니다.

 

자, 그리고 그들이 파라오에게 가서 이제 말을 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시키신

그대로지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직역한다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이 이렇게 말했다. 야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보자면 이런 투의  말을 누가 할까요? 예언자들이 합니다.

여러분들 저한테 예언서 입문 들으신 분들 기억하시겠지마는 예언이라는 것에

대한 성서적인 정의가 뭡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겁니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했다. 엘로힘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 독서하신 봉사자가 독서를 다 끝내고 나서 뭐라고 얘기 합니까?

이거는 내 말이다 그럽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독서하신 

봉사자는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은 왕직, 예언직, 사제직 가운데 어떤 직무를

수행한 겁니까? 예언직을 수행한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그런데 그거를 뭐라고 표시하느냐? 구약성경 내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여기서는 바로 모세와 아론이 그와 같은 역활을

수행합니다.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이 이렇게 말했다."  이거를 흔히 주석가들은 '메신저 정식'

이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거는 본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느느냐하면

누군가가 야훼가 저에게 얘기해서 제가 파라오에게 전하다면은 그걸 해석해서

전하면은 안 됩니다. 자기가 들은 거를 토시 하나 안 바꾸고 녹음기에 녹음해서

들려 주듯이 고대로 얘기해야 됩니다. 한 마디도 변하지 않고 고대로 얘기 하는 것.

것이 '메신저 정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 이라는 그와

같은 호칭입니다. 앞에서 야훼는 자기를 부를 때 어떤 엘로힘이라고 불렀지요?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안 부릅니다. 그리고 누구라고 부릅니까? "이스라엘의 엘로힘"

 

아직까지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정식적인 계약의 관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조들의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느님

으로 조금 앞당겨져서 이 표현이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근본은 뭐냐?

그 앞에서 4장 마지막에서 백성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믿었다" 라는 백성의

믿음이 이제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또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라." 이 표현도 역시 지금까지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을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 내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내보내라." 앞으로는 이 명령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 안에서는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리고 그 목적은 뭡니까? 이것도 처음 나오는 얘기입니다.

 

예, 우선 탈출 3,18을 보자면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거는 이겁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명령이 그대로 지켜지는 겁니까?

아닙니다. 첫째, 어떤 점이 안 지켜집니까? 뭐가 보입니까?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갑니까? 모세와 아론만 갑니까?

모세와 아론만 갑니다. 첫 번째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 야훼를 여기서는 누구라고 부릅니까?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라고

부르지요? "히브리인들의 엘로힘.", "이스라엘인들의 엘로힘" 표현이 변했습니다.

마지막에 "야훼 우리 엘로힘에게 제사는 드릴 수 있도록 하라" 여기서는

"축제를 지내도록 하라."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원로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 '히브리인들의 엘로힘, 이스라엘의 엘로힘'

세 번째, '제사. 그리고 축제'

 

따라서 엄격하게 야훼가 명령한 대로 여기서 실행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예, 내 백성을 내보내라." 라는 표현도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처음 나오는 표현이었고

그 다음에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  축제를 지낸다라는 말 안에서 어떤 어감이 표현

되어 있냐하면, '뛰다', '춤추다'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 오늘날에는 굉장히

세속적으로  이해가 되지요? 아무튼 춤춘다 하지만 고대 세계 안에서는 춤춘다라는

게 뭐겠습니까? 제사의 의미입니다. 우리들도 아직까지 그런 것들이 남아 있지요?

 

무속에서 굿하면서 무당들이 어떻게 하지요? 춤 춥니다. 뭔가 그런 엑스타시

(Ekstase, 황홀감. 절정감. 희열. 2. 의식의 혼탁 상태. 정신 혼미)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요즘도 역시 우리가 춤출 때도 마찬가지지요.

 

저는 클럽 같은 데는 안 가봤습니다만 일반적인 조명이겠습니까? 이상한 조명

이겠습니까? 그 다음에 거기서는 녹차 같은 거를 마실까요? 술을 마십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까요? 아닙니다. 음악, 술, 뭐 조명 이런 것들이 사람을

일반적인 상태에 머물게 합니까? 아니면 좀 다른 차원으로 보냅니까?

 

예, 과거에는 춤춘다, 아니면 담배 피는 거,연기를 낸다. 이런 것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가 이거를 이제 역사를 파 들어가 보면 그것이 어디에서

기원했나 보면은 종교적인 기원이 있는 겁니다.

 

예, 따라서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 뛴다. 춤춘다. 그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그런 의미들. 그래서 저는

사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조금은 그런 전례적인 그런 움직임에 관해서 우리가

조금은 시도해 볼 수 있겠다라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거는 사실 우리 천주교회 보다는 개신교회에서 지금 많은 시도를 하고 있고,

또 좋은 결과도 얻고 있는 거 같애요. 우리는 제가 만일 주일 미사 때 우리

신자들과 함께 우리 기도하면서 한번 같이 동작해 봅시다. 그러면 저희 본당

신자들이 따라 할까요? 천주교는 좀 점잖아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애요.

그래서 몸을 움직여서 그것을 표현해 볼 수 있는데 여러분들 혹시 방에서,

집에서 아무도 안 보는데 혼자 이렇게 문 잠그고 혼자 기도하면서 조금 표현해

보시는 분 있습니까? ^^*~~~

 

예,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말로도 하고, 노래로도 하고, 다른 것도 할 수 있는데

춤으로는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들. 그래서 요즘에 젊은이들 모임에

이렇게 기도 모임 같은데 가면 율동 찬양 이런 것들 합니다. 그거 저는 대단히

좋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트루지칼 댄스(전례 댄스) 에 관해서 우리들이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우리 몸과 마음,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좀 찬미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것들

좀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그런 길을 좀 발견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몇몇 수녀원에서 아마 시도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결과물을 제가 본 적이

없어서.  아무튼 사목적으로도 그런 거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요즘에 거기까지는 못하고 저희 본당에서 학생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할 때

수화를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 이제는 따라 하시는

거 같애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 정도는 수화를 통해서 이렇게 동작을 하면서 하는

그런 것들. 우리들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애요.

 

두 번째는 광야에 나오는 이유가 3,18에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게

해라." 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사를 드린다라는 말 안에는 제사는 뭘

갖고 드립니까? 제물. 뭔가 동물을 죽이는 그와 같은 어감이 그 밑에 있고.

 

 

종, 노예라는 명사와 서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는 것이 광야에 나가는

탈출기에서 지금까지 언급된 세 목적입니다.

 

첫째,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둘째,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셋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그들은 광야로 나간다라는 그와 같은 표현들을 우리가 만납니다.

거기에 대한 파라오의 대답은 모두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내가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야훼는 누구인가?"

이집트는 다신적인 사회였지요? 굉장히 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들으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야훼라는 이름은 들어 본 겁니까? 못 들어 본 겁니다.

"나는 그런 이름 처음 들어봤다. 나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둘째, "나는 그 야훼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탈출기의 모든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어느날 이집트의 새로운 임금이 요셉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새로운

임금이 됐는데 요셉을 알지 못했다라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나는 야훼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너희 말을 듣고 이스라엘 역시 내보내지 않은 것이다."

라는 것이 파라오의 대목입니다.

 

야훼가 누군가 나는 그를 모른다. 따라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려면은 파라오가

야훼가 누군지 알게 되면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겁니다. 그 파라오가 야훼가 누군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들이 진행이 됩니다.

 

 

이집트인들은 비로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야훼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탈출 7,5("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을 보면 따라서 명시적

으로 이집트인들은 이제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이 모든 스토리의

한가지는,

 

탈출기라는 역사적 진행에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모세가 모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이 야훼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

이집트로 야훼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 텍스트에는 쓰여져 있지 않지만

그리하여 나중에 예언서에 등장하는 것처럼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이런 사건의 목적인 겁니다.

 

사건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역사가 목적이래는 겁니다. 사건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커다란 큰 목적은 뭐냐? 그리하여 온 세상이 비록

야훼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 오늘날 보면 어떤 선교 신학이랑 연결 돼

있는 그런 테마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14회 조상들이 파라오에게 항의하고 모세에게 불평하다: 탈출 5,6-21이

계속 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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