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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2강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3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05 조회수690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2강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3

 

찬미 예수님!  한 주간 잘 사셨습니까?

지난 시간에 제가 실천적인 어떠한 우리 삶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실천적으로 살아

내어야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행복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실천적으로 잘 사셔야, 살아 오셨어야 요한 묵시록을 앞으로 계속해서 조금

더 이해가 잘 되시리라 생각되는데 지난 시간에 우리가 불행을 봤죠? 불행이 어떤 의미

인가?  다시 요약하자면 "불행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표징이다."라는 개념으로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 불행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표징이다

 

재앙이 시작될 때 불행이 시작될 때 천상의 모습을 먼저 그렸고, 재앙이 끝날 때도 

하느님의 현존의 모습을 그려내는 요한 묵시록. 그래서 불행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행복에로 이렇게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래서 이 과정은 마르코 복음 13장에도

똑같이 재난이 시작되고 환난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올 표징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까 열심히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라라고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자, 그렇게 살면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또

보여 주느냐?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끝부분이죠. 끝부분이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끝났다는 것. 

이것은 요한 묵시록이 불행을 위해서 재앙을 위해서 종말의 무시무시한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책이 아니라 그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내겠다라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를 이번 시간에

잠시 한번 보고 그 보고 난 후에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가 이제서야 요한 묵시록을

한번 처음부터 읽어 나가는데 일곱 개 서간 2장부터 시작되는 일곱 개 서간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가면서 요한 묵시록을 구체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요한 묵시록이 행복을 위한 책이구나에 대한 마지막 설명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한번 보면요. 

우리가 2장과 3장 제가 방금 말씀드렸던 일곱 개 서간의 주제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왜 천상 예루살렘 마지막 장면이, 21장, 22장에 등장하는

그 이야기가 2장, 3장의 제일 앞에 있었던 그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나는 이 책은 이 주제로 처음과 끝이 이렇게 읽혀졌으면 좋겠다라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죠. 그래서 2장, 3장에 보면 어떤 게 있는가?

 

생명의 나무 그리고 첫 번째와 마지막을 다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어떤 그런 모습

그리고 생명의 책, 새 예루살렘 뭐 이러한 주제들이 우리가 조금 있다가 일곱 개

서간을 볼 때 우리가 조금 더 언급을 하겠습니다마는 이러한 주제들이 2장, 3장

에도 나타나고 천상 예루살렘에서도 등장을 하고 있다.

 

* 요한 묵시록 2장, 3장과 21장, 22장의 연결: 생명의 나무, 첫 번째와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생명의 책, 새 예루살렘

 

이러한 주제들이 어떤 주제들인가? 여기에는 하나의 희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는 구약에 계속해서 등장했던 주제들, 특별히 예언서에서 강조했던

주제들이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안에 그대로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언서, 예언자들 그러면 우리가 크게 어떤 의미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구약의 예언자 기원전 8세기로 가보자면, 8세기에

있었던 예언자가 제2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카  이런 예언자들이 있었는데

 

* 기원전 8세기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카

 

이때는 소위 나라가 어수선했어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어떻해요? "너 잘 살아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심판 경고 이런 식의 이야기가 계속되었죠. 예언서의 아주 큰 특징입니다.

예, 현실에 대한 비판, 올바른 목소리. 그런데 유배를 가고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희망과 위로를 전해주는 목소리로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바뀝니다.

 

* 예언서: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가

               동시에 나옴.

 

예, 그렇게 바뀌어 나가는 어떤 두 큰 흐름이 있지요?

심판과 경고 그리고 위로와 격려의 어떤 희망의 메세지, 이것의 두 축이 예언자,

예언서를 흐르는 어떤 맥이 됩니다. 이 맥에서 천상 예루살렘은 요한 묵시록이 이렇게

취하는 천상 예루살렘은 이 두 번째 맥인 희망, 격려, 위로 이쪽을 더 부각을 시킵니다.

 

* 천상 예루살렘(묵시 21장): 희망과 위로, 격려

 

어떻게 되었냐하면, 요한 묵시록 21장과 22장에 보면요.

첫 번째 주제: 백성들의 재건이라는 주제를 한번 가지고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천상 예루살렘 주제를 한번 보겠는데요.

그 첫번째 주제가

 

*1. 백성들의 재건

 

재건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

유배 이후에, 바빌론 이후에 어떻습니까? 누가 재건을 합니까?

 

에즈라, 느헤미아가 등장해서 율법의 정리와 새로운 성전(제2성전), 물론 제2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는 화려하지 못했어요. 볼품이 없었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이 민족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기 위한 어떤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그런 시도가 유배

이후의 백성들의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재건 하려는 사람들한테 "아아,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됐다. 마, 참아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예언자는 없었죠. 격겨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컨대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스바니아 3장을 보면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스바 3,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잔칫날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예언자가 이제 위로를 줍니다.

* 스바 3,18: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예, 불행을 다 걷어 내겠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불행을 겪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를 통해서 불행을 온전히 떨쳐 버리게 하겠다.

 

*스바 3,19: 그때에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처치하리라.

 

예, 물론 이건 위로와 격려에 있어서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현실적으로

드러난다기 보다는 위로의 메세지죠? 다 없애버리시지는 않을 그런 상황인데

그렇지마는 우리가 새롭게 나라를 재정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격려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 스바 3,19: 나는 절뚝거리는 이들을 구하고 흩어진 이들을 모으리라.

유배 때문에 흩어져 갔던 사람을 모아서 이제 힘있는 나라로 만들어 보여 주리라.

 

* 스바 3,19-20: 온 세상에서 그들의 수치를 칭송과 명성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때에 내가 너희를 데려 오리라. 그때에 내가 너희를 모으리라. 너희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릴 때 세상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칭송과 명성을 얻게

해 주리라. ㅡ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자, 하느님께서 지금 대단한 격려의 말씀을 하십니다. 백성들의 재건.

예, 유배 이후에 다시금 세울 수 있는 나라에 대한 희망을 지금 제시하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재건의 관점에서 자, 요한 묵시록이 이것의 관점을 가지고 온다는 말이죠.

새 예루살렘, 천상 예루살렘 옛날의 하늘과 옛날의 땅은 어디 사라져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와서, 천상 예루살렘에 내려와서 이제 새롭게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 세상 안에 너희들이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더 이상 슬퍼하지도 울지도 말고 정말

더 이상 목마르지도 말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한 어떤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마련하셨는데 이제 거기에 내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느자다. 이것은 바로 뭐냐?

 

우리 불행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행복 이야기할 때도 계속해서 했던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이 딱 주어졌다고 해서 거기에 내가 자동적으로

그냥 들어가는 거 아닙니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늘은 들어가 있다가 내일은 나와

있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들어가 계실 수 있지마는 또 내가 마음 속으로 뭐 아주 다른

생각을 하거나 뭐 그러면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어떠한 뭐, 지금은 됐으니까, 한번 시작했으니까 영원히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죠. 지금이 악의 자리, 사탄의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천상 예루살렘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의 재건을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되고 그 재건의 모습은

예언자들이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격려, 위로를 주기 위한 것.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도 새 하늘, 새 땅 이것도 위로와 격려.

 

자, 이쪽으로 오면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 수 있다라는 그런 모습, 그런 주제를

우리에게 지금 들려 주고 있다. 예언서 중에 두 축 중에 희망과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를 요한 묵시록이 취해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 21ㅡ22장은 구약 예언서에 나오는 '희망과 위로, 격려'의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 두 번째 주제가 뭐냐하면, 구원의 보편주의입니다.

 

* 2. 구원의 보편주의

 

자, 구약 예언서부터 먼저 한번 볼까요?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이사야 66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이사 66,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사야서는 한 사람이 한 순간에 써서 한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1.2.3이사야 그죠? 기원전 8세기부터 유배 후까지 쫘~악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그러한 예언서가 이사야 예언서죠. 66장입니다. 지금 읽었던

부분이 유배를 다 겪고 온 후에, 그래서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그런 메세지입니다.

아까 백성들의 재건 그 시대적 배경과 같은 거죠.

 

예, 나라가 이제 다시 모여서 다시 재건해야 될 그 순간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 곧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언어가 다른 민족.

요한 묵시록에 자주 나타나죠?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 이걸 경상도 말로

싸그리 다 그냥 이렇게 모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상 예루살렘도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어떻게?

모든 민족들이 그 천상 예루살렘에 와서 거닐고 뭔가를? 보화를 가지고 들어 온다.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의 문이 어떻게? 12개의 문이.  12라는 숫자는 우리 너무 잘

알죠? 하느님의 백성 개념이죠. 동시에 모든 세상 민족으로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민족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열려져 있어요. 12개의 문이 열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서 거닐기를 바라는. 그러나 단 조건은 있지요?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려져야 된다. 실천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그렇게만 살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그 누구든

구별하지 않겠다는 사랑이 벌써 예언서에 특별히 이사야서 66장에 우리가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이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아, 이것이 우리의 어떤 선택된 이들을

위한 어떤 글이구나라고 생각하시면 아주 오산입니다. 내가 믿고 열심히 활동하고

요한 묵시록이 주어지는 모든 그 어떤 영광된 어떤 모습들, 구원을 받겠끔 하는 그런

장면들이 '나'를 위한 것이구나! 이러한 생각은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불러 주십니다. 그런데 꼭 우리가 편을 갈라요.

 

예, 그런 모습이 우리 성경 읽기에도 아주 잘 드러납니다. 뭐 간혹 제가 말씀 드리는 

것 중에 신자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우리가 예컨대 예수님께서 

유다인들 혹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펼치실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요. 아, 속으로 이 바리사이, 율법학자 이 나쁜 놈들! 요놈들 이 안되겠네!

이러면서 나는, 내 모습은 아무것도 안 보고, 나는 예수님 편에 살짝 가 있어요.

살짝 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어 나가요. 

 

이미 우리의 관점, 시선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이미 나는 구원 받은 거예요. 스스로.

이런 식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한번 머리속에 이야기를 한번 떠 올려 보시는

게 베드로의 일화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니까

뭐라고 그럽니까? 뭐 엘리야라고 그러고 예언자 중에 한분이라고 그러고 세례자 

요한 이라고 그러고...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이거 당시 사회에서 완전히 신성모독이죠? 왜? 예수를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내

신앙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마샤'라는

히브리 말의 '기름부음을 받은'이고,  그 말이 메시아이고 메시아가 그리스 말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이 뭐라 그래도.

 

얼마나 용기있는 말입니까? 난 세상 사람이 다 이렇게 옳다고 얘기해도 나는 그거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다라는 그런 배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그때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신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이겨내고 용기 있게 내 신앙을

꿋꿋이 살아가는 그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짝 그 바로 뒤의

이야기가 예, 나는 수난 받고 뭐 내 고생할꺼다. 내 죽는데이.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까 바로 잡고 "안 됩니다." 그러죠?

 

베드로 머리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 메시아 사상은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십자가를 져. 메시아가 어떻게 사람한테 죽어요?

절대 그러면 안 되죠. 멋있게 내려 와야죠. 구름을 타고.

그런 개념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자, 베드로조차도 사탄이 됐다가 가장 큰 신앙을 고백했던 최고의 위대한 인물이

됐다가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는 이미 뭐 성경 읽을 때 완전히 그냥 뭐 나는 무조건

예수님 편인 거예요.

 

예, 이런 식의 어떤 이것도 어떻게 보면 흑백 논리이고 이분법적인, 이원론적인

사상이 이미 우리 안에 이미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최대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있을 수 있다라는 그런 여유와 포용력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성경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보편주의입니다.

 

율법의 기본은 일치입니다. 서로 관계에 대한 일치가 특별히 하느님과의 일치가

율법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에

익숙하져 있기 때문에 내가 싫으면 치워 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율법이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이혼장을 써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어떻게 바꾸어 주시는가? 사랑의 계명으로

바꾸어 놓죠? 그 율법의 총 종합이 황금률 아닙니까? 뭡니까?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참조)

 

되게 적극적이고 예, 완전히 관계로 나아가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와의 관계 안에서 서로 원하는 것을 서로 해 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관계

지향적인 그런 어떤 관점입니까? 구원의 보편주의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자, 그 다음의 주제가 뭐냐하면, 평화와 행복입니다.

 

* 3. 평화와 행복

 

자, 행복에 대해서는 우리가 워낙 뭐 말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평화가 뭐냐?

아모스 예언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9장에 보면,

 

* 아모 9,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 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밭을 갈면 거두는 이가 따른다는 것은 평탄하고 순조롭게 돌아가죠? 물 흐르듯이.

내게 강과 같은 평화... 뭐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만, 예, 물 흐르듯이 쭉 가고 있습니다.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포도와 씨가 계속해서 이렇게 따릅니다.

이것도 물 흐르듯이 가고요.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넘치리라.

왜 하필 포도주일까요? 성경에 포도원 비유도 많고 그렇지요?

당시의 주 작물이 포도이기 때문에.

 

우린 뭐 어떤거 할까요? 뭐 농촌에 쌀은 요즘 너무 넘쳐나서 고민이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뭐 풍성하게 생각하는 그런 농작물이 가득하면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다라고 농부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죠? 그런 세상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 천상 예루살렘에 있어서도 21장에 보면 열두 달 내내 뭐가 이렇게 잎이

무성하고 과일들이 열리고 생명수가, 물이 이제 어좌에서부터 흘러 내려와서 천상

예루살렘에 흐르고 이러한 생명을 나누고, 풍성함을 나누고 평화와 행복의 어떤

시기를 바로 요한 묵시록이 이러한 예언서의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에서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평화와 행복'

  * 죽음의 파멸(묵시 21,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생명나무( 묵시 22,2):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예, 세 번째 주제가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이제 너무 잘 알다시피 새로운 창조지요.

 

* 4.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는 이사야서에 나타났던 개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새 하늘, 새 땅.

그 새 하늘 새 땅이 천상 예루살렘도 새 하늘 새 땅으로 드러나는데 문제는

 

* 예언서의 '새로운 창조': 이사 65,17; 에제 47,12

 

* 이사 65,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 에제 47,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우리가 나중에 가서 이 요한 묵시록 강의가 끝나갈 무렵에 천상 예루살렘의 구체적

텍스트를 읽으면서 다시 설명을 드릴 부분입니다마는 간단하게 지금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롭다라는 것입니다.

 

'창조'그러면 새로운 창조라는 것을 이렇게 말을 요렇게 붙이면, 아, 하느님께서

없애버리고 뭔가 새로운 걸 나한테 탁 주셨구나. 어, 이거 어떻게 적응하지?

이 세상 어떻게 살아가지? 이리 새로운 거?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약간 물질주의적인

개념으로 새로운 창조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가만히 보면 소위 말해서 옛 하늘과 옛 땅은 없어진 게 아니예요.

없어진 게 아니라 동사가 어떻게 쓰였냐하면, 저기 가버렸어요. 이렇게 이렇게

가벼렸어요. 갔지만 어디 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없어진 게 아니라 사라진 거예요.

사라졌다를 없어진 거로 생각하면 안 되요. 내 눈 앞에 없는 거예요.

내 관점에서 없는 거예요.

 

* 예언서의 '새로운 창조':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묵시 21,5)

 

그래서 이 새롭다는 것은 뭐냐? 그리스 말에 새롭다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영어에 새롭다 그러면 New 아닙니까? 그 New라는 단어가 네오스라는 게 있구요.

이 단어는 정말 물질적으로 새롭다할 때 새롭게로 쓰이고 두 번째 새롭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그리스 말이 뭐냐하면, 이것은 주관적 해석에 따른 새로움이예요.

 

그런데 우리가 천상 예루살렘의 이 새로운 창조라는 개념, 이 새롭다라는 것은

이 두번째 의미인 주관적 해석에 따른 평가에 대한 새로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보던 사람, 우리 뭐 여기 계신 자매님들 부부 생활을 이렇게 하시니까 맨날

아침마다 보는 얼굴 새롭습니까? 헌 것 , 그 자체입니까?^^*~~~

 

예, 어떠셔요? 우리 시청자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 맨날 보던 얼굴 새로울 게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나는 새롭구나! 이건 새로운 얼굴이다!"라고 내가

어떤 마음의 관점에 따라서 그렇게 바라볼 때 이건 새로운 거예요.

예, 전혀 옛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새로운 창조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새 하늘 새 땅 그것이 정말 천지개벽을 해 가지고 정말 이 세상에

희안한 세상이 탁 와가지고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정말 이제 하느님의 어떤 신앙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맞게 될 새 세상 예 그런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맨날 똑같은 어떤 다람쥐 체바퀴 도는 삶을 살아

가는데도 단 한 시간, 그 하루 똑같은 게 한번도 없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죠?

우리가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래서 새 것이 와서 그것을 내가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내가 하지 마시고 변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일상 똑같애요. 똑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다면 이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고 깨어 있지 못하고 맨날

세상에 그냥 휩쓸려서 살아가다 보면 늘 헌 거예요. 헌 것. 여러분 새 거 가지고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신상을 가지고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신상품? ^^*~~~

 

그래서 우리의 삶을 한번 신상으로 만들어 보세요. "아, 새롭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뇌시켜도 좋아요. 이런 거는. 하느님이 주신 오늘 하루, 아침에 눈을 딱 뜨시면

"아, 새롭게 또 살아야 되겠구나!"라는 그런 마음으로 사시는 것이 새 하늘 새 땅을

우리가 맨날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아멘!"

 

예, 가끔씩 아멘을 더 크게 하셔도 되요. '진실로, 진실되이' 이런 거죠. 하고 싶으셔요?

"예!" 예, 그게 열정입니다. 그게 천상 예루살렘을 사시는 어떤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 다음에 볼 수 있는 것이 한계 지워지지 않은 경배입니다. 한계가 없는 경배.

 

* 5. 한계가 없는 경배

 

이 날이 되면, 다시 말해서 그러한 평화와 행복이 있고 정말 민족이 새롭게 재건되고

재건되고 그러한 기쁨 가득한 하느님께서 다 다스리시는 새 하늘 새 땅이 되면,

모든 민족들은 그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에서 끝이 없다.

 

* 요한 묵시록의 '한계 지워지지 않는 경배': 민족들이 몰려 듬(묵시 21,24)

                                                               하느님의 영광(묵시 21,22-23)

 

*묵시 21,24: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이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이다.

 

* 묵시 21,22-23: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의 도성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에서 가끔씩 본 것처럼 이 악마의, 재앙의, 잘못된 이들, 하느님을

멀리하는 이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었어요. 기간도 한계가 있었고. 그죠?

예, 날짜도 한계가 있었고.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끝없는, 영원한 그러한

개념이 요한 묵시록의 개념에 사용된다고 했습니다.

 

자,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에덴 동산에 갔을 때 한번 보면 에덴 동산은 하느님과

더불어서 잘 사는데 딱 가죽옷을 입고 딱 쫓겨나고 난 후부터는 나이는 많아요. 그죠?

구백 살부터 해서 칠백 살부터 해서 그런데 그 선조들의 나이의 숫자들을 보면,

점점점 줄어들죠? 이게 뭐냐? 자꾸자꾸 한계가 온다는 거죠.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점점 멀어진다는 것이죠. 죄와 함께 있으므로 해서. 그런 표현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평균 수명이 몇 살인지 아십니까? 40세, 50세?

아유, 그러면 뭐 아주 장수 중의 장수죠. 예, 그 당시 사람들이 보통 20대 중반이

평균 연령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40세 이상을 살게 되었는 게 19세기 이후부터래요.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 인간의 수명이 확 줄었다는 거죠.

 

뭐 근력이 좋아서야 70년, 뭐 아니지요? 맞습니까?

예, 뭐 70-80년 살아가면 엄청 많이 산거지요. 예수님이 서른세 살에 돌아가셨다고

우리가 믿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좀 사신 겁니다. ^^*~~~

 

예, 우리 지금 서른세 살이면 애 취급을 할 수 있는데 아직 철이 안 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우, 저는 마흔인데도 아직 철이 안 들었습니다마는 이 예수님은 그만큼

오래 이렇게 사셨다고 볼 수 있는.

 

어쨌든 이 나이가 하느님으로부터 점점점 멀어지면서 이게 상징적으로 나이가 점점점

줄어드는 모습. 하느님과 멀어지는. 그런데 이 천상 예루살렘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이 한계없는 경배, 경배라는 것은?

 

* 예언서의 '한계 지워지지 않는 경배': 이사, 66,21; 미카 4,1-5

 

* 이사 66,21: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미카 4,1-5: 마지막 때에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산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이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놓이 솟아오르리라. 백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민족이

모여 오며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수많은 백성 사이의 시비를 가리시고 멀리 떨어진 강한 민족들의 잘잘못을

밝혀 주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정녕 모든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걸어가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영원히

걸어가리라.

 

아, 제사 많이 들여야 되겠구나. 하느님께 뭐 기도 열심히 이런 차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되고요. 경배는 하느님과의 관계의 일치 상황이예요. 경배라고 단어가 쓰인 경배의

의미가 "내가 당신께 나아가서 당신께 내가 부복한다."는 겁니다. 엎드려 당신께 이렇게

인사한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에 일치하는 것. 세상 것에 경배하는 게 우리 요한 묵시록에 보면,

어디에? 13장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괴물, 짐승 앞에서, 짐승 앞에 경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권력 앞에 경배하고, 로마의 황제 숭배 앞에 경배를 한다는 것이죠.

 

예, 그런데 그 경배는 잠시 후에 재앙으로 끝나버립니다. 한계가 있는.

여기에는 한계성 없는 그런 하느님과의 일치가 영원히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에서. 요것을 다 종합한 것이 결국엔 뭐냐? 결국에 마지막으로 종합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거냐?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행복이라는 것이죠.

 

자, 우리가 불행 이야기를 계속 해 왔고 행복의 끝자락에 천상 예루살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천상 예루살렘의 여러 가지 주제들 중에  마지막 종착점은

하느님께  온전히 경배드리고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는 것.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등불이고 하나는 성전

입니다. 그죠?

 

그 도성에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그 도성의 등불은 어좌에 계신 분과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성전이 필요없습니다. 그 도성의 성전은 하느님과 어린 양

시기기 때문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묵시 21,31),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묵시 21,22-23).

 

하느님이 천상 예루살렘의 그 자리에 그대로 함께 계시다는,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현존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내 평화, 내 행복,

이 차원이 아니라 너와 타 존재와 나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관계 지향적인 행복이지 내 중심적인 세상의 성공과 같은 그런 행복을 요한 묵시록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행복, 그것은 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타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연습을 하셔야 됩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 행복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어야 됩니다.

 

인간은 행복해야 됩니다. 왜 행복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제가 타인과의 관계성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관계에서 오는 행복.

이것이 왜 인간은 행복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원래 아담과 하와에서

볼 때에 '도움'이라는 가치로 인간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 '알맞은 협력자'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에제르'라는

히브리 말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도움'이 바로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고

인간이 인간 다울 수 있는 특징이 바로 이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아, 내가 도와줘야 되겠구나! 도움이 필요한 데에 내 시선을 가야 되겠구나!

거기를 바라봐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시는 게 내가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인간이 인간이 아니면, "아이구, 나를 챙겨야 되겠구나! 도와주기 전에 내부터 봐야

되겠구나! 내가 평화로워야, 내가 행복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보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셔도 별로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도와 줄라고 오셨습니다. 그것을 예수님 편에서는 섬기러 오셨는거지요.

내가 도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죠. 예, 그래, 도움을 줄 곳은 어디입니까?

내보다 잘 나가고, 배부르고, 뭐 살 사시고, 내보다 능력도 좋고 이런 분에게

"아이구야, 내 도와줘야 되겠구나! 어이구! 저, 모자라는구나!" 이런 관점을

우린 안 가집니다. 그죠? 어떻게?

 

가난하고 힘들어하고 소외받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내 욕구가 생기죠? 물론 이런 욕구도 아예 생기지 않는 사람 세상에 많습니다.

못된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은 자기 것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 자기 권력만

채우려고 그러구 자기의 돈만 벌려고 하는 사람,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회개시키는 것이 또 우리의 몫이기도 하겠지마는 무엇보다 우리 먼저

혹시라도 주위에 슬퍼하고 어려운 사람이 없는가? 이렇게 돌아보셔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 교회는 사회교리로 표현하죠. 예, 사회교리의 자리가 곧 가톨릭이,

그리스도교가 머물자리이지 세상의 권력이 좋아서 그 사람들을 만나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교가 지향해야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린 기본적으로 '도움'이라는 창세기부터 등장히는 이 '도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에 이런 도와줄 때 행복이 있다는 거.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이 시간을 딱 듣고 옆으로 우리 가족들부터 한번 보십시오.

우리 가족이야 내가 다 먹여 살리는데 뭘 도와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아쉬운 게 우리 가족들의 대화가 참 없습니다.

 

예, 제가 우리 초등부, 중.고등부 학생들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아이들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부모님 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다 성가정 같이

보이고 아이들도 열심히 복사단하고 다 하는데 그 애들 교회에서 만나 개인 면담

해보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해요. 이러한 게 왜 그런가?

 

답답해서 미치겠대요. 다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하고 그러는데 이것이 왜 가정의

행복이 다 깨지고 이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저도 처음에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런데 많이 들으니까 이제 별로 충격이 안 될 정도예요.

슬픈 현실이예요.  자살하고 싶다는 것이 정말 목숨을 끊는다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만큼 살기 싫다라는 푸념이 애들 입에서 나오는 거죠.

그게 뭐냐? 이 행복을 모르기 때문이죠. 도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부모님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래 무엇이 부족한지 경청하기 전에 "내 아이이기 때문에 나는 잘 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도와주죠. 이건 자기 욕구이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도움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해야 가정이 행복하고

우리 사회가 행복한 것입니다.

 

나 스스로만 나를 도우려고 하지 말고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우리 모습이 천상

예루살렘의 마지막 행복,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방식

자체가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의 현존이죠. 등불, 성전.

 

당신 혼자 지고지순하고  잘나셔서 성전인 거룩한 성전에 혼자 탁 갇혀져 있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란 말이죠. 천상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백성인데 백성의 필요 구성요소

로서 등불, 성전이 그 안에 같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감실을 볼 때 저는 가끔씩 이렇게 미사 때마다 그런 분심이라고 할까요, 묵상

이라고 해야 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게 영성체 후에 성체를 분배하고 감실에

다시 모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 죄송합니다!" 이분을 다시 또 어디에 가두는 느낌이잖아요.

또 우리 본당 같은 경우에는 이게 잠글 때 소리가 되게 커요. "철컥." ^^*~~~

예, 그런 느낌이...

 

그러면서 물론 우리가 거룩하신 그 어떤 예수님의 몸을 소중히 모셔야 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이 정말 우리를 거룩함

과 우리를 갈라 놓는 그런 어떤 모습으로. 절대 여자는 제대 위에 올라오면 안 된다.

완전히 세상 원리가. 그런데 그러한 어떤 차별적 요소로 구분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

에게 없어야 하겠죠. 하느님이 성전이고 등불이 되십니다.

 

요게 요한계 문헌이 말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입니다.

유다이즘, 유다교 입장에서는 절대 말도 안 되는 어떤 모습이겠지마는 우리

가운데에 오십니다. 한가운데에.

 

그리고 창세기에서도 사람을 만들어서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 그리고 또 한가운데에

하느님의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거는 하느님의 영역이라는 거죠.

그 한가운데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우리가 천상 예루살렘까지 다 봤으니까 이제 정말로 요한 묵시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자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해서 이제 다 훑어 봤어요. 요까지만 이제 강의 들으셨으면

요한 묵시록을 읽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하나하나 1장부터 읽어나가시면 됩니다.

 

다음 강의 이렇게 하실 때는 요한 묵시록을 22장까지 다 읽고 머리 속에 넣으시면 참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요한 묵시록을 읽어나갈 겁니다. 읽어 나가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 강의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토록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의

모든 구절을 다 읽을 수는 없구요. 제가 선별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2장, 3장 그리고 7개의 서간 그리고 4장, 5장 등 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4장, 5장이 하느님이 등장하는 모습, 어린 양이 등장하는 것. 그 다음에 19장에 백마탄

기사가 나타나는 어떤 혼인잔치, 21장, 22장을 구체적으로 조금 선별해서 그렇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내용

 * 2,3장: 7개의 서간  *4,4장: 하느님과 어린양의 등장  * 6,7장: 구원의 모습들 

 *12, 13장: 악의 근원  * 19장: 백마탄 기사, 혼인잔치

 * 21,22장: 새 예루살렘

 

이것만 다 읽어도 요한 묵시록을 잘 읽었다고 우리가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7개의 서간부터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간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요번 시간에 어떤 의미로 구성되어 있는지 잠시

보구요. 다음 시간에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서간부터 해서 차근차근 읽으면서 나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이제 서간을 들어가려고 하니까 서간이라는 말마디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소합니다. 아니, 우리 너무 잘 알지요? 너무 잘 아는데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생소하다는 말입니다. 실컷 묵시록, 묵시록, 징벌 뭐 심판, 천상, 지상 이야기 싹 다

해놓고 서간. 갑자가 바오로 서간 이런 식으로.

 

예, 요한 묵시록을 제가 말씀 드릴 때 첫 번째가 물론 1. 묵시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두 번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라는 하나의 경고성이 있기도 하고

동시에 희망과 위로는 주는 메세지다. 이것은 뭐와 많이 닮아 있다.

2. 예언서의 예언문학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자, 이 두 가지의 어떤 문학적 장르죠. 장르. 장르의 어떤 구분은 우리가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로 이상하게 3. 서간입니다.

서간의 형식이 분명히 2장에서 3장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서간에 대해서

말 마디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지와 서간을 우리가 어떻게 구분하는가? 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걸 서간이라고

할까? 예, 우리가 연애 편지를 쓰면, 개인대 개인의 어떤 사적인 얘기입니다. 그죠?

절대 보여주면 안 되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됩니다. 몰래 꽁꽁 숨겨야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어떤 이런 사심이 담겨 있는 그런 편지는 아주 개인적이고 남한테

보여 주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서간이라는 용어를 보면, 이거는 서로서로 돌려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런 것들이 가톨릭 서간, 사목 서간이라고 이렇게 하는 이런

것들이 왜 서간이라고 그러느냐하면, 이거는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그냥 개인적인

메세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는 이것을 여러분 모두가, 신앙 공동체가 돌려

보시라는 것입니다.

 

예, 이러한 관점이 요한 묵시록 안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왜? 요한 묵시록에 보내는

편지가 몇 개지요? 일곱 개입니다. 이 7이라는 숫자, 우리 너무 잘 압니다. 그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머리 속에 딱 넣으시기 바랍니다. 일곱 개, 충만.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아요.

 

* 요한 묵시록의 일곱 교회(묵시 2,11):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이 교회에게 구체적 이름을 지칭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문제는 일곱 개의 소아시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적혀져 있는 일곱 개 교회 외에 소아시아에 다른 교회들이 쭉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묵시록이 일곱 개 교회를 선별했다라는 것. 왜 이 7이라는 숫자

를 맞췄느냐? 여러 딴 교회가 있는데.

 

그것은 뭔가 여기서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개의

교회만 뭔가 나쁜 짓을 엄청나게 해 가지고 요 교회만 뭔가 이야기하고자 한 게 아니라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인 의미인 완전한 교회, 충만한 교회, 모든 교회를 의미하기

위해서 7을 맞췄다.

 

그래서 서간문은 공동체가 다 모든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곱 개 교회에 전해졌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요한 묵시록이 이 세가지(1. 묵시문학 2. 예언문학 3. 서간) 문학적인 기법이 이렇게

융합돼 있다는 것. 같이 묶여져 있다는 것. 우리 마지막 서간이라는 것을 들어 가면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서간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서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한번 또 살펴보도록 하는데요. 이 서간의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이 구조를 한번 볼께요. 서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서간의 구성은 각각 교회에

구체적으로 보내는데 그 형식이 다 똑같습니다. 일곱 개 단계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 1. 수신자(천사에게)

 

첫 번째 수신자입니다. 요거는 아까 말씀드렸던 구체적인 교회죠. 교회 이름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보내라 하느냐하면,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고 합니다.

천사에게만 보내고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절대 읽히지 말게 하여라. 뭐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교회 천사라는 것은 교회 공동체 대표입니다.

대표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요한 묵시록의 천사는 유다이즘의 천사 개념과 조금 다르게 보셔야 합니다.

왜 다르게 봐야 되느냐 하면? 유다이즘에서 천사, 구약의 전통에서의 천사론은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적인 역활을 하는. 그런데 요한 묵시록에 보면요.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절 하려고, 인사 할려고 그러니까 "너 나한데 왜

이러는데,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같은 그거다. 경배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라고 말합니다(묵시 19,10)

 

유다이즘에서는 천사가 인간들보다 이렇게 조금 높아서 어떤 의미에서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러는데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요한 묵시록은 천사론을 펼칩니다.

그러니까 천사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기를 말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요한 역시 유다이즘에서 등장하는 유다 묵시문학에서는 이 중개자적

역활을 하는 이 선지자, 선견자를 조금 이래 일반 사람과 다른 지혜로운 자, 구별된 자,

거룩하게 된 자라는 개념으로 되어 있는. 우리 묵시문학 배울 때 말씀드렸습니다.

 

천사와 마찬가지로 요한 역시, 나는 종들 중의 종이고 형제들 중에 같은 형제일뿐이다

라고 그렇게 말하죠. 요한 묵시록이 되게 평등에 관심이 많은 책인 것이죠.

아주 획기적인 책이죠. 유다 전통과는 뭔가 다른. 수신자인 천사에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공동체의 전체에게 보내라. 늘 서간의 시작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두 번째가 뭐냐하면 ...이가 말한다.

 

* 2. ...이가 말한다.

 

여기 '이'는 누구냐? 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사람의 아들 모습을 일곱 개 교회에

각각 다양한 형태로 묘사를 해냅니다. 다시 말해서 이분은 예수님입니다.

수신자는 각각 교회고, 발신자는 한분 예수님인데 이분을 다르게 표현했는 거예요.

일곱 개의 교회에. 어떤 이.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나타나는 구조가 뭐냐하면,

나는...을 안다. 이것은 현실의 어떤 각 공동체의 삶을 의미합니다.

 

* 3. 나는 ...을 안다(현실의 삶)

 

나는 니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안다. 어우, 되게 무서운 말이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안다." 뭐 영화 제목도 있고 그런데.

나는 ...한 것을 안다. 나는 네가 지금 잘하는 것을 안다. 나는 네가 지금 영혼에

약간 문제라는 것을 안다. 인제 현실의 일단 진단이죠. 그러한 것을.

 

그래서 요한 묵시록 서간은 되게 구체적인, 지금 현실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미래에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뭐 이야기를 끌어다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네 번째가 뭐냐하면 그러나 나는 너를 거슬러 현실은 네가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게

아니다.

 

*4. 그러나 나는 너를 거슬러

 

이렇게 살아야 된다. 거슬러서 살아야 된다. 지금 너의 현실의 삶이 아니다.

예컨대 에페소나 다른 교회에 보면 '첫사랑', 첫사랑을 네가 잊어버렸다.

그래서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내용.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그런 내용. 현실의 삶의 진단을 통해서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여기서 제시해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슬러했으니까 뭐 어떻게 하여라

대부분 나오는 이야기가 돌아서라는 겁니다. 어디로? 누구에게로?

예수님에게로  회개해서 돌아서라.

 

* 5. 회개하여라 => 예수님에게로

 

회개라는 것이 윤리, 도덕적인 어떤 잘잘못을 가려가지고 "아이구, 내가 고쳐야 되겠다."

이거 아닙니다. 돌아선다는 의미는 우리 너무 잘 알죠? 다 관계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관계를. 그 다음에 여섯 번째로 회개하면 승리하는 자에게 보상, 곧 상, 선물을 주시겠

다는 거죠.

 

*6. 승리하는 자 보상

 

회개하고 돌아서면 보상을 준다. 이 보상이 뭐냐?보상이?

여기에 많은 구절이 등장을 합니다. 요 등장하는 내용들이 겉옷부터 해서 생명나무,

싹 다 등장합니다. 요 등장하는 내용들이 천상 예루살렘에도 나타나고, 천상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모든 요한 묵시록에 전반적으로 다 걸쳐서 다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것들은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이러한 보상들이

전반적으로 다른 부분에 다 등장하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은 보상, 선물, 경품, 경품

행사를 위한 하나의 목록들이 이제 쫘~악 펼쳐진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 마지막으로 귀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누구의 말을?

성령의 말씀을. 성령님께서 어디에 보내는 말씀을? 교회

 

* 7. 귀 있는 자 들어라. 그 교회들

 

그런데 요기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되게 중요합니다. 요기서 귀 있는 자가

성령의 말씀을 알아 듣는데 성령께서 어디에 보내는 말씀?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말씀입니다. 그 교회들이라고 원문에 되어 있거든요. 그 교회들입니다.

 

에페소 교회 써놓고 마지막에서 에페소 교회에서도 그 교회들에게 보내는 메세지예요.

스미르나 교회에 써놓고도 그 교회들에게. 정관사 '그'가 들어 갔으니까 그것을 일곱

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죠. 일곱 개의 교회를 그 무슨 말이냐? 지금 이 공동체에

이 메세지는 너희들만을 위한 메세지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필요한 그런 메세지다

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읽어 나가겠고. 더 일곱 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되겠는데요 오늘 이 시간에 이 일곱 개에 담긴 똑같은

형식으로 일곱 개의 구체적 메세지가 다양하게 우리에게 보여질 것입니다.

 

* 1. 수신자(천사에게)

* 2. ...이가 말한다.

* 3. 나는 ... 안다(현실 삶)

* 4. 그러나 나는 너를 거슬러

* 5. 회개하여라 => 예수님께로

* 6. 승리하는 자, 보상

* 7. 귀 있는 자 들어라. 그 교회들

 

그래서 제일 중요한 부분, 예수께서 한분 하느님, 한분이신 분이 모든 교회에게

메세지를 지금 보내고 있다. 그 메세지를 보낸 이유는 지금 삶이 아니니까 회개하고

돌아와라. 그러한 내용으로 이 서간이 구성되어 있다라는 것. 우리 머리에 두시고.

 

다음 시간부터는 이제 성경을 딱 시청자분들도 보실 때, 이 강의를 들으실 때 성경을

펴 놓으시고. 왜냐하면 이제 한줄 한줄 읽어나갈꺼니까 펴 놓으시고 강의를 들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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