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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배은망덕하지 않기 위해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05 조회수806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27주일


<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복음: 루카 17,5-10





조롱당하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33),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배은망덕하지 않기 위해 >

      

정신분석 전문의 이무석 교수에게 J군이 찾아왔습니다. 25세의 J군은 키가 크고 잘 생긴 대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정신분석을 받았던 이유는 노래 강박관념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어떤 노래가 떠오르면 절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공부도 할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습니다. 한 번은 도서관에 앉아서 머리에 떠오른 노래와 10시간을 싸웠지만, 나중에는 식은땀만 나고 기진맥진해 진 채 공부는 하나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의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어린 아들을 마당에 발가벗겨 놓고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놀면서 어머니를 종처럼 부렸고, 아들도 노는 꼴을 못 보았습니다. J군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온 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칼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J군은 아버지가 두렵기도 하고, 두려움을 주는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노래 강박관념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반항이었던 것입니다. 노래강박증상은 J군의 자아가 노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에게 좌절을 안겨주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J군의 자아는 이렇게 자기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하고 있었고, 이것을 J군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은 분석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6층까지 걸어 올라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J군이 6층을 눌렀고 한 의사 가운을 걸친 사람이 7층을 눌렀습니다. J군은 자신이 6층을 눌렀기 때문에 7층까지 한 번에 가지 못하는 의사 선생이 자신 때문에 매우 불편해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의 시간을 빼앗은 자신에게 그 의사 선생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미안해했기에, 그 이후로는 의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으면 자신을 계단을 선택하는 것이 편했던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그의 무서운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투영되어 두려움 속에서 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흰 가운을 입은 이무석 교수도 아버지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들어올 때 노크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안방 문을 함부로 열었다가 아버지가 방에 깔아놓은 부속품을 밟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크게 화를 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또한 J군을 무시했었는데 한 번은 J에게 드라이버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성격이 급한 것을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황하여 아무리 찾아도 드라이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달려와 드라이버를 찾았고 눈앞에 두고도 못 찼냐? 이 병신아, 도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하며 J를 무시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이무석 교수는 친절함과 인내로 한 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차차 J군도 세상 사람이 모두 아버지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느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처럼 두렵게 여겼던 교수와 사이가 편해졌습니다. 물론 아버지와도 그만큼 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무석 교수가 일을 마무리 하다가 상담실에 1~2분 늦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태연한 척 했지만 이내 기다리던 동안에 너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부숴버릴 것 같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가구 모서리에 찧고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절을 잃어버릴까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이런 공격적인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그렇게 억압되었던 공격성이 이제는 표현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억압해 왔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현했지만 그 분노가 보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심했습니다. 용서받았고 그래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아버지에게도 연민이 생겨 아르바이트 해서 목돈을 드리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취직시험도 두려움 때문에 몇 번이고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당당히 붙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풀리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풀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머리에서 울리는 노랫소리도 어느 샌가 멈춰 있었습니다.

[참조: 이무석, 친밀함, 비전과 리더십 2013, 88-99]

 

이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강박증이 생겨 온 삶이 엉망이 되어버릴 뻔 했던 한 청년이 스스로 노력하여 이전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참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J군의 노력으로만 그렇게 된 것일까요? 물론 J군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무섭고 증오스러운 아버지로 바라보는 J군을 끝까지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증오심을 사랑으로 되갚아준 이 교수가 없었다면 J군이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사랑으로만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렇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절대 자신 혼자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혼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 주위의 모든 이에게 감사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내가 더 주는 게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일본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하던 어떤 청년이 매번 입사에 떨어지자 무작정 회장 앞에 무릎을 꿇고 저는 노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취직을 해야 합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예상 외로 회장은 오늘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리고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두텁고 갈라진 굳은살과 뭉툭하고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발가락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감사보다는 불평을 많이 할 때도 있습니다. 받은 것 보다는 덜 받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을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 부르나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배은망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록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서 주인에게 시중들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아무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라고 합니다. 이는 네가 한 것보다는, 받은 것을 더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을 하인으로 들여 배불리 먹여주는 주인의 사랑은 그 무엇을 주고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 가끔, 혹은 자주 배은망덕합니다.

 

저를 처음에 사제로 불러주셨을 때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그분께 드린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많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 포기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밥을 굶고 성체를 영하면서 교만한 자아가 크게 한 방 먹었습니다. 저는 배를 채우기 위해 성체를 영했지만, 그 성체는 제 입속에서 녹으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느냐? 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저에게 성체로 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저를 살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언가 해 드리고 있었다고 착각한 것은 교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크면 내가 무언가를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결국 사제로 살게 되면 사제로서 봉사한 삶에 대한 영광은 제가 다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에 대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었어도 내가 무언가를 해 드렸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다면 그 사람 안에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그것이 감사와 행복의 기초가 되게 됩니다.

 

80대 침해 끼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범아, 저 새가 무슨 새냐?”

까치에요, 아버지.”

조금 있다고 또 묻습니다.

아범아, 저 새가 무슨 새라고 했지?”

까치라니까요, 아버지.”

당신 앞에 날아온 까치를 보며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아범아, 이 새가 무슨 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아버지. 까지라니까요, 까지!”

이 대화를 듣던 어머니가 조용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범아, 네가 어렸을 때는 네 아버지에게 저 새가 무슨 새냐고 수백 번도 더 물었다. 그 때마다 네 아버지는 까치란다. 까치란다...’라며 일일이 대답해 주었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던 거란다. 그리고 그렇게 호기심 많은 너를 쓰다듬어 주셨지.”

사제로 지내는 지금도 가끔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매달린 그분만큼 힘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하지 말고 항상 이렇게 말씀드리며 하루를 마감합시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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