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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100주간2 제15회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5 조회수344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5회 모세가 야훼에게 탄원하다: 탈출 5,22ㅡ6,13

 

안녕하십니까?

5장1절부터 5장 21절에는 계속해서 대조적인 그런 모티브들이 사용되는 겁니다.

야훼와 파라오, 제사와 임무, 축제와 일. 그것을 통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정하라는 겁니다. 야훼의 백성이 될 것인가?

파라오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익숙한 삶 안에서 그냥 살아갈 것인가?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새로운 것으로 떠날 것인가? 지금까지 해 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을 한번 새로운 장을 열 것인가 아니면 지금 살아온 것처럼 그냥 살아갈 것인가?

 

우리들은 젏었을 때는 어떤 마음이죠? 뭔가 새로운 거를 막 하고 싶어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아이들한테,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자녀들이 뭔가 새로운 거를 해 볼려면은, "그래, 엄마가 아빠가 도와

줄께 한번 열심히 해봐!" 그럽니까? 아니면은 "야, 그냥 우리 하던대로 하자!" 라고

합니까? 물론 뭐든지 새로운 거를 해서 뭐든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정말로 새로운 것을 향해서 더군다나 자유라는, 해방이라는 그런

가치를 향해서  자신을 열어가는 그런 용기를 내야 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우리

탈출기를 좀 읽어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을까?라는.

이스라엘은 모세는 어떻게 보면 우리들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겁니다.

 

21절에서 등장하는 '역겹게 하다'라는 내용은,

21절: 당신들은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만들어, 우리를 죽이도록

그들 손에 칼을 쥐어 주었소."

 

우리들의 냄새를 역겹게 했다는 표현인데 이게 단지 혐오의 표현이 아니라, 혐오는

단지 피하는 거 아니예요. 그게 아니라 이건 증오랑 좀 관련이 돼 있는 거 같습니다.

따라서 이게 우리 말 표현으로는 잘 전달이 안 되는데 아랍 세계에, 고대 근동의

그런 세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커다란 가치를 두고 또 그것이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와도 조금 관련이 됩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죠? 하느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 내가 정말 의로운가 아닌가에 관해서 보다는 하느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에 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건 어떻게 보면

문학적인 차이겠지마는.

 

따라서 여기서 우리들의 냄새를 역겹게 한다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혐오 정도가 아니라 증오의 단계인 거 같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도 그 표현이 한번 쓰였는데요. 야곱이 딸이 하나 있지요?
디나입니다.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잖아요. 성폭행을 당하는데 그 스켐에 있는

그 친구가 디나를 정말로 좋아했던 거죠. 결혼 할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랑 결혼 하려면 당신들은 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할례를 하고 뭐 당시에는 항생제도 없고 그랬을테니까

굉장히 아파가지고 있는데 밤에 들어가 가지고 몰살을 시키는. 그러자 야곱이

시메온과 레위를 이렇게 야단칩니다.

 

 

 

그러자 야곱이 시메온과 레위에서 말하였다.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에게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여기서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같은 단어입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역겹게 하다'와.

 

"나를 흉측한 인간으로 만들어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구나. 나에게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면 나에게 사람이 얼마 없는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면 나도 내 집안도 몰살당할 수 밖에 없다. 역겹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역겹다면은 그는 어떻게 될까요?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야훼 하느님께서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역겹기 때문에. 여러분들 왜 예수님을 잡으로 이렇게 오는데 대제사장의 종이

따라 오다가 베드로가 칼을 내리치니까 귀가 잘려 나가잖아요. 그러면은 그는

대제사장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참석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역겨운 인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거는 단지 신체적인 어떤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겠지마는. 역겹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롭다라는 것의 반대쪽에

있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따라서 자기가 나가는 그와 같은

표현으로 우리가 이 표현의 중대함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이제 모세가 야훼에게 탄원하는 그와 같은 대목으로 넘어 갑니다.

 

 

 

5,22: 그러자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 아뢰었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

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로 이 백성은 괴롭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 주시지 않습니다."

 

파라오 앞에서는 쪼라 있었는데 ^^*~~~ 하느님 앞에서는 할 얘기 다 하지요?

우리 자식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얘기가 뭡니까?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습니까?" ^^*~~~

왜 나를 낳아 가지고 이 고생을 시키느냐? 는 거의 그런 톤이예요.

 

야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직역한다면 뭐냐하면?

"당신 왜 이렇게 이 백성에게 악하게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악한 존재로, 여기서 악한 신으로 등장합니다.

당신이 이 백성에게 왜 이렇게 악하게 그렇게 합니까?

 

두 번째, 왜 하필이면 나를 보냈습니까? 나 안 한다고 그랬는데, 나 안 간다고

그랬는데, 다섯 번이나 내가 거절했는데.

 

그리고 세 번째로 그렇게 내가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 이제는 파라오가 이 백성을

괴롭힙니다. 파라오가 이 백성을 악하게 합니다. 사실 이 백성에게 악하게 하는 건

파라오죠? 하지만 그런데도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 특이합니다. '이 백성'이라고 그러지 않고 '당신 백성'이라고

그랬습니다. 야훼가 야훼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을, 어느 신이 자신의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백성은 그 신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또 그런 절망적인 기도를 하잖아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절망

인지 아니면 시편 기도를 노래했는지 모르지마는,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주님, 주님! 왜 나를 버려두십니까?", "나를 돌보지 앟습니까?", "나를 구해주지

않습니까?" 라는 시편의 기도를 십자가 상에서 하시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내용

입니다.

 

당신이 우리들의 하느님이면 우리들을 지켜 주는 신이라면, 그 신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 줄 일종의 신적인 임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하지 않습니까?

라고 따집니다.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재미있습니다. 조장들이 와서 이 모든 불행의 책임을 누구 때문이라고

얘기합니까?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모세는 이 모든 책임을 누구

때문이라고 얘기합니까? 하느님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뭐가 좀

생각나야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아담에게 물어 보니까, 여자 때문에 그랬습니다. 여자에게 물어 보니까,

뱀 때문에 그랬습니다. 자신들에 대한 그런 성찰 없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일어

나고 있는 모든 사고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표면만 보고,

겉만 보고 책임을 계속해서 떠 넘기는. 누구 때문에 그래.

 

여러분들도 마음 안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지요? 어떤 일이 있을 때,

누구 때문에, 누가 나한테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뭐만 안 했으면, 수 많은 가정들을,

또 수많은 책임 전가를 우리들 안에서도 역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예, 그러자 이제 주님께서, 야훼가 모세의 탄원에 응답합니다.

모세가 탄원하고 하느님이 응답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응답하는데 이것도 역시

셋으로 나눕니다. 앞에서 조장들의 얘기가 셋으로 나누듯이.

 

 

 

주교회의 성경이랑 저는 조금 단락 부분을 다르게 하겠습니다.

예, 모세를 향한 야훼의 응답은 한 절에 불과합니다. "너는 될 것이다."

6,1: "이제 너는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시작은 어떻게 합니까?

6,3:"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나타났으나,

'야훼'라는 내 이름으로 나를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좀 익숙한 표현이지요? 탈출기 3장에서 하느님이 계속해서 자기를 누구라고

얘기합니까? 첫째, 야훼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고, 둘째, 아브라함의 엘로힘,

이사악의 엘로힘, 야곱의 엘로힘이라고 얘기 하는데 그것이 다시 한번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전능한 하느님' 히브리 말로는 '엘샫다이'입니다.

 

6,1: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정녕 그는 강한 손에 밀려 그들을 내보낼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 그가 가기 땅에서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

 

두 단어가 연속으로 나오지요?

강한 손에 밀려 내보낸다. 강한 손에 밀려 내쫓는다.

여기서 내쫓는다라는 동사는 다음과 같은 대목입니다.

 

 

 

목자들이 이트로의 딸을 우물가에서 쫓아냅니다. 

게스솜, "내가 쫓겨나서 이곳에 와서 이방인처럼 되었구나."라는 모세의 아들

이름에도 쓰였고, 그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났다라는 그런

표현이 쓰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서.

 

따라서 한 가지 해석만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은 뭡니까? 탈출했다라는 개념이지요?

누군가가 못 나가에 하는데 그걸 억지로 나가는 거를 탈출했다고 하는 거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탈출했다는 겁니까? 아니면은 쫓겨났다는 겁니까?

이건 쫓겨난 겁니다. "니들 나가!" 두 번째 해석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스라엘은 알아서 나오고 이집트는 빠이빠이 하는.

은 그릇, 금 그릇 이런 거를 줘 가지고 이집트인들의 호감을 받아서 그곳에서

이렇게 나가게 하는. 따라서 이집트를 탈출하는 양상에 있어서 한 가지 해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몰래 그냥 자신들이 어떻게든 노력해서 도망가는 그런 탈출의 그림들.

또는 쫓겨나는. "야, 니들이 있으니까 자꾸 이집트에 나쁜 일이 생겨. 그러니까

나가!" 세 번째로는 뭔가 이렇게 환대를 받으면서 이집트에서 나가는 그와 같은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는 내보낸다. 하나는 내쫓는다. 둘다 공통된 양상으로 강한 손에 밀려.

강한 손이라는 거는 어떤 뜻일까요? 손이라는 건?

'힘,' '권능' 이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자, 오경 안에서 제 가지 표현이 사용됩니다. 손가락, 손, 팔.

이 중에서 제일 쎈 표현을 팔입니다. 중간은 손, 세 번째로는 손가락.

이 세 가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표현이 있는데  손가락, 손, 팔 이런 표현의

어떤 강도에 관해서 우리들이 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 그리고 2절로 넘어 갑니다. 요번에는 1절에서는 모세에게 얘기 했다면,

2절에서도 모세에게 얘기하지만 주체가 조금 변합니다.

1절에서는 누가 얘기합니까? 주님이라고 그랬으니까 야훼가 얘기합니다.

2절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했으니까 엘로힘이 얘기하는 겁니다.

 

1절에서는 야훼가 모세에게. 2절에서는 엘로힘이 모세에게 이야기 하는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야훼다.

2)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엘샫다이로 나타났다.

3) 하지만 나의 이름 야훼를 그들에게 알려지게 하지 않았다.

4) 그리고 나는 또한 나의 계약을 그들과 함께 세웠다.

어디서 세우지요? 창세기 15장, 창세기 17장, 그리고 야곱과 함께

계약을 세우는 그런 장면들이 창세기 36장 이후 등장합니다.

 

그런데 뭐냐?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준다는 계약을 그들과 함께 세웠다.

그 가나안 땅이라는 거는 어떤 땅이냐? 그들이 거기에 살던 그들의 나그네살이 하던

그 땅을 이제는 너희에게 주겠다.지금까지 나그네살이 하던 그 땅의 너희는 주인이

될 것이다라는 계약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 내 자신이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살아야 될 그 백성이 이집트인들이 종으로 부리는 그런

처지에 놓인 그런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6) 그리고 나는 나의 계약을 기억하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새로운 내용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저 선언으로 시작한대는 거. "나는 야훼다."

아주 장중한 시작입니다.

 

자,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대부분은 영어를 하실꺼예요.

어디 가가지고  Who are you? 라고 누군가가 물어 보는데 영어로.

영어로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개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제 이름이 분도잖아요. 베네딕도. 그랬을 때,

My name is  Benedictus.  할 수도 있지요?

 

우리 영어 교과서에는 흔히 뭐라고 나오죠? My name is  Benedictus 라고

나옵니다. I am  Benedictus 하면 틀릴까요? 아닙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되면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내가 미국 대통령이나 ^^*~~~

아니면은 유명한 영화배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명한 사람일

경우에는 I am 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그런 표현을 쓰면은 듣는 사람이, "참~, 누구야?"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은 어디다 전화해 가지고 뭐 이런 거죠.

"예, 저는 누구라고 합니다. 누구와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어디에 전화해서 "어, 나 누군데 누구 좀 바꿔!" 뭐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 둘 사이에는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야훼다."라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했다면은

굉장히 거만한 표현입니다. "내 이름은 뭐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야훼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거만한 표현이 요새는 어떤 트랜드가 된 거 같애요.

뭐, "나는 가수다!" ^^*~~~ "나는 꼼수다!" 이런 것들 사실은 굉장히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고, 뭐 니가 나를 몰라? 뭐 이런 식의 표현인 겁니다.

굉장히 자기 자신에게.

 

그런데 여기서 야훼가 선언하는 겁니다.  "너희가 이제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될꺼야. 내가 누군지 알어? 내가 야훼야!"

뭐, "이 동네에서 나를 몰라?" 안다는 겁니다.

"나는 야훼다!" 중대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나서 쭉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번 되짚습니다.

 

자, 여기서 우선 '엘샫다이'라는 것은? 여기서 샫다이라는 것은 산과 좀 관련이

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능력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은 '전능하 엘'  또는 '전능한 하느님'이라는 번역이  좋은

번역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구약에서 이 엘샫다이라는 이름은 사용은 됩니다만 하지만

하느님을 나타내는 중심 명칭은 아닙니다. 나중에 민수기 1장에 보면,

사람의 이름 가운데 이 샫다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이 몇 번 나옵니다.

 

예를들어 민수 1,5에 보면 '스데우르'라는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스데우르의 스데가 샫다이랑 같은 어원입니다. 샫다이우르라는 뜻이고,

민수 1,6에 보면 추리샤따이, 민수 1,12에 보면 암미샤따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스데우르나 추리샤따이나 암미샤따이라는 인물이 모두

굉장히 고대의 인물인 거 같애요.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들은 각 지파의 대표인 누구다. 뭐 이런 식의

민수기 표현에서 이 이름이 사용되거든요.

 

따라서 젊은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는. 요즘에 누가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름을

'혁거세' 이렇게 짓지 안잖아요. 따라서 이미 오경이 쓰여질 당시에서부터 샫다이

라는 말은 굉장히 오랜 역사 이전에는 불렀던 그 어떤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은 그와 같은 이름들이 몇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조차 않습니다. 그건 그냥 옛날 이름이야

너희는 몰라도 돼!" 이런 식입니다. 엘샫다이, 엘엘리온. 들으신 기억이 납니까?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을 만났을 때 멜키체덱이 누구를 섬기는 사제입니까?

창세기 14장을 보면 멜키체덱과 엘엘리온에 관한 그와 같은 이야기들을 읽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엘엘리온'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아무튼 고대의 그와 같은 하느님. 따라서 성조들과 연결 됩니다.

 

6,3절: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엘샫다이'로 나타났다.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는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봅시다.

 

4절: "또 나는 가나안 땅, 그들이 나그네살이 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계약을"

뭐라고 돼 있습니까? '세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뜻일까요?

계약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세 동사와 사용됩니다.

 

 

 

 

첫째, 계약을 준다. 둘째, 계약을 세운다. 셋째, 계약을 자른다.

 

계약을 준다는 것은 일종의 여기서 계약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너희들에게 내가

약속한다. 내가 맹세한다. 너희들에게 이것을 해 줄께. 다시는 내가 물로 세상을

없애지는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땅을 주겠다. 나는 계약을 너희에게 준다."

일반적인 어떤 유증과 같은 그런 일방적인 약속일 경우에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계약을 세운다는 것은, 여러분들 왜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서 돌아오는데 라반이

그를 추격하지요?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같이 식사를 하고

돌을 세우고 서로 조약을 맺습니다. 우리가 조약을 맺은 것을 잊지 말자. 기억하자

라는 일종의 모뉴멘트(monument)의 그와 같은 의미인데.

 

따라서 하느님과 우리가 계약을 맺었으면은 계약을 맺는데 어떤 계약을 맺는

방법이 있느냐? 국가와 국가가 조약을 맺는 식으로 여기다 돌을 하나 세우고

우리가 어떤 계약을 맺었대는 것을 기억하자라는.

 

세 번째, 계약을 자른다는 것은, 밑그림이 제사의 그림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아브라함이 창세 15장에서 동물을 잡아서 배를 갈라서 반으로 나눠 놨더니

불길이 그 가운데를 지나가잖아요. 계약을 자른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를

지내는, 제물을 바치면서 계약을 맺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할례는 이 셋

중에서 세 번째에 속합니다. 포피를 잘라내니까. 그러면서 피를 내니까.

 

그러면서 그런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음을 기억하는 그와 같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6절부터는 이제 자신의 계약을 기억한 야훼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말입니다. 또 어떻게 시작합니까?

 

6절: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님이다. 나는 야훼다."

다시 시작합니다.

 

 

 

 

나는 야훼다. 모두 10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나는 야훼다. 시작합니다.

2), 3), 4)를 하나로 묶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나가게 하겠다. 나는 구출하겠다. 나는 구속하겠다라는 거를 3번에 걸쳐서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나는 구출하겠다. 나는 구속하겠다. 나는 너희를 구하겠다.

라는 거를 세 번에 걸쳐서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그리고 5), 6), 7). 나는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겠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야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삼겠다. 되겠다.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거를 상징할까요?  역사의 흐름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이 되고 야훼가 이스라엘의 엘로힘이 되는 사건은 긍정적

으로 결정적으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까? 시나이 계약 사건입니다.

 

6), 7) 번은 시나이 계약 사건입니다. 시나이 계약만 맺고 끝납니까?

아니죠. "나는 오게 할 것이다." 어디로? 약속의 땅으로.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의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이 성조들에게 한 약속이 완성되는 겁니다.

 

따라서 2), 3), 4) 번째 요 세 가지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나온다는 것.

구출의 사건을, 탈출의 사건을.

5), 6), 7) 번째는 시나이  계약을.

8), 9) 번째는 땅의 정복을, 가나안 땅의 정복을 얘기하는 그와 같은 틀로서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장엄한 선언입니다.

"나는 야훼다."라고 시작해서 "나는 야훼다." 로 끝납니다.

 

자,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다음 대목입니다.

6절: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님이다." 쭉 얘기하다가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구해 내겠다. 팔을 뻗어 큰 심판을 내러서. 직역하자면,

 

 

 

 

펼친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원하겠다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손가락, 손, 팔. 구약 성경에서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펼친 팔과

큰 심판으로 너희를 구원하겠다. 펼친 팔과 큰 심판 그러면 우리가 기억나는

건 두 사건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 하는데 이루어 냈던

두 사건입니다. 하나는 파스카, 또 하나는 갈대 바다. 펼친 팔과 큰 심판 그 두

사건이 기억이 되어야 합니다.

 

예, 이 펼친 팔과 큰 심판의 대상은 단지 파라오와 이집인들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탈출 12,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파스카 사건이죠?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야훼다." 뭐까지 얘기하는 겁니까? 

파라오와 이집트인들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까지도. 따라서 이거는 야훼가

다른 신들을 조금 내리 누르는, 신들의 어떤 전쟁을 얘기하는 듯한 그런 어조로

여기서는 약간은 좀 다신적인 그런 생각을 행간에서 우리들이 읽을 수 있겠습니다.

 

예, 재미있는 것은 따라서 야훼의 심판은 있겠지요? 조장들은 누가 심판 받기를

원했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심판 받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지 않고 이제 하느님의 심판은 파라오를 향하게 됩니다.

 

7절부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나이 계약을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엘로힘이 될 것이다."

 

7절의 내용을 직역하자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나는 너희들의 엘로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의 남편이 되고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될 것이다. 뭐 그런 식의 어떤

하나의 굉장히 친밀하면서도 굉장히 강한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누구이고 그대는 나에게 누구인가?

 

어떤 아이의 시가 인터넷에서 떠돌아 나닌 적이 있지요?

 

 

 

 

엄마는 참 좋다. 뭐뭐뭐를 해서. 강아지는 참 좋다. 뭐뭐뭐를 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

예, 만날 수가 없잖아요. 볼 수도 없고. 그래서 흔히 대한민국 가장은 뭡니까?
돈 벌어 오는 기계 비슷하게 거의 무슨 노예 비슷한 상황인 거 같애요.

뭔가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저희 본당 강론 때로 얘기를 했는데, 요즘에 소위 자기 계발서

라는 게 있잖아요. 서점가서 그 책들을 주~욱 찾아 봤어요. 어떤 책들이 있나?

다른 책을 보러 갔다가 자기 계발서들이 쭉 모여 있길래. 자기 계발서의 대표적인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명령형입니다. "뭐뭐뭐 해라!" 는 명령입니다.

뭔지 기억나십니까? "미쳐라!" 그게 수십권 있어요. 그런 제목으로.

뭐에 미쳐라. 공부에 미쳐라. 뭐에 미쳐라. 뭐에 미쳐라...

대한민국이 미쳐가는 게 이유가 있더라구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성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여기까지, 종로까지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몰아요. 그럼 다른 사람보다 늦게

도착할까요? 아니면 빨리 도착할까요? 뭐 한번 정도, 몇번 정도는 빨리 도착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미친 듯이 차를 몬다면은 사고가 나지요.

한두번은 빨리 갈 수 있겠지만 사고가 나면 나만 다칠까요? 아나면 다른 사람도

다칠까요? 예,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냅니다.

 

사회가 그렇게 상처받는 이유는 그렇게 뭔가 미쳐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생존할 수 없는 그와 같은 사회인 거 같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인 거 같애요. 저희가 바라는 세상은  저는 좀 이런

세상을 저희가 꿈꿨으면 좋겠어요.

 

하루 8시간, 일주일에 5일 열심히 공동체를 위해서 또 직장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서 가족이랑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주위의 이웃

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같이 이렇게 늙어 갈 수 있는.

 

그 사람이 뭐 이렇게 해서 그냥 뭐 쉴새 없이 일했어. 뭐 하루 열 몇 시간을 뭐

스케이트를 타서 올림픽 금메달을 땄어. 모를 해서 일년에 얼마를 버는 축구 

선수가 됐어. 뭐 이런 식의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의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뭐

분명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거는 사실입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정상적으로

살면서 정상적으로 늙어가면서 행복하게 사는 그 사회가 참 좋은 그런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제가 놀랐던 사건 중에 하나는 제도가 그런거를 좀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거 같애요.

 

제가 학생 시절에 독일에 가서 살았는데 어떤 학용품이 필요해서 학용품 파는

가게를 찾다가 어디를 찾았는데 그 문방구 주인 아저씨가 셔터를 내리고 있는

중이예요. 그래서 제가 아저씨한테 "저, 미안한데 제가 지금 뭐가 필요한데 그것만

잠시 살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그 분이 안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들어가서 하면 될 것 같은데 셔터를 올리는 게 힘드시면 제가 올려 드릴테니까.

그래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당신이 외국인이라서 모르는데 독일에서는 예를들어 저녁

6시에 셔터문을 닫는다고 그랬으면 그때 닫아야지 거기에서 1분만 더 일을 해도

세무서가 와 가지고 "당신 일 더했으니까 세금 더 내야 된다."고 그런다는 거예요.

참 좋은 제도지요? 

우리나라에서도 회사가 셔터문을 안 닫으면 세금을 더 내야 되는 그런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 보는데 그렇다고 제가 좋은 고용주냐하면, 그것도

아니면서 ^^*~~~ 저희 사무장님도 제 시간에 퇴근을 못하거든요. ^^*~~~

생각이 복잡합니다.

 

예, 이 얘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몇 번씩 반복이 됩니다. 신명기 26장에서.

이 구조는 여러분들이 기억해 놓고 구약성경의 중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인만큼 여러분들이 따로 좀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애요.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결국은 뭐냐?

이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 계명을 지키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너희

들의 엘로힘이 되실 것이다. 신명기 29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이 됩니다.

 

 

 

2사무 7,24에서 다시 한번 나옵니다.

 

 

 

 

이거는 다윗의 감사기도 중에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예, 그렇게 맹세합니다. 8절에서 "그런 다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이상하지요? 손을 들어?

 

여러분들 한번은 꼭 보시라고 제가 권하고 싶은 영화인데 이란에서 이란 감독이

만든 이란 영화예요. 제목이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입니다. 보셨습니까?

정말 저는 감동 깊게 ... 운동화 한 켤레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중간에 선생님한테 학교에 늦게 왔나? 그래서 야단을 맞습니다.

그랬더니 이 꼬마가 "나는 신에게 맹세 하건대 나는 그런 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작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나는 맹세컨대 나는 일부러 늦은 게 아닙니다. 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맹세컨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따라서

맹세를 할 때는 어떻게 했대는 겁니까? 손을들어 이렇게 맹세를 한 겁니다.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맹세를 한 겁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맹세를 하지요? 우리들은 맹세를 안 하지요? ^^*~~~

선서? 국기에 대한 경례? 뭐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특별한 동작이 기억이 안 나요.

약속할 때 뭐 새끼 손가락 끼고 거는 거는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손을 들어.

 

예 같은 대목이 다음과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그 다음에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 차지로 주겠다."라고 얘기하는데 본래의

의미는 차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소유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에게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라고 표현이 됩니다.

 

어디에서 많이 나오느냐 하면 에제 11장, 25장, 33장, 36장 같은 곳에서 이와

같은 차지, 소유라는 고 명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따라서 손을 들어 이렇게 맹세

했고 너희에게 차지로 주겠다라는 요 한 문장만 보면은 구약의 어느 책과 좀

유사합니까? 에제키엘 예언서와 비슷하잖아요.

 

에제키엘 예언서에 나오는 단어를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대는 겁니다.

아주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대는 겁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언자 중에서 언제

있었던 예언자지요? 유배 전입니까? 유배 중인데 아마 유배 후반일 겁니다.

유배 후반에 쓰여진 예언서에서 자주 사용되던 단어가 여기에서도 사용되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일단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오경 전체의 편집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얘기할 때 요 문제를 다시 한번 건드리게 될 그런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 그러자 9절입니다. "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가 꺾이고 힘겨운 종살이에 시달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전했을

때는 백성들은 어떻게 했지요? 예,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면서 그러면서 그런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믿었지요. 아멘, 아만이라는 걸 얘기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듣지 않습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그들이 기가 꺾이고 힘겨운 종살이에 시달려서"

조금 직역하자면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영의 짧음 때문에, 그리고 힘든 노역 때문에

우리 말로 얘기하면, 편하게 풀어 보자면, "심신이 지쳐서."

영의 짦음은 내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 힘든 노역 때문에는 육체적인

거를 얘기하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쳤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정책은 성공합니까, 아니면 실패합니까? 여기까지만 보자면

성공합니다. "걔네들 일 많이 시키기 위해서 다시는 이런 거, 다시는 반역 같은 거,

다시는 뭐 모반 같은 거 꿈꾸지도 못하게 하자." 반역이나 모반은 없었지만

아무튼 힘겨운 종살이에 시달려서 몸과 마음을 다 지치게 하였다.

 

이거는 건강한 겁니까? 건강하지 않은 겁니까?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것.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겁니다.

자, 몸이 건강하다는 거는 어떤 뜻입니까?

몸이 병든 것과 몸이 건강한 거 어떤 차이가 있는거죠?

뭐가 건강한 겁니까? 우리 육체가 건강하다는 거는 어떤 뜻입니까?

뭘 가지고 얘기합니까?

예, 여러분들 건강진단 받아 보시면 건강진단 한데서 뭐가 날라 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런 겁니다. 무슨 피 검사를 했는데 모가 모보다 높지 않고

모가 낮지 않은 어떤 수치 안에 들어와야 되요. 너무 높아도 안 좋고, 낮아도

안 좋은. 혈압이 너무 높으면은 고혈압이라서 안 좋고, 혈압이 너무 낮으면

저혈압이라서 안 좋고.

 

따라서 어느 한도내에 들어와야 됩니다. 건강하다는 거는 뭐냐?  그런 발란스를,

중심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심을 유지한다는 거는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좀 노력을 해야 됩니까? 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건강을 체크하는 어떤 거를 누구한테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사람의

연령을 무엇으로 체크를 하느냐 하면, 얼마나 중심 잡는 능력이 있느냐로 체크를

하더라구요. 거기에 이렇게 서 가지고 중심이 얼마나 안 흔들리고 오래 서 있을 수

있나? 한발로 이렇게 서 가지고 얼마나 오래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저는 그거 해

보고 깜짝 놀랬어요. 저는 이렇게 한발로 이렇게 서 가지고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한발로 정말 서 가지고 조금 있으니까 몸이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라구요.

 

자, 우리의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란스가 맞는 것. 중심이 흐트러지면은

안 됩니다. 따라서 성서100주간 지도 신부는 여러분들이 광신자가 되길 바랄까요?
^^*~~~ 저는 여러분들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다는 거는 그럼 뭡니까?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고.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아, 제가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주 느끼는데

쉰다는 것과 논다는 거를 구별을 잘 못하는 거 같애요. 노는 거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노는 것도 중요하고 쉬는 것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요즘 여러분들도

한번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얘기를 해 보시면은 좋을 거 같애요.

 

우리 가정 안에서는 쉰다는 것은 무엇이고, 논다는 것은  무엇이고,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정 안에서. 가정이라는 공간이 그런 충분한, 가족들에게 쉼터가 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한번 그런 테마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시면은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영의 짧음 때문에 .

 

자, 그러자 이제 모세가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 9절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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