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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13일(금) 聖요한 크리소스토모, 聖아마토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2 조회수400 추천수0 반대(0) 신고

 

 


9월13일(금) 음8/9
聖요한 크리소스토모, 聖아마토


 

요한 크리소스토모(9.13)

성인명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축일 9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연도 344/354?-407년
같은이름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으나,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친구로 후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Diodurus)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Melitius)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어린 간청 때문에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Flavia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90년부터는 신약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황제는 성 요한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난하여 악화되었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성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 후 404년에 황제는 그를 다시 쿠쿠수스(Cucusus, 지금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되자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한은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a)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金-"라는 별호로 불릴만큼,

명강론과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교회의 세속화를 막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성 금구 요한 님이시여

사제들의 명강론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아마토(9.13)

성인명 아마토(Amatus)
축일 9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수도원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630년경
같은이름 아마또, 아마뚜스, 아마투스, 아메

 


성 아마투스(Amatus)

 

 


 

 

성 아마투스(또는 아마토)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
어느 프랑스계 로마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아가우눔 수도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였고,
커서는 공동체의 수도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땅을 일구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 독수생활을 즐겼지만,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
그를 뤽세이유(Luxeuil)로 인도하여 수도원 수도자로 만들었다.
성 아마투스의 빛나는 공적은
하벤둠 성주인 메로빙거 귀족인 로마리쿠스(Romaricus)를 개종시킨 사실이다.
그의 개종은 아마투스가 식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영성을 얻기 위하여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마투스는 은접시와 귀중한 집기들을 가리키면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준 뒤에 나를 따라 오시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로마리쿠스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시행한 뒤
뤽세이유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620년경 그 개종자가 수도원을 세운 다음 아마투스를 원장으로 모셨다.
성 아마투스는 그 후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원장직을 사임하고
은둔소에서 독수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였다.
아메(Ame)로도 불린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
예정의 say

 

 



뛰어난 영성으로 감화력이 넘쳤던

성 아마투스 님이시여,

추수할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 현세에서
언제나 이웃의 모범이 되려는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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