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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헤로데의 목적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6 조회수357 추천수0 반대(0) 신고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은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아닐 까요?

그렇다면 은총이란 무엇이고 누가 얻을 수 있는가? 란 의문이 당연히 듭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죄라고 생각 합니다.

은총은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라고 봅니다.

공짜도 손을 내민다는 행동의 결과로 받는 것이지

손을 내미는 과정에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어제 암과 투병하다 끝내 작고하신 소설가 고 최인호씨가 생전에 

" '가진 자' 보다 '된 자' 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 

라고 말한 근거는 성경에 있습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티모1 6,10ㄱ)

평생을 돈을 벌기 위해 살다가 나중에 아쉬우니까 하느님께 은총을 구한다면 그건 

도둑질 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예수님 오른편에 있었던 도둑 처럼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만 한다면 예외가 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회개 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오늘 1독서에서도 바빌론 유배를 거두시고 성전 재건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전재건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시 가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못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않가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헤로데같이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불쌍한 악인은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그때서야 양심의 흔들림을 느낍니다.

그리고 은총을 도둑질하려고 합니다.

헤로데가 그 엄청난 성전건축에 이바지하여 '건축왕' 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역사는 

그를 거의 절대적인 악인으로 평가 합니다.

왜일까요? 그의 성전 건축의 목적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순전히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인천주보.22일)

헤로데가 지은 성전은 '의지'가 재료가 아니라 '돈'이 재료 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껏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에 다시 준 기회를 헤로데가 기만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이 성전의 멸망을 예언 하시게 됩니다.


한 나라의 정책이란 것도 그 밑바탕이 국민을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만들어 

지고 진행 되어야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책을 만들면 당연히 

그 진행 과정에서 말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거짓말(선의의 거짓, 정치적 거짓, 애매한 거짓,어쩔 수 없는 거짓등..) 

중에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거짓말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7계명

에 근거 합니다.('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노트커 볼프: 제8계명 내용에서 정리)


은총,겸손,사랑...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을 따른 결과이지 우연히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노력으로서 얻는 것이지 순간의 기질로 얻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노력없이 얻으려는 행복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한 목적은 구원때문이 아니라 '보이기 위한 것'

이였습니다.   백성을 기만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보편적인 사랑이 목적인 사람과 개인의 이익이 목적인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이 바로 '자신을 버리라', '이타적 사랑' ,'희생' 

이런한 것들 아닙니까? 그렇게 하기위해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일단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봅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에 익숙해 지면 우리는 반드시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통해 남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세가지의 관계는 마치 

'삼위일체 ' 교리 만큼이나 서로 연관이 깊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에 이론상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 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우리는 이 이론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겸손한 기도와 용기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론과 행동사이에 있는 이 '기도'는 마치 오작교 같은 다리 입니다. 

영혼의 휘발유 입니다. 휘발유 없이 차가 갈 수있습니까? 다리없이 큰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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