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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 탈출기 강의록 제17회 부르심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6 조회수592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안녕하십니까?

지금까지 한 얘기들을 잘 기억하시지요? 많이 하지도 않았으니까. ^^*~~~

예, 이스라엘이 요셉의 시기에 이집트로 갑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고 나서 이집트에

새 임금이 요셉을 모르는 사람이 되자 이제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의 새 임금은 단지 요셉을 모르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계속 숫자가 많아지고

강해지는 것을 가지고 두려움을 느끼고 그 이스라엘을 따라서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억압의 방법은 두 가지였지요? 노역을 시키는 것 하나, 아이들을 죽이는 것 하나.

그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사실은 계속해서 이어지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는 어느 이야기와 함께 더 이상 진행되지 않냐하면,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함께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전체 스토리 안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모세라는 아이가 태어나고 그리고 극적으로 구출이 되서 이집트의 공주에게

아들처럼 그렇게 살다가 커서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자신의 어떤 민족적인

그런 정체성을 느끼게 되는 과정, 그리고 나서 이집트 사람 하나를 죽이게 되고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 나중에 기록에 의하면 한 40년 정도의 그런 시간을

보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그렇게 낳고, 그렇게 40년 정도의 시간이 있다가 엘로힘의

산에서, 하느님의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떨기나무를 하나 보게 되는데 그것이

불타고 있었지만 하지만 불타버리지는 않는 그런 어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떨기나무는 땅에 있는 거구 불은 어디에 있는 거죠? 불은 하늘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과 땅이, 하늘나라와 이런 지상이 만나는

그와 같은 체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잘 응답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부르심에 모세가 응답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 이집트로 오게

되는 그런 과정 안에서 그 모세가 아론과 만나는 장면, 그리고 아론과 만나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야기를 전하니까 그들이 그것을 듣고 "아,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고 "아멘!", 아만!"이라는 그런 동사와 함께 등답하는 장면.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파라오에게 갑니다. 파라오에게 갔더니

파라오가 그런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야훼라는 신이 있다는 거 조차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얘기 하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의 그런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의 조장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게 되고 그러자 모세가 다시

하느님께 탄원하는 그와 같은 장면 그리고 다시 하느님이 모세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는데 "이제 네가 가서 파라오에게 다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응답합니까? 주님께 하는 최종적인 대답입니다.

 

탈출 6,12: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파라오가 내 말을 안 들을꺼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겁니까? 따르지

안겠다는 겁니까? 안 따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미 자기가 한 얘기를

또 합니다. " 저는 입이 안 떨어져서 말을 못합니다." 입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탈출 6,13: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 다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시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집트 임금 파라오

에게 보내셨다.

 

전체적으로 뭔가 요약은 돼 있는데 모세가 그래서 갔다는 걸까요? 여기까지만 읽어

보면은 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모세와 아론의 족보라고 제목은 붙여져 있지만 그 족보를 쭉 훒어

보니까 사실은 누구에 관한 족보지요? 아론에 관한 족보.

 

거기까지로 해서 지난 시간까지의 일단락이 마무리 됐습니다. 여기까지는 따라서

전체적인 이야기가 굉장히 행복하게 잘 마무리가 된 겁니까? 아니면 문제점을 안고

조금 이게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되지? 걱정꺼리와 함께 마무리가 되어 있는 겁니까?

걱정꺼리입니다.

 

한번 파라오에게 갔다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더 안 좋아지는, 그리고

다시 하느님이 모세를 파견할려고 하는데 모세는 그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하지만 이제 모세와 아론에게 어떤 일이 이렇게 좀

굉장히 어둡게 지금까지 탈출기를 전체적으로 여섯 개 부분으로 나눈다면 그 첫

부분은 마무리가 됐는데 그 둘째 부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궁금증과

함께 저희가 오늘의 단락 6,28부터 읽게 됩니다.

 

탈출 6,28ㅡ7,7: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던 날,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모두

이집트 임금 파라에게 전하여라." 그러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였다.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은 너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 너는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게 하여라.

 

그러나 나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게 하겠다. 그래도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이집트에 내 손을

뻗쳐 큰 심판을 내셔서 나의 군대, 곧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겠다.

 

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이 파라오에게 말할 때,

모세는 여든 살, 아론은 여든 세 살이었다.

 

예, 보면은 6,28부터 30절까지는 우리가 이미 앞선 단락에서 우리가 이미 읽었던

부분입니다. 이건 어떤 뜻일까요? 앞에 있는 커다란 줄거리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앞에 있는 마지막에다가 고리를 거는 겁니다. 이거는 이 이야기의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라는 겁니다.

 

신약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루카복음 마지막에는 끝난 게 주님 승천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시작을 하면서 주님의 승천하시는 부분으로 시작을 합니다.

따라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이 서로 연속적인 장면이라는 것은 루카복음의 끝부분

과 사도행전의 첫 부분이 겹친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어떤 거냐 하면, 요즘도 그런 게 하는지 몰라요. 저는 TV를 잘 안 보기 때문에,

거의 안 보기 때문에 모르는데 뭐 저도 오늘 수업을 하기 전에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마는 무슨 드라마 같은거 했을 때 시작 부분에 지금까지의 이야기, 뭐 그래서 아니면

지난 시간의 마지막 장면 뭐 이러구서 몇 초 동안 그런 거 보여주잖아요.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이르던 날,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아뢰었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물론 앞의 이야기를 고대로 옮겨 오지는 않았습니다만

비슷하게. 따라서 앞의 내용들을 조금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더군다나 그 첫 부분을 보시면은, 28절: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던

날," 이 28절을 통해서 뭐가 설정이 되는 거지요? 이집트 땅에서 = 어디서? 모세에게

이르시던 날 = 언제? 시간과 공간이 도대체 지금 우리가 언제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어디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라는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28절부터 조금 스토리가,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가 이제 새로운 쳅터로, 연극

으로 따지자면은 왜 1막 3장, 뭐 2막 2장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이제부터는 새로운

막의 전개로 넘어 갔다. 한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라는

기본적인 무대의 설정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29절: "나는 주님이다." 나는 야훼다.

이게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앞에서도 많이 나온 이야기입니까?

앞에서도 굉장히 많이 나온 이야기입니다. 탈출 6,2. 7. 8 계속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왔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이게 안 중요해서 그럴까요? 중요해서

그럴까요? 중요한 겁니다.

 

야훼가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야훼가 자기 자신을 알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이 문장에 관해서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빈도로 나오는가를 통해서도 그거를 좀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상 나중에 가서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리가 종교를 갖는다는

것. 우리가 신앙 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되는 거잖아요. 그럼 구원이라는

뭐냐? 적어도 탈출기의 신학 안에서 본다면은 구원이란 뭐냐?

 

하느님을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런데 여기서는 단지 우리가 머리로 무슨 공부

하듯이 영어 단어 외우듯이 그렇게 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따라서 요한 복음에서도 계속해서 비슷한 신학이 탈출기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것과 비슷한 신학이 되는 것이 뭐냐하면은,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안다면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바로 같은 그런 구원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또 앞으로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이집트가, 파라오가 알게 되는 겁니다. 뭐를? 내가 야훼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이면서 탈출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느님의

관심입니다.

 

예,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이 모든 말들을 전해라. 중요한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내보내라는 건데 모세가 하느님께 얘기합니다.

 

30절: "보십시오.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

까지의 이스라엘의 신학적 구도라면은 따라서 입이 안 떨어지니까 모를 해야

되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얘기를 했는데? 맞습니다. 입에 할례를 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요즘도 사실 비슷합니다. 유아들 있잖아요. 어린아이들 세례 받으러 오면은

세례식을 하면서 사제가 물만 붓고 그냥 기름만 바르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의

입에다가 십자가를 그어 주면서 "에파타!" 라고 얘기해 줍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어렸을 때 받았으니까 기억이 안나겠지요?  갖난 아기때 에파타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게 뭐냐? 이제는 말할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게 되어라. 말하고 듣는 것에 대한

그와 같은 어떤 사제의 축복을 우리는 아이들의 세례식 때 하게 됩니다.

 

아무튼 여기서 모세는 자신의 입이 안 떨어진다는 얘기를 하고 그리고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도 안 들었는데 파라오가 어찌 내 말을 듣겠습니까?라는 이야기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안 들었다는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사실 이제부터 그거는 관심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알게 되는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서부터의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고 나서 뭐 마라에서 아니면은 그런 어떤 갈대 바다의

위기에 있었을 때 아니면 광야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어떤 것을 알게 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뒤로 문제가 미뤄집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관심이 뭐냐?

파라오가 야훼를 알게 되는 것에 모든 관심이 모든 촛점이 맞추어지고 따라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조금 뒷전에 있습니다.

 

"어찌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 한마디에 집중하게 됩니다.

파라오가 야훼를 알게 되는 것에.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7,1: "보아라."

 

우리 식의 언어 안에는 이런 식의 말은 잘 쓰이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영어에서

누구한테 "이제부터는 좀 잘 들어!" 그랬을 때 Listen  뭐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있지요? 우리 말로는 어떤 표현이 있나요? 저는 생각해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제부터는 주목해, 잘 들어 그랬을 때 어떻게 하지요? 차렷! 그럽니까? ^^*~~~

뭐라고 그러지요? "주목!" 뭐 그럽니까? 주목은 약간 명령이고. 하여튼 뭐 누구랑

이렇게 얘기를 할 때, "나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중요한 얘깁니다."라는 그런 표현

인데 히브리 말 표현에서도 있고 뭐 서양 말에는 있는 거 같애요. 영어에서도 listen

뭐 그러면서 그 다음부터는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는, 히브리 말 표현

에서는 "봐라!" 라고 얘기하는데 이제부터는 잘 들으라는 소리입니다.

 

나중에 여러 번 말씀을 드리게 되겠지마는 히브리말 표현에서는 뭔가를 인지한다.

본다, 듣는다라는 것 사이에 구별이 좀 약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를 들을 수도 있고, 예를들어 말씀을 본다라는 표현이 히브리 말 표현에서 아주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라고 하기 보다는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본다.

뭐 이런 식의 표현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본다와 듣는다라는 동사가 조금

혼용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인지 또는 인식에 대한 그런 동사로 사용이 됩니다.

 

아무튼 "보아라. 나는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였다."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요?

앞선 문제와 같습니다. 앞서서 4장 16절에서 우리가 같은 문제를 겪었습니다.

 

*탈출 7,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하느님

처럼 되게 하였다.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은 너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

 

*탈출 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 줄 것이다."

 

아론과 모세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그는 너에게 입이 되고 너는 그에게 엘로힘이 될

것이다." 이거를 만약 저보고 번역하라고 그랬으면은 하느님이라고 번역하기보다

조금 일반적인 의미로 왜냐하면 하느님이라고 그러면 우리한테는 조금 이제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처럼 쓰이기 때문에 저한테 번역하라고 그랬으면 이렇게

번역했을 겁니다.

 

"그는 너에게 입이 되고 너는 그에게 신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엘로힘이

될 것이다라고 얘기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나오지요?

7,1에서는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고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은

너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앞선 모세의 두 문제가 여기서 해결이 됩니다.

 

자, 문제는 뭡니까? 모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 하겠다고 한 이유는,

"저는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 합니다." 그 문제는 해결 됐다.

"파라오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에 대해서는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엘로힘처럼

되게 하겠다." 아니 이미 됐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니가 의심할 필요없다.

따라서 앞선 6장 마지막 부분에 모세의 그 의문들, 모세의 질문들이 7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는 그 말씀을 통해서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7,2: "너는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모두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은

그것을 파라오에게 마랗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게 하여라."

따라서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누구에게 옵니까?

 

첫 번째로는 모세에게. 그 다음에 모세에게로부터 누구에게 옵니까? 아론에게.

그리고 아론으로부터 파라오에게. 이렇게 갑니다. 전체적인 틀을 보면은 재미

있는 거 같애요. 고대 사회에서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요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세 부류가 나옵니다.

 

첫째 왕이 있을 것이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가 있을 것이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처음 모세에게

갔다는 건 누구에게 갔다는 겁니까? 왕 , 예언자, 사제 중에서? 예언자에게.

 

모세는 예언자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아론에게 갑니다.

아론은 사제입니다. 아론으로부터 파라오에게 갑니다. 파라오는 왕입니다.

따라서 이 안에서 위계 질서는 뭡니까? 제일 높은 분은 물론 하느님이고

예언자, 사제, 왕.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그런 하나의 탈출기의 저자가 갖고 있는 어떤 신학적인

순서를 우리가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여기서 아론은 너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라고 얘기 했는데 예언자라는 건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요?

 

예언하는 사람이죠.^^*~~~

예언이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뭡니까? 예언은 뭐하는 겁니까?

프로페테스(profhth ") 라는 그리스 말이 갖고 있는 본래의 뜻은 어떤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얘기해 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일반적인 뜻입니다.

 

성서적인 뜻은 뭘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좀더 폼나게 얘기하면 성서적인 의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예언자들의 예언은 다음과 같은 고정된 틀 안에서 진행이 됩니다.

 

예언을 할 때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또는 야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로 시작 하거나 아니면 모든

말씀을 전한 다음에 끝에 히브리 말로  "롬 아도나이" 우리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

입니다." 라는 말로 끝을 냅니다. 물론 두 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 가지 형대로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히브리 말로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고 얘기하고

시작하던지 아니면은 모든 하느님의 말씀을 다 전하고 나서 "롬 아도나이." 라고

이야기하던지. 따라서 요즘도 우리도 사실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미사 때 독서가 끝나면 독서자가 뭐라고 그럽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독서자는 왕직, 사제직, 예언직 중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겁니까?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 독서자가 이렇게 중요한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자들은 왜 안 들을까요? ^^*~~~참 이상하죠?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영성체를 했냐? 안 했냐?에 관해서는 신자들이 굉장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날 독서의 말씀이 모였는지, 복음의 말씀이 모였는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 주셨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좀 큰 관심 없고 독서의 시간은 많은

신자분들에게 분심의 시간인 거 같애요. ^^*~~~

 

예, 교회가 굉장히 좀 바꾸어야 될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들은

어떻게 합니까? 독서 읽을 때? 신자들이 같이 읽게 합니다. 딴 생각 하지 말라고.

저는 그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전에부터 여러분들에게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독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뭐냐하면,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는 태도.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신자들한테 좀 이렇게 어떻게 우리가 독서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어떤

신부님들께서는 요새는 매일미사 책이라든지 이런 게 다 있으니까 독서의 말씀을

같이 읽자. 그래서 신자들과 같이 읽는 그런 실험도 하고 계시는 거 같애요.

 

예, 아무튼 따라서 예언자라는 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해 주신 말씀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그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얘기하는 예언자들을 예레미아 예언자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거짓 예언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런데 너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거짓 예언자라고 부르는 겁니다. 참과 거짓. 그것을 분별하는 것 굉장히 중요한

일인 거 같애요. 요즘도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분별에 대한 그런 힘든 일들이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나주라는 곳에서 있었던,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라든지 아니면 많은 신자분들이 조금 혼동하시는데 메쥬고리예라는 데

아시죠? 요즘에 갔다 오신 분들도 알고 계신데 교황청이 지금까지 메쥬고리예라는

곳을 이렇게 살펴보니까 그곳이 성모 발현지라고 교황청이, 아니면 교회 교도권이

확정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이니면 아니라고 얘기 했습니까? 거기에서는 기적이

없었다고 얘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검사하는 중입니다. 뭐 앞으로 100년이 걸리든 200년이 걸리든

계속해서 교회의 신학자들과 또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기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굉장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반면에 나주의 문제에서는 제가 그걸 신학적으로 들여다 본 것은 아니지만, 벌써

세 분의 주교님들이 관계되는 사람들과 그것을 조사한 결과 그것을 기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라고 교회에서 그렇게 그 어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관계된 분들, 신부님들도 계시거든요. 신부님들이나 거기 관계된

신자분들을 위해서 그분들이 그런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저희들이 기도하는 마음을 갖는 거는 굉장히 중요한 일일 거

같애요.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은 자칫 잘못하면은 그런 어떤 신비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은 우리들의 신앙생활 내지는 우리들의 삶이 건강해질까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가? 또는 어떤 제가 보니까 이 방송을

보시는 개신교 신자들도 많으시더라구요. 저한테 편지들을 하시는데 그런 개신교

신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특정한 교파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인가?

아닌가?를 보시려면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 어떤 기쁘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삶이 행복하게, 그리고

그 삶 안에서 계속해서 내가 신앙생활 안에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 건강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애요.

 

반대로 나에게 있는 그런 신앙이 나를 병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세상이 정말 지저분하고 그냥 내가 접촉하면 안 될 것 같이 생각이 되고

나를 방 안에만 있게 하고,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 구원되고 뭐 그런 식의

믿음이라면은 그것은 결코 건강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면에서 여러분들이 천주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 신앙

생활 안에서 내가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지, 혹은 나의 신앙이, 나의 영혼이

조금은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모습은 아닌지 이런 것들에 관해서 자신들을 돌아 보시

면서 올바른 신앙을 꿈 꾸는 것.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신명기 18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신명 18,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인데요. 이스라엘 백성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너는 여기서 누구죠? 신명기니까

모세입니다. 모세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같은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모세, 아론, 파라오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말씀이 마치 포장된 것처럼, 하나의 무슨 개체화 되서 말씀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의

입으로 건너가는 겁니다. 무슨 택배처럼.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여기서 이런 현상을 신학적으로 말씀의 사물화하고 얘기합니다. 말씀을 마치 물건처럼.

구약에서 보이는 거는 말씀의 사물화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씀이 물건처럼 있는 게 아니라 말씀이 사람이 되십니다.

 

구약에서는 말씀의 사물화라면은 신약에서는 말씀의 의인화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는 그 이야기로 요한 복음은 예수

사건을 설명하는 겁니다. 예,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3절: 그러나 나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여기서 완고하다라는 것은 우리 말로 그냥 직역하자면은 무겁게 한다. 단단하게 한다

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파라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단단하게 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 이거는 좋은 겁니까? 따라서 나쁜 겁니까? 나쁜 겁니다.

반대로 여러분의 신앙은 단단해야 합니까? 허약해야 합니까? 단단해야 합니다.

그럼 단단한 거는 무조건 나쁜 겁니까? 아니면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여기서 무겁게 한다. 단단하게 한다. 강하게 한다라는 거는 뭐냐하면,

변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은 변해야 합니까? 아니면 변하지 말아야 합니까?

예,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과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변해야 합니다. 조금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의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현상 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성장하거나 소멸하거나.

 

한 스무 살까지는 성장하는 기간이죠? 생명이 막 자라나고 뭔가 커지고 뭐 이렇습니다.

20대 중반을 지나면 사실 그때부터는 죽어가는 겁니다. 이제 얼마나 천천히 죽느냐가

문제지요?^^*~~~ 또는 얼마나 잘 죽느냐가 문제겠지요?

 

지금까지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나를 위해서, 나의 성장을 위해서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신을 희생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나를 희생해 나가는 그와

같은 시간으로 우리가 그런 소멸의 시간을.

 

따라서 최고로 나쁜 소멸의 방법은 뭐겠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고

혼자 천천히 죽는 거? ^^*~~~ 그게 최악일 꺼 같애요. 정말로 나쁜거는.

하느님이 생명을 내신 그런 뜻은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겁니다.

 

세상에 나와서 많은 것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고 커나가고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서부터는 많은 것들에게 다시 생명을 내 주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그 프로세스(process: 일이 처리되는 경로나 공정, 경과, 과정, 절차 등) 인데

누릴 때는 많은 것을 누리다가 나눠 줄 때는 아무한테도 안 나눠주고 자기 혼자서

딱 움켜 쥐고 그러다가 결국은 하늘나라로 가져가지도 못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그게 최고로 안 좋은 일이 아닌가?

 

아무튼 여기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다. 변하지 않게 했다는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변해야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언제 제일

자주 하느냐하면, 혼배 주례 설 때 자주 합니다. 혼배 주례 설 때 제가 이 이야기를

거의 빠짐없이 합니다.

 

"이 자리에 와 계신 많은 하객들은 오늘 이 신랑과 신부의 서로를 향해 갖고 있는

사랑의 마음이 변함이 없기를 기원하시겠지만 혼배 주례하는 저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합니다.

 

지금 같은 마음으로 변함 없어서는 안 되고 결혼할 때 그 마음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넣어 주신 씨앗과 같은 겁니다. 땅에 묻힌 씨앗이 그냥 묻혀서 가만히

있으면은 좋은 일이 아니지요? 변해야죠? 자라나야죠? 더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고,

또 씨를 뿌리고 해야지. 그것이 좋은 것이지요?

 

사랑은 따라서 변해야 하는 겁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라오의 문제는 완고하게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 누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까? 하느님이 완고하게 합니다. 따라서 요 문장만 보면 이 전체적인

사건이 파라오의 책임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 책임인 거 같애요.

 

비슷한 일이 창세기에서도 있었지요? 요셉이 큰 불행을 겪잖아요.

형들한테 구덩이에 빠트림을 통해 죽을 뻔도 하다가 하지만 이집트로 팔려가는.

하지만 나중에 그 모든 일을 다 겪으면서 요셉이 뭐라고 그럽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악한 일을 가지고도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십니다."라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이  하느님에 의해서 정해졌다를 신정론적인 그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나중에 복음서에서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데 그게 유다의 죄가 아니라,

그 때 사탄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따라서 누가 잘못한 겁니까? 사탄이 잘못한

겁니다. 그런 것처럼 복음사가도 그와 같은 어떤 유다의 배반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정론적인 사상입니다.

 

이 문제는 그러면은 어떻게 해결 되는 겁니까?

따라서 파라오는 죄가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파라오는 분명한 선택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합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이유를 모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중요한 거는 이겁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나가게 하면서 야훼를 계속 모른다면은

그거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백성을 이렇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만

결국은 파라오에게 야훼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최종적인 사건은 갈대 바다의 사건입니다만, 갈대 바다의 사건을 통해서 적어도

탈출기의 그 문맥 안에서 이집트는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어떤 구원 경륜, 커다란 틀 안에서는 크고 작은 인간의 고통, 불행

파라오나 이집트 사람들이 겪는 그런 어떤 재앙 이런 거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좀 다른 이해입니다. 우리도 뭐 비슷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많은 그런 고통들에 관해서 우리들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탈출기 7장을 쓰는 요 저자는 뭐라고 얘기하는 겁니까?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서 너희가 하느님을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에라고

얘기를하는 겁니다.

 

물론 이거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얘기입니다. 이거는 자신의 고통을 신앙 안에서 받아

들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지금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한데 가서

하느님이 당신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런 고통을... 정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가 나 자신의 삶의 힘든 여정을 돌아보면서

아, 그것은 나에게 고통인 줄 알았더니 하느님을 알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구나라고 회고할 수 있는 뭐 그런 틀 안에서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라는 탈출기 저자의 탈출기 사건에 대한 회고를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훌륭하십니다. ^^*~~~

 

예, 그래서 결국 표징을 일으킵니다. 몇 가지나 일어나는 거지요? 10가지.

나중에 그 수를 세는 것에 대해서 조금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10가지 재앙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등장합니다.

자 이야기를 읽어 봅시다.

 

3절입니다.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겠다." 얼마나 많이? 10가지.

 

4절: "그래도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내 손을 뻗쳐 큰 심판을 내리겠다." 손을 뻗친다. 여기서 큰 심판을

내린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와 명사들은 10번째 재앙을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의 모든 맏이들을 죽게 하는. "그리고 나는 나의 군대, 곧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겠다."

 

5절: "내가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손을 앞선 4절에서는 뭐라고 나와있지요? 손을 뻗쳐. 5절에서는 뻗어입니다.

우리 말로는 비슷한 동사지만 히브리 말로는 다른 동사가 사용됐습니다.

 

손을 뻗쳐 심판을 내리겠다라는 표현은 10가지 재앙이라면은 5절에서 이야기하는

이집트 위로 내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면, 이거는

갈대 바다 사건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의 문장들

 

*표징을 일으키다라는 것은 10가지 재앙을

*손을 뻗치다라는 거는 파스카 사건

*손을 뻗다라는 거는 갈대 바다 사건과 연관이 돼 있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의 어떤 진행이 여기 조금 암시 돼 있는 그와 같은

하느님의 진술을 우리가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이 뭡니까? 이집트인들이 내가 야훼임을 알도록.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아십니까?
이렇게 되면 이제 이런 성서의 텍스트와 함께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면,

그때부터 조금 문제가 심각해지지요?^^*~~~ 나는 하느님을 알고 있나?

우리는 그리스도교니까, 나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나? 하는

질문입니다.

 

결국 신앙 한다는 게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에 참 이상한 게 저도 사제 생활을 하던지 아니면은 뭐 그 전에 신학교

생활이던지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보면은 어느 순간 아,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제 알겠다. 그리고 너무 기뻐가지고 잠도 안 오고 그냥 기쁨에 들떠서 있다가

며칠 있다가 알았는 줄 알았는데 ^^*~~~ 다시 모르겠다. 이런 어떤 반복인 거

같애요.

 

예수님을 알 것 같고 그 뜻을 이해한 것 같고, 이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거

같다가 다시 어둠 속에 들어 갔다가 다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그게 어떤

신앙의 과정인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요새 자주 묵상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요.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것. 성장한다는 건 뭡니까? 변한다는 거지요? 우리들의 모습에서 어떤

모습을 닯아가는 겁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제가 이렇게 나이 먹었을 때, 60, 70 됐을 때 누군가가 저에게

그렇게  말해 준다면은 전 참 기쁠 거 같애요. "아, 신부님은 참 제가 생각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상의 커다란 선물은 없을 거 같애요.

 

예, 가끔씩 이제 본당의 꼬마들이 한 4-5살 된 꼬마들이 성당에서 저한데 예수님

이라고 부르긴 합니다. ^^*~~~ 그건 아니예요.  ^^*~~~ 그런데 그건 해결 해

줘야 되요. 얘네들이 신부님이랑 예수님이랑 구별하지 못하는 거 같애요. ^^*~~~

 

한번은 제가 신자들이랑 인사하다가 화장실을 갔는데 한 5살짜리 꼬마가 놀란

눈으로 "예수님도 화장실에 오세요?" ^^*~~~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왔어요. ^^*~~~

 

예, 예수님을 닮아가야 해요. 저희가 신학교 때 불렀던 노래. 요즘도 활동하는 분

중에 한분이죠? 신상옥씨라는 분 아십니까? 그분이 만든 노래 중에 하나가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우리 신앙인들의 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야훼임을 알도록" 하는 겁니다.

 

7절: "그들이 파라오에게 말할 때, 모세는 여든 살, 아론은 여든세 살이었다."

많은 나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신약성경에 반영된 스테파노의 연설 안에서

이미 봤습니다. 모세의 삶이 세번으로 끊어진다고 그랬지요?

 

이집트로 나와서 미디안으로 갈 때가 40세. 그 다음에 미디안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때가 80세. 그 다음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 동편으로  가서 120세. 그리고 죽는 거.

 

창세기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뭐라고 그럽니까?

인간의 행실이 악하니까 너무 오래 살게 해 주면은 안 되겠다.

몇 살 정도로 제한하면 되겠다? 120세. 그거를 다 누린 것. 그게 모세의 삶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정말로 의로운 사람이, 인간으로서 정말로 완성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다 누린다면은 몇 살을 살아야 되는 겁니까? 120세.

목표를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

 

예, 그런데 80세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은 연령입니다.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떤 분이 환갑이다 그러면

환갑 잔치를 했습니다. 요즘은 환갑 하면 욕먹지만 옛날에는 환갑이라고

그러면 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오래 사셨네.

 

그래서 환갑 넘은 사람들은 살만큼 살았다고 그래서 제가 그 세계를 조금 아는데.

저도 이제 천주교 신부다보니까 그런 책도 관심 있어서 좀 보고 하는데 환갑 넘은

사람들은요 그런 점 같은 거를 점장이들도 안 봐줬습니다. 왜냐하면 살만큼

살았다고. ^^*~~~ 안 봐줬습니다.

 

당신은 이제 세상에서 누릴 복을 다 누린거야. 무슨 점을 보느냐고 그래요.

살만큼 다 살았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무슨 다른 행운을 바라지 마라.

뭐 그런 거였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시편 90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시편 90,10: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듯 사라집니다.

 

인간의 삶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서양 말 중에서도 옛날에 라틴 말에도 이런 말이 있어요.

70대가 만나면은 인사말이 그거래요. "요즘은 어디가 아프우?" ^^*~~~

라틴 말 격언인데. 그런데 80대가 되면은 그 인사말이 변한대요.

만나가지고 하는 인사말이 "요즘은 안 아픈데가 어디우?" ^^*~~~

이렇게 여기서도.

 

하지만 요즘은 평균 연령이 좀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것들이 변화가

있는 그런 어떤 시기인 거 같애요. 예, 여러분들도 뭐 저랑 다 꿈이 비슷하지요?

오래 사는 거랑, 건강하게 살다가 조금 일찍 가는 거랑 선택하라고 그러면

더 뭐를 선택할까요? 조금 짧게 살아도 좋으니까 사는 동안은 다른 사람한테

너무 짐이 되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런 것들이 아마

제가 만나보면 거의 뭐 열이면 열 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 같애요.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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