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제9강 요한 묵시록 안에 나타나는 숫자와 색의 상징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4 조회수675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9강 요한 묵시록 안에 나타나는 숫자와 색의 상징들

 

찬미 예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도 우리, 이제 요한 묵시록 안에 나타난 상징들, 그런 표징들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별히 색깔과 그리고 숫자들에 대해서 한번 계속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 본 것 중에 간단하게 요한 묵시록이, 요한 묵시록 저자가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는 바로 설명하는 상징들도

봤습니다.

 

예컨대 일곱 별, 일곱 등잔대 이런 것들은 일곱 교회 천사들,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소돔과 이집트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둘아가셨던 곳. 이 소돔과 이집트는 그래서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라고 또 우리가 배웠습니다.

 

또 나아가서 우리가 구약에서 온 여러 가지 전통들. 예컨대 사람의 아들, 생명의 나무

그리고 숨겨진 만나. 이 표징(상징)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고

또 구약 전통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분들에게 있었서는 익숙하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은 그런 상징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개념이기에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오늘 이제 우리가 해야할 색깔들 그리고 숫자들 이것은 조금만 우리가 노력을 한다면

뭐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요. 조금 이해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 요한 묵시록을

읽으신다면 아, 그런 뜻이 있구나라고 쉽게 일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색깔을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에 그렇게 많은 색깔은 아닌데 제일 많이 등장하는

색깔이 있어요. 어떤 것일 것 같애요? 요한 묵시록을 읽으시다 보면 색깔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색깔이 하나가 있는데  흰색입니다. 좋은 거 같애요? 나쁜 거 같애요.

좋은 거 같애요? 예, 그래서 흰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의미 하는데 흰색은 많이

나타나고 푸르스름한 색, 검은색, 이런 다른 색깔들이 나타납니다.

 

* 요한 묵시록의 흰색: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냄

 

이 색깔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6장에 있어요.

6장을 한번 보면서 우리가 6장에 어떠한 색깔들이 있는가 보시면, 처음에 5장에

어린양이 나타나셨죠? 어린양이 나타나셔서 어좌 한가운데서 당신이 나타나시고

난 이후에 일곱 개의 봉인이 되어 있는 두루마리 일곱 개를 다 하나하나씩 뜯어야

되는데 첫 번째 봉인을 딱 뜯는 순간이 6장부터 시작을 합니다.

 

딱 뜯는 순간에 어떻게? 흰 말부터 시작을 해서 다른 말들, 다른 색깔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봉인을 하나하나 뜯을 때마다 색깔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차근차근 읽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묵시 6,2: 내가 또 보니 , 흰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관을 받자, 승리자로서 더 큰 승리를 거두려고 나갔습니다.

 

자, 흰말은 우리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워낙 많이 있으니까 뒤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니까 흰말은 살짝 들어서 옆에 잠시만 놔 두고요. 다른 말부터 다른 말들이

어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말부터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묵시 6,3-4: 어린양이 둘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

 

빨간 색이 어떤 느낌이 들어요? 빨간색이 정열적이고 좋지 않아요? 우리가 뭐 첫

월급을 타도 빨간 내복부터 부모님께 선물을 해 드리고 제가 또 군대를 명찰이 빨간

대를 나왔습니다. 예, 그래서 이 빨간색만 보면 갑자기 군대 생활이 떠오르기도

하고... 막 정열적이죠? 화끈하기도 하고. 그렇게 좋은 느낌이 저에게 있어요.

 

또 한국 같은 경우에는 2002년 하면 확 떠오르는 거 있지요? 붉은 악마.

이런 색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에서 친근함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색깔인데

우리 요한 묵시록은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붉은 말이 나오는데 여기 붉다라는

색깔은 단순히 이렇게 아, 빨간색이구나라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타오르는 되게

역동적인 불타오르는 그 불, 빨간색 그 붉은 색을 머리 속에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 요한 묵시록의 붉은 색:역동적인 의미

 

그런 의미로 사용된 단어거든요. 그런데 이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그래서

전쟁. 이런 개념을 머리 속에 한번 넣어 보시면 되겠습니다.

 

* 묵시 6,4: 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나면 다 불지르고 막 불에 타고 그렇지요?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할

때 다섯 가지 중에 66년에서 70년까지 있었던 그 시대적 배경의 사건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 있어요. 유다 1차 항쟁입니다. 예, 그것이 끝나고 완전히 예루살렘이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어떤 전쟁. 평화를 앗아가는.

 

*유다 1차 항쟁(66-70년) 이후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인해 페허가 되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도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붉은,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이것은 요한 묵시록의 저자 입장에서도 혹은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아마도 이 시대적 배경의 아픔을, 그 평화가 다 사라져 가는,

살해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그런 것들을 분명히 담고 있다.

 

그래서 붉은 색이 나타날 때, 빨간색이 나타날 때는 아, 살해, 평화가 없구나,

불행이 가득하구나. 그런 개념으로 우리가 머리 속에 떠 올리면 좋겠습니다.

우리 전례력으로는 빨간색이 순교자 축일이나 하느님께,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증거의 삶을 우리가 드러내는데, 요한 묵시록 안에서 붉은색은

예, 전쟁, 평화가 없는 그런 암흑 이런 느낌으로 우리가 받아 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자, 어린양이 세 번째 봉인을 뜯고 나니까 나타나는 색이 무슨 색이냐?

예, 검은색입니다. 우리 한국적으로 검은색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 죽음이죠? 그러나 요한 묵시록에서는 죽음이 아닌 다른 의미를 드러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 요한 묵시록의 검은색: 기근, 결핍을 상징

 

* 묵시 6,5: 내가 또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검다라는 것은 하나의 부족함. 그래서 저울로 어떤 부족함을 저울질 한다는

느낌을 우리가 생각하면 좋겠구요. 부족하고 결핍하고, 기근이고, 배고프고.

예, 이런 차원이 뭔가 부족하다라는 것이 검은 색으로 요한 묵시록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부님들도 입고 있는 보통 우리 사제는 검은 색을 입죠? 수단도 보면

검정색을 입고 있습니다. 오늘 이 검은 색이 기근, 모자람, 부족함, 이렇게 약간

부정적인 의미이지마는 여기서 또 한가지 제 사제의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면

우리의 삶이 부족한 삶이 아닌가? 모자라는 삶이 아닌가? 그래서 늘 결핍.

그래서 모자라니까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야 되지 않는가?
그런 반성도 하게 되는 그런...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느낌이 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게 전쟁과 더불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해하고, 전쟁이

펼쳐지는 그 불타오르는 붉은색에 검정색이 같이 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우리가

배고픈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그죠? 전쟁을 하면서. 그래서 그 기근, 부족함 그런

어떤 삶의 어려움 그런 느낌을 우리 검은색을 통해서 볼 수 있겠습니다.

 

자, 네 번째 말이 등장을 하는데 네 번째 말은 푸르스름한 말입니다. 푸르스름하다.

푸른색 그러면 우리의 입장은 평화 같은 느낌이 드세요? 파란색은 하늘이죠? 그죠?

예, 5월을 떠올리고, 어린이들을 떠올리고,  희망을 떠 올릴 수 있는데 이 푸르스름한

색은 요한 묵시록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 묵시 6,7-8: 어린양이 넷째 봉헌을 뜯으셨을 때, 나는 넷째 생물이 '오너라.'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또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

 

왜 죽음일까? 가끔씩 돌아가신 분들 보면 서서히 파랗게 되어 가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죽음의 안타까운 순간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푸르스름한

말은 이 성경 안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그런 색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푸르스름한 색: 죽음을 의미

 

자, 이 네 가지 말 중에 흰 말은 일단 조금 옆에 놓자고 했구요. 세 가지 말,    

첫 번째, 불타오르는 붉은색, 그 다음에 검정색, 그 다음에 푸른색.

서로 죽이고 죽여서 부족하고 기근이 들고 그래서 서로 막 죽음과 연결되는

아픔 속에 살아가는.

 

어떻게 보면 어린양이 봉인을 뜯기 시작하면서 이 등장하는 것이 이제 5장에서는

구원을 외치고 모든 이가 사제의 나라가 되어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느낌을 이렇게

줬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이 어좌에 계신 분과 어린양에게 정말 찬미 찬송을 하는

그런 것으로 끝나는데 막상 안에 무엇이 있는가 봉인을 뜯기 시작하니까 나타나는

것은 우리식으로 생로병사와 같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런 삶의 어려움이 이런 색깔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시대의 아픔들이 이런

말들의 어떤 색깔을 통해서. 그런데 요한 묵시록이 그렇게만 나갔으면, 그런 식으

로만 설명이 되었으면 요한 묵시록은 아주 부정적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되게

비관적인 책이 요한 묵시록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제가 옆에 살짝 놓자고 했던 흰말, 흰색에 그 위에 누가 있었느냐?

승리자로서 어떤 기사가 타고 있다. 이거부터 먼저 제시하는 게 무엇이냐?

 

*묵시 6,2: 흰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관을 받자, 승리자로서 더 큰 승리를 거두려고 나갔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제가 몇번 말씀드렸다시피 처음부터 이미 승리하신,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하고 그 다음에 펼쳐지는 세상 것에

대한 어떤 바라보는 관점. 그것에 대해서 세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부정적으로 아, 이것이 아니구나라고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예, 바로 방금 말씀드린 긍정적인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런 관점이

요한 묵시록의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그래서 봉인을 뜯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고자 하시는, 바로 우리가 요한 묵시록 처음에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요한 묵시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한 이야기가 봉인을 뜯으면서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 첫 번째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흰색이라는 것이지요.

흰색은 어떻게 쓰이는가? 흰색은 승리의 상징이라고 우리가 말을 했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7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함께 참여하는 이가 어린양의 피에서 겉옷을 빨고 나타난 것이 하얗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색깔이 또 흰색인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흰색' : 승리의 상징, 그리스도의 부활의 상징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든 성도들

 

그래서 흰색은 이 현실의 어떤 어려움, 그런 환경. 이렇게 우리가 전쟁이든, 살인이든,

기근이든, 결핍이든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무엇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을 이겨내는 이에게 주어지는 색깔로 흰색은 승리입니다.

 

승리는 분명히 어떠한 내가 모든 것이, 어려운 것이 다 끝나고 그래서 뭔가 나에게

영광만, 기쁨만 그래서 정말로 이것이 여기에는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흰말과 다른 색깔들의 말이 여기 같이 놓고 있으면서 이 승리 한다는

것은 모든 이가 모든 어려움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그것이

그런 모든 일련의 과정이 승리하는 것과 연결되는 그 자체가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말과 다른 색깔들의 말을 이렇게 함께 놓으므로써 우리 생노병사를 겪고

있는 우리 인생사, 이 세상사에 정말로 내가 신앙인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신 그분과

기쁘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안 좋구나, 힘들구나,

어렵구라고 내팽개치고 그냥 절망 속에 살아갈 것인가?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기쁨

속에 살아가기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흰말을 제일 먼저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후에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서간을 보게 될 것인데 텍스트 구체적으로

들어갈 때에 그때 보면 또 흰돌이 주어집니다. 승리자에게. 흰색, 흰옷, 뭐 이런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때마다 제가 한번 여쭤볼꺼예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말하면 지금 제가 말씀드린 흰색의 이런 의미 흰 말의 의미가 거기에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처음부터 끝까지 또 마지막에 19장에 승리하는 백마탄 기사.

거기에도 백마탄 기사가 등장하는데 거기도 흰색이라는 것이 이런 모든 과정을

겪고 계속해서 어떤 믿음 안에서, 신앙 안에서 우리가 살아 갈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그런 표징이 되는 것이구나. 그것을 머리 속에 잘 넣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색깔을 봤는데요. 기본적으로 봤을 때 이겁니다. 나머지 색깔들은

좀 부정적이라고 제가 표현했죠? 그래서 요한 묵시록 전체의 색깔의 구조가 흰색과

나머지 모든 겁니다. 다른 색깔이 나타나거든 흰색과 반하는,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것, 세상의 어려움에 대한 것.

 

그런데 상대적으로 흰색은 어떤 의미에서 천상의, 하느님의 것에, 부활하신 분

거기에 관점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적인 것이냐 아니면 신앙을 가지고 천상을

바라보는 것이냐? 이 두 축이 흰색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세상 안에서가 끝이 아니라 천상과 함께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색깔의 구조 안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예, 색깔을 그렇게 정리하면 되구요. 

색깔에 이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숫자입니다. 이제 숫자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는 뭐 숫자를 구구단부터 처음부터 배우고 여러 가지 숫자에 대해서 익숙한데

숫자가 요한 묵시록의 어떠한 시대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단순히 요한

묵시록  저자가 창작해낸 것이 아닙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이렇게 생겨난 숫자지요.

유다 전통 안에서 하나씩 만들어졌던.

 

그래서 이 숫자를 가지고 요한 묵시록이 가지고 있는 숫자 개념을 가지고 지금 이

시대에 봐라. 이렇게 이런 숫자가 요한 묵시록에 적여 있잖아라며 똑같이 그렇게

연결해서 똑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방금 색깔에도 우리 봤죠? 색깔에도 검은 색은 죽은 색인데 요한 묵시록은 죽음이

아니거든요. 죽음은 오히려 푸르스름한 푸른색이 죽음이었다는 것이죠.

 

*숫자와 색깔: 이것은 다 시대적 배경과 그 문화 안에서 발생된 의미

 

우리가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7이라는 숫자와 혹은 10이라는 숫자, 혹은 4라는

숫자.  우리가 가지는, 한국민이 가지는 그 의미가 분명히 우리 문화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이 숫자 개념이 어떻게 어떤 문화 배경에서 등장하는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요한 묵시록이 시작하는 숫자의 첫 번째가 말 그대로 첫 번째입니다. 하나,

이 첫 번째. 신약 성경에 총 92번이 사용되는데 요한 묵시록에 18번이 사용됩니다.

 

*요한 묵시록의 숫자들: '첫 번째(protos)'는 18번 나옴(신약 92번)

 

그리고 두 증인이 11장에 나옵니다.

 

*요한 묵시록의 숫자들: 두 증인

 

증인이 왜 하필 두 명만 얘기할까? 세 명, 네 명, 다섯 명도 있는데 왜 둘만 이야기할까?
이건 왜 그럴까?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 그리고 세 번째,

삼분의 일 이런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숫자적으로.

 

*요한 묵시록의 숫자들: '세 번째' 혹은 '삼분의 일(tritos)'은 23번 (신약 48번)

 

그 다음에 넷, 일곱, 열둘, 스물넷, 천 이게 등장하는데 이 횟수를 따져 보면요.

*요한 묵시록의 숫자들: '넷(tessares)'은 29번(신약 41번)

                                  '일곱(hepta)'은 54번(신약 87번)

 

요한 묵시록에 방금 말했던 숫자들이 대부분 반 이상이 사용됩니다. 그만큼 요한

묵시록이 숫자에 아주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 숫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어야 요한 묵시록을 읽고 나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첫 번째, 예컨대 죽은 이들로부터 처음 태어난 것. 첫,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일등하면 좋아요? 싫어요? 좋죠? 우리 누구나 당연한 겁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 처음부터 끝인 하느님. 처음, 첫 번째라는 건 우리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라는 것은 동시에 유일성과도 연결하셔야

됩니다.

 

* 첫 번째(protos)': 유일성 개념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 줄 세우려는 첫 번째가 아니라, 처음으로 열어주신

유일하신 그분을 통해서 곧 하느님에게 적용되는 특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첫 번째라는 개념. 그래서 1이 나오나 혹은 첫 번째가 나오거나 첫 번째

죽음, 첫 번째 부활  뭐 이런 개념도 등장합니다.

 

그때는 유일성 개념, 유일하시구나. 이 사건이 유일하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가 그에 연관이 되는구나. 부활이라는 사건이, 우리는 아직 부활을 체험으로

했다기보다는 부활을 믿고 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한번 부활을 하심

으로써 우리가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첫 번째로 부활하셨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부활하시고 그분의 부활에 우리가 참여

한다는 것. 그렇게 1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증인' 둘이라는 숫자가 등장했습니다. 2라는 숫자는 뭘까요? 왜 하필 2일까?
예, 여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둘이라는 숫자는 두 증인에게

적용이 되는데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첫 번째로 이 둘이라는 숫사로 생각해

본 첫 번째가 모세와 엘리야라고 말씀 드렸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이것을 해석

하자면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했습니다.

 

* 둘(구약과 신약 즉 교회 자체를 상징): 모세(율법)와 엘리야(예언서)

                                                         베드로와 바오로(그리스도교 신약의 두 축)

 

이 둘이라는 숫자는 첫 번째 모세와 엘리야를 우리가 보겠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아버지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아버지입니다.

율법과 예언서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전체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했으면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두 축입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입니다. 이 둘이라는 숫자는 그래서 그분들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구약의 백성 전체, 신약의 백성 전체. 그래서 교회 자체라는 것이죠.

 

둘이 단순히 그냥 다른 숫자에 비교해서 1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닌

것이 그런식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 둘이라는 숫자의 개념이 구약의 전체,

신약의 전체라는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3. 삼분의 일.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한번 보게 되겠는데요.

요한 묵시록 8장 7절에서 12절까지를 한번 본다면,

이 3이나 혹은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 묵시 8,7-9: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생겨나더니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버렸습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

졌습니다. 그리하여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생명이 있는 바다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졌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봤을 때, 지금 좋은 일이 펼쳐졌습니까? 무슨 일이 펼쳐졌습니까?

기분이 어때요? 별로예요? 요한 묵시록이 위로의 책이다. 격려의 책이다.

뭐 이래 놓고 이런 장면을 왜? 왜 등장시키는 것이지?

 

자, 그런데 가만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관점은 다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3 혹은 삼분의 일입니다. 왜 하필 지금 나팔을 불면서 재앙이

시작됐는데 왜 삼분의 일만 이럴까? 왜 그럴까요?

 

자,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를 그냥 쉽게 생각을 해 봅시다. 3이라는 등분에서 한

부분이죠? 나머지 두 부분은 멀쩡할까요?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3과 삼분의 일은 한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3혹은 삼분의 일: 삼분의 일이라는 '한계적' 무너짐

   (삼분의 이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된다)

 

재앙이 펼쳐지는 것 안에서 삼분의 일만 이렇게 된다는 것은,

예, 우리가 천상 예루살렘을 나중에 보더라도 천상 예루살렘이 어때요?

새 하늘 새 땅이 왔고 저 옛 땅은 갔어요. 사라져버렸어요. 그런데 새것이 분명히

내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유황, 다시 말해서 거짓을 일삼는 자들의 자리는

여전히 존재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한 묵시록 저자가 요한 묵시록의 그 세상, 그 세계를 바라 봤을 때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고 거기서 승리를 외치고 노래해야 되겠지마는 분명히

세상에는 악한 모습이 있고 잘못 된 모습이 있다. 이런 악한 모습과 잘못된 모습,

여기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여기가 정말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져야할 자리다.

 

그 자리는 우리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믿음을 고백하는,

그분께 경배하는, 어린양을 받아 모시는 거기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에,

어린양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 그들은 세상 권력과 세상의 논리에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는 그런 사람들의 자리.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영광의 노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거기에는

자신의 어떤 절망이나 슬픔, 왜? 세상은 변하는 것이니까 이것이 하느님께서 벌 줬다

라고 판단하기보다는 그 삼분의 일이라는 이런 재앙, 어떤 안 좋은 모습이 펼쳐지는

것은 하느님이 부활하신 그분의 기쁨이 없는 상태로 슬픈 상태, 정말 어려운 현실을

그냥 "아유, 왜 이렇게 어렵냐? 여기에 만족해야 되나? 저기를 봐야 되나? "

이렇게 쫓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3,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 여기서는 분명히 그러한 모습이 믿는 이들이 봤을

때는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으나 분명히 세상 안에도 그러한 슬픔, 이런 것을 세상 것을

쫓아가는 그 부분이 보이고 존재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3이라는 숫자와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에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고백한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숫자겠지요? 그래서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12장 이후로부터 펼쳐지는 재앙의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인 것이지 믿는 이들의 모습은 11장까지 어떤 의미에서 다 나오고

있다.

 

예,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하신 분과 열심히 살아보자. 이러한 모습이 분명히 등장

하고 있가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재앙이 등장할 때는

한계적으로 등장하는구나. 전체가 아니구나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반대로 이에 대치되는 측면에서 우리 5장에서 봤을 때, 그 천상의 기쁨을 누가

노래합니까? 세상 피조물 전체가 노래하였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어좌에 계시는 분과 어린양에게

경배를 하고 찬송을 드립니다.

 

* 묵시 5,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하늘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천상 예루살렘에 가서도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보화를 들고 그 안에서 거닌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 3과 삼분의 일이라는 재앙의 측면에서 이 기쁨과 영광을 노래하는 요한

묵시록의 관점은  전체, 전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한계 지어진 숫자지마는 영광 기쁨을 노래할 때는 전체, 전부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대비점도 우리가 생각하면서 숫자를 가지고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 재앙: 한계를 가짐.

   영광 (기쁨) : 전체, 전부를 뜻함

 

자, 우리 이제 이어서 4라는 숫자. 4라는 숫자는 우리가 여러 번 반복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 동서남북을 머리속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땅의 네 귀퉁이, 모퉁이에서 혹은 네 천사가. 도대체 왜 천사가 네 명만 딱 떨어지고

이쪽 저쪽 네 귀퉁이만 있는가라고 생각하시지 마시고 모든 천사가 모든 세상이이라는

게 이렇게 꽉 천사들의 영역으로 되어 있다. 천사가 네 모퉁이에, 혹은 또 바람이 안

불게 움직이지 않게 네 모퉁이를 잡고 있다. 이런 것은 지금 세상 모두를 관여하고

있다. 전체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 4라는 숫자: 세상 전체를 가리킴

 

자, 이제 4에서 어떤 숫자로 넘어갈까요? 7로 갈까요? 6자가 있는데 666은 조금

있다가 보구요. 제일 관심있는 게 6자 같애요. 666이 도대체 누굴까?
요한 묵시록만 등장하면 666 ? 이렇게 되는데 어떤 잘못된 개신교 형제들이 666이

교황님의 숫자라는 등 이렇게 막 표현을 하고는 하는데 그거 다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마는 요한 묵시록의 색깔과 숫자는 그 당시 문화적 배경, 전통

안에서 나온 숫자임을. 현대 무엇과 연결해서 아, 저 사람 요한 묵시록에 적혀져 있는

그 숫자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다 잘못된 해석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화를, 그 전통을 조금씩 배워 나가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구요.

 

일곱, 일곱은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충만함, 완전함입니다.

 

* 7이라는 숫자: 충만함, 완전함

 

왜 충만하고 완전함입니까?

3이 유다 전통상 3은 어떤 천상, 하늘, 하느님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 3은 천상, 하늘, 하느님의 영역을 이야기하고 4는 세상 모든 것을 의미하며

   7은 3+4이므로 하늘과 땅, 전부를 의미한다.

 

4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모든 것.

자, 하늘과 땅 세상이 만났으니 전부죠. 우리가 창조 때도 태초에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으니. 그것은 하늘을 딱 만들어 놓고,

땅을 만들어 놓고 그러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면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이야기 첫 번째가 또 하루, 이틀, 삼일, 사일해서 칠일로 끝나죠?

하느님의 쉼의 날로 연결해서. 예, 이렇게 7이라는 숫자는 창조의 모든 것.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하느님과 우리의 모든 것.

충만함. 그 숫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 2장에 보면 몇개의 교회에게 편지를 보냅니까?

왜 하필이면 7개일까? 이왕 보낼 꺼 막 수많은 교회에 보냈으면 좋겠는데

왜 일곱 개일까? 구체적인 이름도 나오죠? 에페소 교회부터 해서.

그런데 이 7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우리가 머리에 담고 있다면 충만하고 모든 것

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면, 모든 교회에게 보냈다는 메세지죠.

 

그래서 그 편지글을 다다음 시간에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편지 글 맨 마지막에

늘 똑같이 등장하는 한 구절이 있는데 "너희들은 이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라." 인데 여기서 뭐가 덧붙여지는가 하면 "여러 교회에"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들 일곱 개 교회를 의미합니다. 바로 그 교회들에게 말하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어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에페서 교회에 써 놓고 "자, 내 말 잘 들었지? 이런 메세지다.

됐지. 이 말 잘 들어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에페소 교회에 보내 놓고 이 교회들

에게 보내는 메세지다라고 하면 뜬금없잖아요. 약간. 그죠?

 

어떤 한 특별 교회에, 특정한 교회에 보내면서 일곱 교회들 메세지 알아 잘 알아

들었지? 그러면 뭔 소리야? 이런 식으로 들리는데. 그게 문학적으로 그렇게

표현을 해 놨다는 것이죠. 왜? 일곱이라는 숫자가 모든 교회이기 때문에 단순히

너에게 이야기하지마는, 너 하나에게 이야기하지마는 이 이야기는 모든 교회가

들어야될 이야기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우리가 1장 3절을 가지고 전에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가 함께 읽고자 했던 전례서와 같은 것이다. 집회 때

측별히 주일 집회 때 모여서 함께 선포했던 내용이 바로 요한 묵시록이다라는

개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 묵시 1,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여기의 메세지가 단순히 요한 묵시록이 쓰여졌던 그 당시의 메세지도

있겠거니와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회에게 던져주는 메세지가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다라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기 위해서 바로 오늘, 지금이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을 우리는 저번 예언서의

또 그런 특징을 지녔다라고 우리가 말을 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사라아가야 될 것인가?

자, 그래서 일곱 교회라는 메세지가 너무 좋아요. 그런데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

나타났을 때는 이것은 어떻습니까? 일곱 교회에서 좋은 메세지에서 이렇게 살아

가라, 회개하라라고 전해 줬지마는 일곱 나팔하고 일곱 대접이 나타났을 때는

아까도 봤다시피 나팔을 부니까 땅의 삼분의 일이 죽고, 재앙이 정말로 완전하고

충만하다.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예, 재앙이 그만큼 혹독하고 완전하고 소위 요즘 아이들이 많이 표현하는 종결자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종결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완벽하다는 말입니다. 그 완벽한

재앙이 심판이 어디 있는가? 믿지 않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충 뭐 처음에 요렇게 한번 살짝 겁줬다가 그 다음에 주고, 그 다음에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의 어떤 나팔과 대접들은 그만큼 심판의 확실함, 그것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열둘, 12라는 숫자

우리가 워낙 많이 접해서 이 뜻은 뭐 굳이 설명을 안 드려도 알 수 있는 것인데

12가 우리 성서적인 근원이 어디인지 한번 보겠습니다.

 

열두 지파, 누구 아들? 야곱의 아들들. 그런데 이 야곱의 아들이 단순히 그 집안의

아이들이 쭈욱 태어나서 가문이 늘어서, 많은 사람이 생겨서 이것이 뭐 야곱 집안을

의미하는 숫자 개념이 아니죠? 그것이 점점점점 역사 속에서 다르게 다르게 해석

되면서 결국에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그 개념으로, 보편적인 개념을 펼쳐 나갑니다.

 

* 열두 지파(야곱의 아들) :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함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수도 있겠지마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낸 역사가

단순히 자기들의 어떠한 역사만이 아니라 어떤 식의 역사였습니까? 다른 이방 민족

에게 당하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빌론 제국, 아시리아부터 해서 그 다음에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이런 것들을 자꾸 겪으면서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는가?

 

우리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모든이의 하느님이구나. 보편적인 하느님 개념을

가지면서 동시에 하느님 백성은 단순히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느님 백성

이구나. 이 전체 백성 개념을 12라는 숫자로 우리가 표현해 내고 있다.

 

* 하느님 백성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야곱) 집안에서 출발했지만 끝에 가서는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따른다면 12라는 숫자에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에서 보면 12지파 이야기가 나오지요? 12지파가 이스라엘

백성만 생각하면 안 되요. 12라는 숫자는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지마는 그 안에는

보편주의적인 하느님 백성 개념이 있음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봤던 것이 12장에 여인이죠? 12라는 숫자가 또 여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여인이 뭐를 쓰고 있었습니까? 예, 열두 개의 별. 별이 관인데 열두 개의

별이 있었습니다.

 

* 묵시 12,1: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별은 우리가 일곱 교회와도 연결을 했던 개념이구요. 그것을 열두 개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 백성 전체가 여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단순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느님 백성, 우리 교회를 의미하는.

 

그 교회는 남자 아이를 낳는다. 메시아를 잉태해서 메시아를 내어 놓는 그런 신앙

공동체, 메시아를 모시고 있는 공동체. 그 개념으로 우리가 여인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12는 하느님 백성, 메시아를 품고 있는 하느님 백성을 여인의 모습에서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자, 이제 1000이라는 숫자. 천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 묵시록에 천년 왕국설도 있습니다.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천년이라는 시간, 길죠? 뭐 하느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천년이라는 시간은 예컨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만점을 받았다를

뭐 100점이죠? 100점을 받았다. 이것은 모든 것이고 제일 최고의 점수이고.

 

그런데 이 요한 묵시록의 어떤 독자들이 천이라는 숫자는 만점과도 같은,

인간이 생각할 때 우리 100퍼센트다 그러면 최고로 생각하듯이 그 천이라는 숫자

자체도 최고로 좋다. 초고로 가득찼다. 최고의 숫자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천 년 왕국은 어느 시점부터 아, 요기까지 천 년이 딱 되고 다스리고 난 후에

용이 다시 풀려나서 잠시 이렇게 막 날개를 펼치다가 다시 불 유황으로 들어간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이런 개념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를 누리는 이 시기.  

 

이것은 정말로 최고의, 정말 인간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긴 시간 동안 부활하신 그분,

승리하신 예수께서 다스리는 시간이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천 년일까?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시리라 하지 않고 천 년이라고

했을까?  자, 다시 요한 묵시록의 저자의 모습을 한번 떠올리고 그 사람의 생각을 한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 천 년이라고 한 것은 아직까지 메시아(그리스도)가 완벽하게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천 년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최고의 기간, 가장 긴 기간을 이해할려고 하는 것이 천 년이지마는,

천이라는 숫자지마는 하느님 입장에서 정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는 아직까지는

완성되지 않는 그런 개념으로 천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천이라는 숫자까지 우리가 봤구요. 

그 다음에 우리가 볼께 십사만사천입니다. 이게 어디서 연결된 숫자일까요?

십사만사천 명.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만이천 명씩 나왔대는

그거죠. 자, 그러면 만이천입니다.

 

* 십사만사천 명: 열두 지파에서 만이천 명씩 나온 숫자

                       (12+  12,000= 144,000)

 

그런데 우리가 만이천 하면 만과 이천이 나눠지는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유럽 문화권에서 이 숫자를 읽을 때 보면 12 다음에 1000을 이야기해요.

12, 1000 이런 식으로 읽어요. 우리는 만이천 이죠?

읽을 때는 우리가 만 다음에 이천이 따로 이쪽에 붙는 것 같은데 유럽 문화권에서는

12다음에 1000을 읽어요.

 

자, 그러면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12, 1000. 최고다!

12지파에서 12000씩 나온다는 것은 뭡니까? 가장 완벽하게 하느님 백성이 가장

충만하게 정말 많이 나온다는 거죠. 열두 지파에서 만이천 명씩 각각 지파에서

세아려 가지고 만이천 명을 딱 뽑아가지고 이렇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그만큼 풍성하게 가장 많이, 인간적으로 가장 많이 불러낸다는 것이지요.

 

여기 이것을 모은 숫자가 십사만사천 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어린양을 따르는

숫자도 십사만사천 명이지요. 이 완전한 숫자(12)을 열두 번 더해가지고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 어린양을 따르는 백성, 그런 개념이 되어 버리니까 얼마나 이 풍요롭고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것입니까?

 

요한 묵시록이 이렇게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불러

들이는데 있어서는 정말로 인색하지 않아요. 재앙 하는데는 살짝 겁을 내요.

삼분의 일만 살짝. 자, 요렇게 좀 주저하고 그러지마는 이 숫자 안에서 정말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너무나 큰 숫자를. 에이 이것도 모르겠다. 이것도 양이 안 찬다

그래서 나타나는 게 "셀 수 없다."

 

셀 수가 없어요. 셀 수 없다라고 표현해 버려요. 이제는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누구한테요? 이거 구원을 외치는 이에게 셀 수 없음을 이야기 해 버립니다.

숫자가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 이것도 7장에 나타납니다.

 

* 묵시 7,9: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셀 수 없는 군중들이 하느님께 다 불리움을 받았다. 그런데 왜 재앙와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 세상의 논리에, 그렇게 답답하게 따라다니면서 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르는데 왜 못 쫓아오는가? 여기에 대한 답답함의 토로가 바로 일곱 대접과 일곱

나팔의 어떤 재앙의 모습이죠.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죠. 초대는 늘 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래서 십사만사천 명은 그렇게 봤구요. 이제 마지막으로 제일 관심있는 숫자

666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악마의 숫자라고 하는 이 666.

누가 악마일까? 우리 국어에 보면 ㄱㄴㄷㄹ ... 거기에는 숫자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말, 히브리 말 이런데 보면 알파벳의 숫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666이라는 숫자가 요한 묵시록에 나올 때,

자 한번 잘 알아 맞춰 보십시오. 이것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어떤 그런 글을 소개할 때 666을 씁니다.

 

* 묵시 13,18: 지각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걸 사람을 봐야지요. 그 사람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당시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람, 누굴까? 보면요.

세 명으로 압축이 됩니다.

 

이것은 주석 학자들이 말한 것이 아니라 리옹의 이레네오라는 교부, 그분께서 당시에

3명 정도로 이렇게 압축을 하는데 '유안카스'라는 사람과 '야테이노스'라는 사람과

그 다음에 '테이탄'이라는 사람. 이 세 명은 황제입니다. 로마의 황제.

 

* 리옹의 이레네오 교부의 666 해석:

e(5) u(400) a(1) n(50) q(9) a(1) s(200) l(30) a(1) t(300) e(10) n(50) o(70) s(200)

t(300) e(5) i(10) t(300) a(1) n(50)

 

그런데 요 알파벳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요. 요컨대 '유안카스'라는 것은 그 알파벳을

따져보면 5, 400, 1, 9, 200 뭐 이런 식으로 이걸 다 우리가 머리에 넣을 필요는 없죠?

넣은 필요는 없는데 이 알파벳 하나하나의 숫자를 다 연결 열결을 해 보니까, 이걸

합산을 해 보니까 666이 나옵니다. 이 그리스 말의 그리스 알파벳이죠.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던 야테이노스, 테이탄이라는 이 나머지 두 사람도 그 철자를

더하기를 해 보니까 666이 나오더라. 자, 얼마나 로마가 미웠으면 또 이 세명의 황제들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를 했던 사람이니 얼마나 미웠으면 자 이숫자가

악마의 상징처럼 그렇게 표현하면서 그 어떤 사람을 지칭하게 돼 버린 것이지요.

악마라는 것이지요.

 

숫자로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죠.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한번  맞춰 보십시오라고

요한 묵시록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666이라는 숫자를

뭐 악마의 형상이든지, 악마 자체라든지 그런 식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아,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부활하신 분을 믿고 있는 우리를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는

미움의 표현. 예, 그 정도로 우리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 666의 해석: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

 

자,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악의 어떤, 미워하는 우리를 박해했기 때문에 정말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의 세 명의 어떤 666이라는 숫자를 우리가 이해했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예수스의 그리스 말의 예수라는 그리스 말 숫자가 몇번이냐?

우리가 666 바코드를 뭐 찍고 다닌다는 둥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 예수님 바코드를

찍고 다녀야 되요. 예수님 믿으니까. 예수님 숫자는 888입니다.

 

* 예수: i(10) h(8) s(200) o(70) u(400) s(200) = 888

 

그래서 예수님을 이것도 알파벳을 따져 보면 888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왕 뭐 악마의

숫자를 찍었다고 뭐 그럼 말을 하면 우리는 888을 찍고 다닌다고 그렇게 해서 888이

예수 그리스도의 알파벳을 따져 보면 그렇게 등장합니다.

 

예, 그래서 이 어떠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색깔과 그 어떤 숫자적인 상징 개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마는 그 당시 문화적 배경 안에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

함부로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집어 넣어서는 안 된다.

 

더더군다나 그러한 상징들을 오늘날에 가지고 와서 아무리 의미를 잘 안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에 이것은 바로 너를 의미한다. 이것은 너를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바로 연결하는 것. 이것 다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텍스트를 들어가기 위해서 조금 조금씩 살펴보고 있고

오늘 이 시간에는 숫자를 가지고, 색깔을 가지고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이 위한 열쇠 중에 마지막으로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한번 배워보고 다음에 우리가 계속해서

서간문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1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