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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1일(화) 聖女 소화 데레사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30 조회수632 추천수0 반대(0) 신고



10월1일(화)
음8/27
聖女 소화 데레사 님..등

 


 

데레사(10.1)

성인명 데레사(Teresa)
축일 10월 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교회학자
활동지역 리지외(Lisieux)
활동연도 1873-1897년
같은이름 소화 데레사, 소화데레사, 테레사, 테레시아


리지외의 성녀 소화 테레사(Teresia)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Basse-Normandie)의 알랑송(Alencon)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탱(Louis Martin)과 젤리 게랭(Zelie Guerin)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스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 Therese Martin)이며,
'소화(小花) 테레사'라고도 부른다.
그녀는 4살이 채 못 되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와 함께 오빠가 사는 리지외로 이사를 하였다.
성녀는 어릴 적부터 특히 성모 마리아 신심에 출중했다.
7살 때부터 고해성사를 즐겨 받았고,
10살 때인 1883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심하게 알았는데,
때로는 경련과 환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그녀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면서 이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테레사는 1884년에는 첫영성체를 하고 그 얼마 후에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완전한 회심’을 체험한 그녀는
자신의 영혼 안에 애덕이 넘쳐 드는 것을 체험하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고 한다.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린 상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망,
즉 다른 영혼들을 돕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머무르며
필요한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혈을 전해 주기로 결심하였다.
성탄절에 회심의 은총을 체험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았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테레사는
14세에 리지외의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를 청하였다.

이 카르멜 수녀원에는 이미 테레사의 두 언니,
마리(Marie)와 폴린느(Pauline)가 입회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녀원에서는 테레사에게 21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하였다.
테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의 주교에게 입회를 청하기도 하였고,
또 아버지와 언니 셀린느(Celine)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게 개인적으로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때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입회하겠지”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녀가 1888년 4월 9일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것은 나이 15세 때였다.

 

 
 

그 후 2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9년 반 동안 테레사의 수도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다다른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은 곤자가의 마리아(Marie Gonzague) 원장수녀에 의해서
생긴 공동체의 내부 분열로 고통을 당하였다.
테레사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생활에 열중하였다.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녀가 이룬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충실성은 그녀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에는
그 어느 수녀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1893년 테레사는 수련장 서리로 임명되어 4년 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은 길’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갖고 살았다.
그녀의 ‘작은 길’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법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 앞에 서서 지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한다.
죽기 18개월 전에 처음으로 결핵의 증세가 나타났지만,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테레사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켰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의 시련을 겪었으며,
1897년 9월 30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일 년 후 카르멜 수녀회의 통상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이 비공식적으로 출판되어 여러 카르멜 수녀원에서 읽혀졌고,
이 자서전을 요구하는 부수가 점차 늘어나자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에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테레사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이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후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교회 관례를 무릅쓰고,
교황 비오 11세는 테레사가 선종한 지 26년만인 1923년 시복식,
곧이어 1925년 5월 17일 시성식을 갖고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선포하였다.
테레사는 로마를 순례한 것 외에는 고향인 알랑송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일평생 다른 영혼을 위해 보속하는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와 더불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1944년 5월 3일에는 성녀 잔 다르크에 이어 프랑스의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97년 6월 10일 성녀 테레사를 보편교회의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녀가 남긴 저서로는
“성녀 소화 테레사 자서전”, “성녀 소화 테레사의 마지막 남긴 말씀”이 있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수녀회 내의 갈등을

오로지 자신의 사랑으로 대처하시며

작은 꽃의 길을 걸으신 님.


어머니를 잃고 아홉 남매의 막내로서 아버지의 푸에 자라

교회의 큰 힘이 되신


션교 사업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작은 꽃 성녀 소화 데레사 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루이지 마리아 몬티(10.1)

성인명 루이지 마리아 몬티(Luigi Maria Monti)
축일 10월 1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25-1900년
같은이름 몬띠, 알로이시오, 알로이시우스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티(Luigi Maria Monti)


 

 

 


'사랑의 사도' 루이지 마리아 몬티는 1825년 7월 24일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교구의 한 작은 마을
보비지오 마스치아고(Bovisio Masciago)에서 열 한 형제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늘 ‘가정은 교회’라고 강조하며 기도와 일상의 노동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성가정을 꾸려나갔던 그의 아버지는
루이지 마리아 몬티가 12살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위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는 목공소에 취직해서 일을 하며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도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던 그는 직장 동료 및 마을 동료들과 함께
수도자와 다름없는 ‘재속 봉헌’(consecratio mundi)의 선구적인 삶을 살았다.
젊은이들은 몬티와 함께 틈만 나면 복음말씀을 나누고,
성지순례를 함께 하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들의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이 몬티 주이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수도원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했다.

루이지 마리아 몬티는 1852년 동료 5명과 함께,
당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던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의 일원이 되었고,
훗날 이 수도회의 ‘진정한 아버지’이자 ‘설립자’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도 수많은 좌절이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라.
네가 나를 위해 젊은 청년들을 모아 그들이 순수함을 지키고
정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일을 했는데,
그런 너를 내가 저버릴 수 있겠느냐?
용기를 내어라”라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믿고 따랐다.

그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외과 응급처리와 약조제와 간호사 업무를 공부했으며,
특히 간호사 일에 주력했다.
그는 평생을 어려운 이웃과 환자를 위해 봉헌하며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겸손하게 헌신하였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원했고,
그래서 심하게 아플 때조차 특별한 치료와 대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신체의 고통까지도 하느님을 위해 바쳐야 하는 하나의 의무로 생각했다.
루이지 마리아 몬티는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성사 속에서
겸허하게 그러나 힘차게 신적인 것을 갈망했다.
그는 현세의 삶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세상을 주님의 집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1900년 9월 26일 병자성사를 받은 루이지 마리아 몬티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오직 주님과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화살기도를 바치며 죽음을 준비하였다.
그는 9월 30일 저녁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동료들에게 마지막 강복을 주고
이튿날 오후 6시경 사론노(Saronno)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2003년 11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을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마리아 몬티(Aloysius Maria Monti)로도 불린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가정을 교회라 가르친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받아
세상을 주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한 어린이

젊은이들이 모여 정결과 봉사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다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수도회로까지 발전하였으니

복자 루이지 마리아 몬티 님이시여
현세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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