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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시대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난다면?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01 조회수329 추천수1 반대(0) 신고

우리 시대 예수님 같은 분을 만난다면?[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9] 루카 9,7-9

박동호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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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9.27  18: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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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사목 현장에서, 그리고 정의평화위원회 사목 현장에서 자주 들으며,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과 마음 아픔을 겪는 말이 있다. 점잖게는 “왜 사제가 세상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는 말과, 아예 “빨갱이 짓을 집어치우라!”는 노골적인 비난이 그것이다.

앞의 이야기를 하는 분에게는 그래도 대화의 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하느님의 백성, 우리 교우들이 사는 삶의 현장이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기쁨과 희망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말에 대해서는 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번번이 난감하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묻는 것이 아니라 비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을 하시는 분들 주장의 줄거리는 대개 다음과 같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은 빨갱이나 하는 일이다. 당신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빨갱이다. 공공의 적이다.’

결론적으로 이는 철저하게 사회를 우리 편과 적 사이의 대결, 선악의 이분법적 대결, 이데올로기 대립의 프레임으로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터무니없는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게다가 언론뿐만 아니라 지식사회, 하다못해 종교 영역에서 이 같은 이분법적 선악 구도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 곧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폐쇄된 지배집단을 형성”하려는 이들의 집요함과 교묘함 때문이다.

교회는 이 ‘폐쇄적 지배집단’의 형성을 돕지 말라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교리 406항). 더 나아가 성경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에 굴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루카 복음서는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고 전한다. 왜 당황했을까?

   
▲ ‘헤로데의 잔치’, 루벤스(1633년)

필자 나름대로 추측해본다. 헤로데 영주의 생일잔치에 참석하여 연회를 즐긴 이들은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래아의 유지들이었다(마르 6,21 참조). 이들은 로마 제국에 부역한 대가로 ‘사적 이익’을 보장받은 유다 공동체 안의 ‘폐쇄적 지배집단’이었다. 그들이 사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사적 이익을 확대하려고 하는 한 필연적으로 보통의 평범한 유다인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세금을 거둬 바쳐야 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해야 했으므로…….

세금을 많이 거둬 바치는 그만큼 로마 제국은 좋아했을 것이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혹독하게 억압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그만큼 로마 제국은 좋아했을 것이다. 그만큼 상(?)도 많이 받을 것이고, 자리도 보전될 것이며, 유다 공동체 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보장받을 것이다. 일제 강점 35년 이 땅의 보통 사람이 겪은 고통의 양, 정도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친일 부역한 거짓 지도자들의 사적 이익과 위세는 비례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백성이 숨조차 쉬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들의 기세등등함은 오히려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대목이 ‘마리아의 노래’가 아닌가 한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마리아는 이를 ‘전능하신 분이 하신 큰일’로 이해한다.

그 아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낸다”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노래도, 예수님의 선언도 ‘폐쇄적 지배집단’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던 셈이다.

헤로데와 관련하여 그 공개적인 도전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언행이 아니었을까 한다. 성경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혼인을 문제 삼았다가 헤로디아의 딸의 훌륭한 춤 솜씨 때문에 죽은 것처럼 묘사하지만(마르 6,17 이하 참조), 그보다는 헤로데를 비롯한 고관과 무관, 그리고 갈릴래아의 유지들에게 드러내놓고 저항했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를 비롯해서 당대의 유다 거짓 지도자들을 수시로 고발했다(마르 6,20 참조). 헤로데가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당황했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발언이 그만큼 도전적이었음을 뜻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혔으며, 불의 속에서 정의의 횃불을 들었으며, 억압 속에서 자유의 깃발을 들었다. 당연히 어둠과 불의와 억압의 세력에게는 ‘반대 받는 표적’,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어둠에 신음하고 불의로 고통 받고 억압으로 숨죽이는 백성에게는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폐쇄적 지배집단의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공공의 적’이었을 것이며, 백성에게는 따라야 할 훌륭한 예언자였을 것이다. 현실은 폐쇄적 지배집단이 이긴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을 베어 쟁반에 올려놓았으므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처형 앞에서 복잡한 심경을 가졌을 것이다. 분노가 앞섰을 것이나, 공포심도 뒤따랐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나섰다가는 저렇게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들의 계산에는 이 공포심이 있었을 것이다. 로마의 십자가형도 같은 맥락이며,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육시(戮屍)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저항하면 이렇게 당하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경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거스르는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행적이 그것이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동년배로서 동시대를 살았다. 세례자 요한을 그렇게 처형했으니 무지렁이 백성에게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헤로데의 당황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제 이 ‘폐쇄적 지배집단’은 더 큰 형벌을 준비하였다. 로마 제국의 힘을 빌고, 거짓 지도자들의 힘을 빌고, 일부 군중을 동원한 ‘십자가형’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악은 그 폭력성을 더해간다. 그러나 그 폭력성이 더한다고, 그 공포를 확장한다고, 그러니까 아무리 어둡게 한다고, 아무리 불의의 정도와 범위를 확장한다고, 아무리 억압의 강도를 높이더라도, 빛은 꺼지지 않고, 정의는 패배하지 않으며, 자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빛과 정의와 자유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를 충분히 증명했다.

세례자 요한 같은 분이, 예수님 같은 분이 이 시대 우리 사회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리고 그분들이 오늘날의 헤로데와 고관과 무관, 유지들, 바리사이, 율법학자, 수석사제와 원로들에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사적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갖고 있는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지도자입니다”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니신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쓸데없는 짓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주저할 수도 있다. 무관심할 수도 있다. 그분들을 따를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다. 그래도 그 선택에 대해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해야 한다. 선택은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는 선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대화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이든 사회든 좋은 의미의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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