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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5 조회수1,104 추천수8 반대(0) 신고

  

 

연중 제24주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32<또는 15,1-10>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회개나 내면과 외면의 변화들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관한 말씀은 ‘탕자의 귀향’이라고도 합니다. 왜 귀향이냐? 아버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비유의 말씀을 ‘자비하신 아버지, 사랑의 비유’로 받아들입니다. 아들을 품는 한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집의 풍요로움, 즉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의 회개를 불러일으킨 아버지께 초점을 맞춥니다.

  

질문한가지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있었고, 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챙겨 밖으로 나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구절을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무엘 상권 16장7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 하느님은 속마음을 본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 큰 아들 둘 다 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마음을 보면 큰아들도 집을 나갔습니다. 큰 아들은 겉으로 보면 착한 아들입니다. 아버지 일을 열심히 돕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완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한마음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루카15,29)하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풍요로운 집에서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큰 아들은 흠이 없는 인물이지만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는 아버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둠의 권세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속을 부글부글 끌어 오르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분노와 아버지께 대드는 무례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모습이 송두리째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옆에서 슬쩍 건드려 보면 그 사람 속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담을 것을 잘 담아야 합니다. 쏟아져도 괜찮을 것을 담아야 합니다.

 

사실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 올바른 사람, 열심한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가운데는 더 많은 원망과 훨씬 더 많은 비판과 저주와 분노,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일까? 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불평불만하고 무관심하며 무례한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도 큰 아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바라는 것만큼의 동정과 만족을 얻어내려는 속셈으로 나의 불평을 늘어놓을 때에는 언제나 그 결과가 항상 내가 얻으려고 했던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집을 나간 아들은 큰아들, 작은 아들 모두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두 아들 모두를 품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최고의 것으로 작은 아들을 맞이하고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아버지 품에 안기고 한 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품은 한없이 넓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기지 못하는 아들이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가장 하기 힘든 회심은 바로 집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의 회심입니다.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옆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써 자기 생각의 천박함과 마음의 옹졸함을 감추어 왔던 큰 아들도 귀향을 해야 합니다. 두 아들 다 품으시는 아버지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곧 하늘 아버지 이십니다.

 

작은 아들은 극심한 고통,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후에야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어둠을 겪고 나서야 밝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품삯을 받는 일꾼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하느님의 큰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해주신다는 것은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두 아들 다 잃은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이상 주장 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서 으뜸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죽음을 택하였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였습니다(로마5,20).

 

따라서 혹 허물이 있다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한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혹 큰 아들의 숨은 귀향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램블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면서 묵상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림 보이시죠?

 

 

소련 레닌그라드(세인트 페테르스부르트)의 에르미타즈궁을 위해 1776년에 까뜨린드 대제가 획득하여 현재까지 거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높이 8피트(2.4미터) 폭6피드(1.8미터) 의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모습은 굽은 허리에 눈을 보면 장님에 가깝고 거기에다 사시가 되어버린 눈입니다. 아들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과 사랑 때문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망토는 넓게 펴져서 아들에게 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큰아들이 입고 있는 망토는 그저 그냥 걸치는 망토일 뿐입니다.

 

 

 

 

그리고 손을 보면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 손이고, 한 손은 강인한 아버지 손입니다. 어머니의 손은 위로와 평안을 주고 특히 아버지 손의 엄지를 보면 힘이 들어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악수 할 때도 그 힘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잖아요. 괜찮아 힘내! 하는 손, 용서와 화해로 상처를 치유하는 축복의 손, 용기를 주는 손을 표현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의 낡은 속옷 차림과 다 닳아 빠진 신을 통해서 그 고통과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 얼마나 큰 고생을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얹어진 아버지의 손에 빛이 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너에게 축복을 주노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총은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위안과 희망을 간직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핵심입니다.

 

작은 아들에게 남겨진 위엄의 상징은 덜렁거리며 걸려있는 단검입니다. 그것은 그의 품위가 하락하는 와중에도 아직도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인연은 끊을 내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큰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와 작은아들의 모습을 문턱에서 그냥 말없이 서 있을 뿐입니다. 웃지도 않고 손을 내밀지도 않으며 구경꾼이고 방관자의 모습입니다. 몸과 손은 어둠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나마 얼굴에 비쳐진 빛은 차갑고 냉정해 보입니다. 그래도 빛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은 그 아들도 빛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억지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입니다.

 

옆에 앉아서 가슴을 치며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인과 세리를 대표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뒤편의 기둥에 기대고 있는 여자와 피리를 들고 있는 여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잔칫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머물던 곳인데 어둠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하게 묵상할 수 있겠으나 빛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포옹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큰 아들이 되었든 작은 아들이 되었든 간에 아버지께서는 큰 사랑으로 모두를 품으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하겠고 또 우리도 모두에게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오늘 평화의 인사는 당신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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