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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2 제16회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18 조회수443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안녕하십니까?

이제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9절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10절로 넘어 갑니다. 이번에 다시 두 번째는 엘로힘이었는데 2절에서는. 10절에서는

다시 야훼가 모세에게 말해지는 겁니다. 파라오에게 얘기합니다.

 

* 11절: "너는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라고

하여라."

 

아주 단순한 앞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자 긍정합니까? 부정합니까? 앞에서 다섯 번이나 싫다고 그랬는데 요번에

여섯 번째로 또 싫다고 합니다.

 

* 12절: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이렇게 번역할 수 밖에 없는데 원문은 뭐냐?

 

 

 

* 그리고 나는 두 입술이 할례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원문입니다. 무슨 입술도 할례를 받나? ^^*~~~

그런데 표현은 원래 이게 원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받지 않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예요. 포피를 잘라서, 입이 칼 같은 거로 잘라서 입이 열려야 하는데

그래서 요즘도 그거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유아 세례일 경우에 이 친구가

말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사제들이 기도하면서 '에파타!'라는 기도를 합니다.

기억나십니까?

 

예, 그게 뭐냐하면 하느님이 축복을 해야지 얘가 말문이 트인다라고 생각하는 그와

같은 생각이예요. 어떻게 보면은 지금 모세가 얘기하는 입술의 할례와 연관이 됩니다.

아무튼 모세는 자신의 입이 열리지 않느다고 얘기합니다. 입술이 할례받지 않았다는

그와 같은 특별한 표현을 씁니다.

 

예,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를들어  비슷한 이야기가

신명 10,16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백성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한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그러지만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번역된 구약 성경의 부분들은

대게 심장을 얘기합니다. 심장에 할례를 받아서 이제 하느님을 심장이 알아 보아야

된다라는 생각이 그 바탕에 깔리고 있습니다. 기억합시다. 심장의 할례, 입술의 할례,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예레미아 6장에 보면,

 

* 예레 6,10: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귀의 할례. 따라서 입술도, 귀도, 심장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는 겁니까?

제 기능을 못하는 겁니다. 그것들이 참다운 자신의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할례받아야

된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은 여러분들은 생각나야 되는 신약 성경의 한 대목이 있어야 합니다.

스테파노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 사도 7,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스테파노가 자신을 고발한 유다인들을 향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이렇게 신명기와 예레미아 또는 탈출기에 나와 있는 신학이 어디까지 연결되는 겁니까?
신약의 사도행전까지, 스테파노의 그와 같은 시기까지도 계속 연결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 어디가서 무슨 "너, 뭐 왜 그렇게 말을 못해!" 그러면,

"아직 할례를 안 받아서 ..." ^^*~~~

 

좀 이상한 거는 저도 이렇게 세월이 가면서부터 잘 보이지도 않고 잘 들리지도 않는

거 같애요. 그래서 자꾸 어떤 일이 생기냐면, 제가 들은 것에 대해서 확신이 좀 없어요.

정말 들었나? 확인을 해 봐야 되고, 내가 들은 게 맞나? 또는 착각하는 일도 많고,

그런 것들이 많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야, 이거 참 뭔가 이렇게 나이가 먹으면서

삶이 불안해지는데 이런 이유가 있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 뭐 그런 것은 아니겠고, 그 모든 것들이 여기서는 어린 애들이나

아니면 아직 성장해야 하는 그와 같은 시기에 할례받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그런

것들이 제 역활을 한다라는 그런 어떤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학을 우리가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나중에 이 할례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서로 넘어 가면서 사무엘 상. 하 또는 열왕기

상. 하 권에 들어가면은 어떤 내용으로 많이 쓰이냐하면은 하느님께 탄원할 때 

많이 쓰입니다. 이런 식의 탄원입니다.

 

주님, 야훼여, 내가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이렇게 뭐 져야 되겠습니까? 

나의 목숨이 할례조차도 받지 않은 이들에게 이렇게 넘겨져야 되겠습니까?

그거를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따라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라는 것은 올바른 기능을 한다. 제대로 기능을

한다라는 것을 할례를 받았다라는 표현으로 고정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뭔가 열등하다라고 보는. 그 열등한 존재에게 내가 져야 되겠습니까? 라는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모세의 탄원 중에 다음에 다루겠다는 그 내용입니다.

왜 하느님 당신은 이 백성에게 악하게 합니까?라는 탄원이 등장하지요?
하느님이 악할 수 있다라는 것. 굉장히 우리들에게 당혹스러운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내용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민수 11,11: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백성이 불평하죠? 모세가 다시 야훼에게 탄원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1열왕 17,20: 엘리야는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집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입니다. 이 과부에게 그렇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악하게

하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하느님이 악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이 두 문장 안에서는. 좀 당혹스럽습니다.

 

문제는 어디 있을까요? 문제는 입문할 때 제 강의 들으신 분이 기억하실텐데,

다신적인 신관에서는 이런 게 문제가 안 됩니다. 착한 신은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신은 악한 일을 합니다. 그런 선과 악의 구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유일신 사상으로 넘어 오면서 신학 안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깁니다.

 

도대체 세상 안에 악한 일은, 왜 나쁜 일이 생기는가? 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 사람 천벌을 받아서 그래. 젊었을 때부터 잘못 살아서 지금 그렇게 나쁜 병에 걸린

거야."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도 안 되는 아이에게 닥친 불행은 그럼 어떻게 설명합니까? 

 

예, 선하게만 살았던 그같은, 또는 우리집 앞집에 사는 사람은 굉장히 나쁜 사람인데

뭐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우리집 뒷집 사는 사람은 정말 법 없이도 살아도 되는 사람인데

계속 뭐 가족들도 병에 걸리고 사고도 나고... 이런 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런 상선벌악의 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악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일신 사상 안에서 커다란 딜레마 중에 하나입니다.

판관기 9장이나 1사무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들은 악령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악령이 있어서 그렇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지만 가끔씩 역사를 이끌기 위해서 악한

영을 세상에 보내시기도 한다.

 

여기서도 파라오의 마음을 계속해서 완고하게 만드는 것은 누가 합니까?

하느님이 하잖아요. 우리가 그 대목만 읽으면은 단순하게 그런 질문이 우리에게

생깁니다. 그렇게 파라오의 마음을 하지 않고 파라오가 선한 마음을 갖도록 하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면 그렇게 하지. 왜 그렇게 안 할까? 그런데 거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갖는 한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탈출기가 적힌 그런 사건보다 훨씬 더 발달한 신학을 갖고

있지마는 오늘날의 신학자들도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이어받아 오늘날 신학자들이 멋있게 이야기는 합니다. 악이라는 건 뭐냐?

 

선의 결핍니다. 그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어둠 같은 거다. 빛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체험하는 사람들, 범죄의 희생자들 뭐 이런 사람들에게 희생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 거 같애요.

 

저도 어떤 엄마가 아이를 잃었는데 저한테 와서 이건 그냥 뭐 슬픔이라든지 그런

게 아니라 신학적인 질문을 하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좀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저는 못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 다음에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지마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겠지요. 하지마는 저는

설명 못하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지식 가지고는...

 

여기서도 모세도 비슷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 같습니다.

욥기 1장에서는 누구 때문에 악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지요? 사탄 때문에 생깁니다.

 

신약에서는 악령 또는 더러운 영에 관해서 생각합니다. 루카 22,3에서 보면은,

* 루카 22,3: "그런데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

 

따라서 루카 복음만 읽으면은 이거 유다 책임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유혹입니까?

마치 다른 존재의 어떤 유혹에 유다가 빠진 것처럼 이렇게 설명하는 루카 복음의

한 대목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 무슨 나쁜 일 하고

나서 어, 이거 내가 한 게 아니라. ^^*~~~ 그거 아닙니다. 그쵸?

 

내 마음 안에 그런 악한 마음을 키워갈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을 쫓아갈 것이냐?

라는 어떤 선택 안에서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구약에서도 그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상한 악한 존재들을 설정하기도

합니다. 이미 창세기 하면서 말씀드린 라합, 레비아탄, 베헤못 이와 같은 존재들이

구약에서 사탄, 악령, 더러운 영 그와 같은 존재들과 연결돼서 서술되기도 합니다.

 

예, 이제 제가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가지 하면서

오늘 강의를 조금 마무리 해야겠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족보가 나오지요? 이 족보에 관해서 한번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오늘 기회가 등장한

거 같습니다. 앞에 있는 족보에 관해서는 좀 건너 뛰면서 얘기를 했습니다만

탈출 6,14-27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는 조금 다루고 나가야될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자, 일단 족보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흐름이 끊기지요? 그러면서 마치 창세기를

읽듯이 지금까지의 역사와 앞으로 이어질 역사가 이 족보를 통해서 기본적인

밑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이렇게 쉬어가는 장소입니다.

 

조금 섬세하게 우리가 좀 확대경을 들이대고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100주간 하면서 이런 족보 이야기

나오면은 설마 건너뛰신 분들은 없겠지만 ^^*~~~ 빠르게 읽으셨겠지요?

천천히 읽어보자 이겁니다.

 

첫째, 레위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16절에서 시작해서 25절에서

끝납니다. 레위 앞서서 14절 15절에서는 르우벤과 시메온의 씨족에 관해서

나옵니다. 레위와 르우벤과 시메온은 무슨 관계죠? 형제 관계입니다.

 

탈출 1,2을 보면은 그 세 명, 르우벤과 시메온과 레위가 연달아 나옵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족보는 따라서 레아의

아들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라헬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르우벤은 첫째, 시메온은 둘째, 레위는 셋째 아들이고 다른 아들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햇수에 관해서는 세 사람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레위는 137세, 크핫은 133세, 아무람은 137세. 여기서 레위는 아론의 증조부로

크핫은 아론의 할아버지로 아므람은 아론의 아버지입니다. 증조부, 조부, 아버지,

아론까지.

 

아브라함(야곱)부터 피느하스까지 모두 세대를 따져보면 일곱 세대가 언급 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어떤 숫자입니까? 완전 숫자입니다. 공간을 나타내는 완전 숫자는

4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동서남북. 시간을 나타내는 완전 숫자는 일곱입니다.

따라서 일곱 세대. 완전 숫자인데 한 바퀴가 돌아간 완전한 숫자인데 그 시간에

관한 숫자다.

 

이스라엘부터 피느하스까지 일곱 세대가 언급 되는데 그 중에 모세와 아론은

다섯 번째 세대입니다. 탈출기에서 일반적으로 언급한 경우는 항상 모세와

아론이라고 언급하는데 유독 20절에서만은 아론과 모세라고 언급됩니다.

 

* 6,20: 아므람은 자기 고모 요케벳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이 여인이 그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아 주었다.

 

뭐 아론이 모세의 형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라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23절에서 아론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 반면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언급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아론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20절 아무람이 자기 고모 요케벳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아론의 아내 엘리사바를 소개하면서 암마나답의

딸이며 나흐손의 누이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엘아자르, 엘아자르는 아론의 아들이죠?

아내는 푸티엘의 딸로 소개가 됩니다.

 

다른 사람은 소개를 안 하는데 여기서만 그렇게 소개했다는 겁니다.

조금 특이하죠?

 

자, 문학적인 관찰입니다. 요것만 마음에 두고 이제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나갑시다.

자, 모두 족보는 성조사부터, 야곱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앞으로 전개될

탈출기 후반부를 뛰어 넘어서 레위기, 민수기 이후를 준비하는 그와 같은 내용

입니다. 탈출기 28장에서도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레위기 9장, 민수기

3장에서 이와 같은 내용들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중심에 서게 될 사제 가문

레위 집안과 임금 가문 유다 집안을 서로 연결 시키게 됩니다. 아론의 아내

엘리사바와 연결되는 암미나답, 나흐손은 유다 집안이고 다윗의 조상입니다.

 

예, 룻기 4장을 한번 볼까요?

룻 4,18-22: 이것이 페레츠의 족보이다. 페레츠는 헤르론을 낳고, 헤츠론은 람을

낳았으며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다.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고 나흐손은 살마를

낳았으며, 살몬은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아시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

 

이 족보가 나중에 어디서 나올까요? 신약에서 나올까요?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 1장에 보면, 

 

마태 1,3-6: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아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은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쭈~욱 나가다가 예수까지 이어집니다.

루카 복음에서도 나올까요?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쭈~욱 내려

가서 예수까지 내려오는데 루카 복음은 예수에게서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까지.

 

루카 3,32-33: 다윗은 이사이의 아들, 이사이는 오벳의 아들, 실라는 나흐손의

아들, 나흐손은 암미나답의 아들, 암미나답은 아드민의 아들, 아드민은 아르니의

아들, 아르니는 헤츠론의 아들, 헤츠론은 페레츠의 아들, 페레츠는 유다의 아들

 

아드민과 아르니는 앞선 마태오 복음의 족보에서는 없어요. 룻기에서도 안 나옵니다.

대신에 누가 나옵니까? 람이라는. 람이 암미나답을 낳고. 

 

마태오 복음에서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이렇게 나옵니다. 반면에 루카 복음에는 

람이 없고 아드민과 아르니가 나옵니다. 아르니의 '르'와 아드민의 '민'이  합쳐지면

뭐가 될까요? 그런 '람'이 됩니다. 요 관계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시간에 이스라엘

에서 히브리 사람들이 이런 식의 이름을 분해하고 합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 족보는 따라서 계속해서 구약의 탈출기에서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룻기 그리고 열왕기에서도 이어지고 나중에 신약에서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겁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인물은 암미나답과 나흐손인데 문제는 뭐냐?

암미나답과 나흐손은 유다 지파 아니예요?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거기서 나오는.

엘리에제르는 레위지파 아니예요? 따라서 사제 지파와 왕의 지파가 혼인으로

맺어지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이상적인 겁니다. 제정이 일치되는. 적어도 언제까지 이상적이냐?

블란서 대혁명까지는 이상적입니다. 왕권과 신권이 서로서로 보조하는.

따라서 왕이 통치할 수 있는 근본적인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신에게서

나온다라는 겁니다.

 

그와 같은 신정이 무너지는 게 뭐에 의해서 무너집니까? 왕의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그와 같은 생각을 무너뜨리는 게 요즘에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정입니다.

우리 국가를 다스리는 국가의 권력은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그 정치 철학은 신학적입니까? 아니면 교회

전통을 반대하고 있습니까? 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의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그와 같은 천 년이 넘는 그와 같은 역사의 실험이 성공한 겁니까?

아니면 실패한 겁니까? 실패한 겁니다. 누가 잘못한 겁니까? 교회가 잘못한 겁니다.

 

교회가 잘못 다스리는 왕들을 정말로 견제하고 올바른 통치에 관해서 교회가 얘기

했다면은 교회가 그와 같은 권력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역사 내에서 자신의 배를

불리지 않았다면, 세상의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가 그런 왕권의 뒤에서, 세상 권력의 뒤에서 거기에 어떤 신적인 힘을

실어주는 그와 같은 시스템은 세상 안에서 성공하지 못한 겁니다.

 

이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민주적인 그와 같은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고 현장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성공했습니까?

이것도 좀 회의적이예요.

 

예를들어 이런 겁니다. 제가 생태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정치하는 분들과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생태문제. 이런 문제 정말 심각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이런

이런 정책을 내놓고 이렇게 이렇게 세상이 바뀌어야 됩니다. 그러면  정치하는 분들이

다 "저도 신부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걸 공약으로 내걸면 떨어집니다."

 

예, 사람들이 바라는 건 뭐라는 겁니까? 옳은 길을 바라는 겁니까? 아니면

내 욕심이 채워지길 바랍니까? 예,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은 절대로 줄어들어서는

안 되고,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은, 아파트는, 주식은 계속해서 해 내야 되고.

사람들의 욕심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은...

따라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이 한표 한표를 행사하는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국민들이 성숙하지 않을 때,

그와 같은 체험이 쌓여 나가서 세상이 정말로 우리가 바랐던 좋은 세상으로 가지

않을 때 민주주의라는 전체적인 시스템이 한꺼번에 붕괴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서 흔히들 어떤 생각들을 합니까?

아, 누군가 강한 독재자가 나와서 우리를 다시 한번 끌어주면 어떨까? 이런식의

어떤 선한 독재자에 관한 그런 생각들이 지금 살살 여기 저기서 그와 같은 생각

들을 서로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게 됩니다.

예, 조금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습니다.

 

아무튼 적어도 이 족보 안에서는 왕의 권력을 갖고 있는 유다 집안과 사제적인 힘을,

신께 제사를 드리는 어떤 신학적인, 사제적인 바운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레위 집안

과의 혼인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요 집안을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햐 될 것은 레위 집안입니다.

 

레위 지파   탈출 32,25-29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았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적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진영 대문에 서서, "누구든지

주님의 편이거든 나에게 오너라." 하고 외치자 레위의 자손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

들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대문에서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의 이 대문에서 저 대문으로

오가면서, 저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여라.' "

 

레위의 자손들은 모세가 분부한 그대로 하였다. 그날 백성 가운데에서 삼천

명가량이나 쓰러졌다. 모세가 말하였다. "오늘 너희는 저마다 자기 아들이나

형제에 대한 대가로 주님을 위한 직무를 맡았다. 그분께서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길 빈다."

 

레위 지파가 백성들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본 모세를 돕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모세가 분부한 대로 합니다. 그날 백성 가운데 삼천 명가량이나 쓰러집니다.

어떻게 한 거지요?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얘기합니다. 모세를 돕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의 이 대문에서 저 대문으로 오가면서, 저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여라." 이게 굉장히 섬뜩한 얘기입니다. 이걸 누가 합니까? 

레위 지파가 그걸 합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뭘 한 사람

들이죠?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섬겼던 그와 같은 사람들을 죽이는 그와

같은. 우리 식으로 오늘날 생각하자면은, 어휴, 저렇게까지 했어야 되나?" 라는

그런 어떤 생각이 드는. 조금 구약 성경 내에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와 같은 대목에서 레위 지파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등장합니까? 굉장히 이렇게 좀 잔인하고 조금 이렇게 뭐라고

그럴까요? 여러분들 본당 신부가 칼 같은 거 차고 ^^*~~~ 곤란할 꺼 아니예요.

뭔가 이렇게 사제와는 좀 맞지 않는.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은 가득한 그런

모습으로 일단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신명기 10장에서 다시 한번 프오르의 바알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는 역활을 담당합니다.

 

레위 지파   신명 10,8-9

"그때에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따로 가려내셔서, 주님의 계약 궤를 나르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

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동족과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다. 그 대신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그때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따로 가려 내셔서 주님의 계약의 궤를 나르게 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바알신을 섬기는 그 이스라엘 동족들을 레위 지파가

죽이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그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동족과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다. 그 대신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상속 재산이 되신다.

나중에 광야에 나가서도 다른 민족과 혹시 싸움이 붙어도 레위 지파는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뭘 합니까? 계약의 궤를 지킵니다.

그들의 임무는 그겁니다.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그들은 일정한 영토를 차지하지 않고 몇 개의

도피성은 받습니다마는 하지마는 그들은 어떤 사지직을 수행하면서 거기에서부터

어떤 십일조의 그거를 얘기합니다.

 

모든 다른 지파들이 수익이 생기면, 추수를 하면 십분의 일을 레위 지파에게 주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할 수 없었고, 오직 계약의

궤를 지키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런 어떤 역활을 하는 것으로 레위 지파의

역활이 조금은 다양한 모습으로, 하지마는 야훼 하느님과 그 성막, 계약의 궤,

성전 이런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조금 특별한 지파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피느하스라는 인물입니다.

마지막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엘아자르는 프티엘의 딸들 가운데 하나를 아내로 맞아 들였는데 이 여인이 그에게

피느하스를 낳아 주었다." 거기서 끝나지요? 그 피느하스라는 인물이 계속해서

민수기에서 등장합니다.

 

피느하스   민수 25,11-13

"아론 사제의 손자이며 엘아자르의 아들인 피느하스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하여 열성을 다해,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

 

피느하스가 역시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 죽여

버립니다. 계속해서 약간 좀 사제인데 계속 사람을 죽이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보라, 나는 그와 평화의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그와 그의 뒤를 잇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사제직의 계약이 될 것이다.

그가 자기 하느님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느하스를 굉장히 이상적인  그러한 사제의 모습으로 이렇게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26절에서 보면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제 족보 얘기가 끝나고,

"부대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라." 하신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그런데 이거는 주교회의 성경이 틀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하느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이다."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27절: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려고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말한

이들도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여기서는 모세와 아론입니다. 순서가, 따라서 한번 아론과 모세였다가 다시 모세와

아론으로 뒤바뀌는 그와 같은 대목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예, 이 족보는 탈출기의 등장 인물들을 창세기의 조상들과 한편으로는 연결시키고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들과 다시 연결시키는. 전체적으로 조상들의 성조사부터

마지막 광야를 헤메는 그런 민수기의 이야기까지를 아우르는 하나의 전체적인

등장 인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처럼 설명이 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아론입니다. 모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제목도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아니라 그냥 아론의 족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할 거 같애요. 예, 그리고 큰 흐름에서 어떤 역활을 수행하는 인물들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그와 같은 역활을 합니다.

 

이렇게 지나간 시간들이 이 족보를 통해서 반성되고 앞으로의 시간들이 조망되는

동시에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정체성에 촛점이 맞춰지고 그가 누구인지에  관해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론이 레위의 자손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 강조되고 그것은 앞으로

그가 수행하게 될 사제직무와 연관돼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아론에 관해서

집중화 돼 있으니까 이 대목을 쓴 거는 누굴까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의 누구인

뭐 사제계.

 

따라서 우리들이 모세 오경을 얘기하면서 제가 그 대목을 다 다루지는 않습니다마는

야훼계, 엘로힘계, 제관계, 신명기계 이런 얘기를 하는데 이 대목은, 이 족보의 대목은

아마도 제관과 관련된 사람들의 편집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일반적인

주석가들의 견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레위로부터 계산한다면 모세와 아론은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언급된

대로 사대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5장 13절은 사백년의 세월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한 세대가 백년씩 거쳐가는. 따라서 한 세대를 백년이라고 계산하는 것이

오경의 일반적인 계산법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지 또는 여러 가지 조금 다른

그런 어떤 전승이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암미나답과 나흐손이라는 인물은 마태 1,4 그리고

루카 복음에서도 예수의 족보 내에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탈출기 6장에서

등장하는 족보는 한편으로 구세사적 의미를 지니는 그런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론과 엘리사바의 혼인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은 종교와 정치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직무를 줄 때에 종교적인 직무만 줍니까? 아니면

정치적인 직무만 줍니까? 아니면 다른 직무도 함께 다해서 줍니까?

그 모든 거를 뭉뚱그립니다.

 

사도직이라는 것 안에서 제가 여러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조하듯이 사도직 안에는 세 가지 직무가 있습니다. 왕직, 사제직, 예언직.

그 세 가지 직무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 안에 다 어우러져 있고, 예수님은 왕으로써

사제로써, 예언자로써 세상 안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적인

모델로서 복음 안에서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 야훼가 모세를 부르고 모세가 야훼의 명령을 수행하지만, 그 첫째 단계는 이미

우리가 함께 본 것처럼 파라오의 거부로 마무리 됩니다. 이제 이런 것들이 다 마무리

되고 우리가 읽은 그 다음 6장 28절부터 둘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이 됩니다. 아직 앞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앞선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모세는 뭐라고 그럽니까?

12절: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느님이, 야훼가 거기에서 대꾸를 합니까?
안 합니다.ㅣ

 

6,13: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보내셨다."라고만 얘기하지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 됐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족보 앞의 내용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게 끝납니다.

 

야훼는 명령하고 모세는 못하겠다고 하는 걸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족보가 나오고

다음의 내용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제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 됩니다.

야훼 하느님이 다시 한번 모세를 설득하고 모세는 다시금 파라오에게 파견되는데

그 강한 손에 밀려서 파라오는 결국 이스라엘을 내보낼 겁니다.

 

거꾸로 읽어 본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왜 열 가지

재앙이, 재앙이 있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모세가 누구인지, 야훼가 누구인지, 파라오에게 또 이집트인들에게 야훼가 누구인지를

설명하지마는 스토리 라인 전체는 왜 그와 같은 열 가지 재앙이 있어야 하는지 특히

그 중에서 특별히 왜 열 번째 재앙이 있어야만 했는지, 야훼가 그렇게 이집트의 맏이

들을 맏아들, 맏배들을 죽여서까지 그 파라오를 설득해야만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야훼가 강한 손, 강한 팔을 펼쳐야만 했는지.

 

예, 오늘 강의의 말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6장 28절부터 시작을 해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고 다시 파라오에게

가서 열 가지 재앙들이 시작되는 그와 같은 이야기인데 미리 미리 말씀 드리자면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아홉 재앙은 세 가지씩 세 가지씩 한 묶음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가 한 묶음이고.

네째, 다섯째, 여섯째가 한 묶음이고.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가 한 묶음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 각각의 묶음들의 재앙이 한번씩, 두 번씩, 세 번씩 순환하게 되는지

여러분들이 조금은 제가 미리 힌트를 드렸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런 틀이 형성돼

있는지에 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고 부분을 읽어 오시면은 다음 시간 강의를 쉽게

이렇게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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