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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천상을 향한 굳건함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2 조회수584 추천수6 반대(0) 신고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천상을 향한 굳건함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고 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죽음을 감당하고서라도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행복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케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몸소 증거 하였습니다.“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30년 전 초기에는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 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우리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냈습니다. 옛 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는 말씀이 바로 그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인이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불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감옥생활의 비참함을 보겠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회장은 형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형님, 아직도 이 세상의 무엇을 도모하기 위한 기도라면 그런 기도는 중지해주십시오. 다만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이것 때문에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라면 혈육의 정으로 청하니 간절히 기도해주십시오."

 

그러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있어도 아픈 상처가 감방이 너무 비좁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서로 부딪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면 움직이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또 온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 상처마다에 온갖 벌레들이 덤벼 옵니다. 이걸 집어내려고 손을 들면 상처를 건드리니까 고통스럽고 안 집어내자니 이 또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내 방에 깔린 멍석은 내가 고문을 받을 때마다 흘린 피와 고름으로 썩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 중에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굶주림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피고름으로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멍석자락을 뜯어 씹으면서 이 배고픔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김길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소설가 김훈은 천주교 박해의 상황 안에서의 감옥을 “뼈는 돋아나지 않았다. 뼈는 붙지 않았고 움트지 않았다. 부러진 뼈는 너덜거리다가 떨어져나갔다. 떨어져나간 자리에서 피고름이 흘러서 감옥 바닥의 멍석을 적셨다. 피고름에 구더기가 슬었고 빈대가 꼬였다. 구더기가 파리가 되어서 상처의 진물을 빨았다(흑산133).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순교자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30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 보다는 세상을 선택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쳐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9,23-24).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4대박해

 

 

신유박해 莘酉迫害 (1801년, 순조1년)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인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천주교인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 당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박해는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己亥迫害(1839년 헌종 5년)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 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순교자는 이호영 베드로, 정국보 프로타시오, 김아기 아가다, 박아기 안나, 이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한(韓)아기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장(張)성진 요셉,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김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광렬(李光烈) 요한,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 큰아기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박후재(朴厚載) 요한,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焌) 이냐시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김 루시아, 가타리나, 조(趙) 막달레나, 유(劉)대철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_! 菩俚_) 베네딕타, (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김 데레사, 이 아가다, 민(閔)극가 스테파노, 정(鄭)화경 안드레아, 허(許)임 바오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이경이(李瓊伊) 아가다, 이인덕(李仁德) 마리아,권진이(權珍伊) 아가다,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등이다. 이들 중에는 1839년을 전후하여 이미 1838년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1840년과 1841년에 순교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순교자라고 할 때 이들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병오박해 丙午迫害(1846년 헌종 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임치백(林致百) 요셉,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3년 고종 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유정률(劉正律) 베드로,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장주기(張周基) 요셉, 황석두(黃錫斗) 루가, 손(孫)자선 토마스, 정(鄭)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르로, 손(孫)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익(韓元益) 요셉, 정(鄭)원지 베드로, 조윤호 요셉, 이윤일 요한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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