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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 길하나 주지 않는데도/신앙의 해[30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7 조회수413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광주대교구 나주 성당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어미와 큰 무리가 행렬을 지어 따라간다.

과부홀로 오로지 이 외아들에게만 온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의 모습이 끝내 안쓰럽다.

수많은 이가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그 한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단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한다나.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2-15)’

 

우리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더 나아가서는 또 다른 이의 귓속말도 은근슬쩍 기대도 할게다.

예수님은 이런 곤경을 호소하는 이들도 이들이지만 척 보면 아는 말없는 이의

그 눈빛에 뿜는 딱한 사정도 그렇게 귀담아들으신 마냥 늘 돌보셨으리라.

이 외아들 보낸 과부의 억울함이야 어디 말 할 나위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에서 주님을 더 자주 더 깊이 만난다.

자신의 잘남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한 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골목을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는 결국은 주님을 부른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적인 슬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만 그런 사랑 지니심을 드러내셨다.

 

외아들 보낸 과부의 ‘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나면서

그 아들은 다시 살아나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의 행렬’로 바뀌었다.

예수님 홀로 그렇게 만드셨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할

그 때에 결국은 그 눈길로 그분께로 다가 갈 게다.

그런 우리를 안아주고자 예수님은 온종일 초조히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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