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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2/ 제19회 등에 소동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1 조회수683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안녕하십니까?

예, 오늘은 탈출기 8장 12절 모기에 관한 셋째 재앙 모기들이 등장하는 재앙부터

시작해서 함께 탈출기를 읽어 나갔으면 합니다.

 

  

 

탈출 8,12-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뻗어 땅의 먼지를 쳐서, 그것을 이집트 온 땅에서 모기로

변하게 하라고 말하여라." 그들은 그대로 하였다. 아론이 지팡이를 든 손을 뻗어 땅의

먼지를 치자,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이집트 온 나라에서 땅의

먼지가 모기로 변하였다. 요술사들로 똑같이 자기네 마술로 모기들을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모기들이 계속해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달려들

었다. 요술사들이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예, 먼저 여러분들에게 지난 번에도 복사물을 나눠 드렸는데 같은 내용입니다만

약간 좀 새로 제가 좀 짜봤습니다. 앞에 있는 것 중에 조금 불필요한 것들은 빼내고

그 그다음에 오늘 강의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첨가를 해서 앞뒷면으로 나누어

드렸는데 조금 이상한게 열 가지 재앙인데 9번까지 있고 0 번이 있지요?

 

 

 

맨 처음에 큰 뱀, 지팡이를 던져서 큰 뱀이 되었다는 고 내용을 0 번째 재앙으로 하고

  

 

 그 다음에 10번째 재앙, 맏이들의 재앙, 맏배와 맏아들에 관한 그와 같은 재앙에

관해서는 조금 특별하기 때문에 그거는 표에서 제외했고

  

 

그 다음에 11번째까지 우리가 얘기할 수 있다면 갈대 바다를 건너는 사건까지 갈대

바다에서 이집트인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는 사건까지 합쳐서 그렇게 본다면은

10가지 재앙이 있고 0번째 재앙, 11번째 재앙이 있으니까 재앙을 모두 합치면 몇개가

될까요? 12개가 있다는 그런 어떤 생각으로 우리가 이런 재앙 이야기를 볼 수도 있습

니다.

 

따라서 재앙 이야기를 보는 방법에는 그런 12개를 보는 방법, 또는 0번째와 11번째를

제하고 9개를 보는데 아홉 개가 세 개씩, 세 개씩, 세 개씩 한 싸이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방법. 그리고 인제 우리가 다르게 보는 방법에 관해서는 텍스트를 보면서 얘기할

텐데 오늘 강의 하면서는 계속해서 이 표를 조금 이렇게 요약해가지고 표를 자꾸 사용

하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텍스트를 열심히 하셔도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비교하면서 보시는데는

조금 훈련이 안 돼 있을 거 같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스스로 훈련시키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 강의 약간은 좀 머리가 뻣뻣해지고 쥐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이렇게 참을성

있게 표를 사용하시면서 텍스트를, 각각의 재앙들을 다른 재앙들과 비교하면서 한번 읽어

보시는 그런 훈련이 됐으면, 그런 어떤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이와 같은 훈련은 언제가 되면 굉장히 유용하냐하면은 역사서로 넘어가면은

이런 비슷한 텍스트들이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텍스트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열왕기 전.후서는 역대기 전.후서와 같은 역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역사의 이야기를 다르게 적고 있어요. 또 그러한 역사의 내용들이

예레미아서나 이사야서에 또 반복되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이야기들을 조금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 마카베오 상.하권은 상.하권이라고 하지마는

그 연속된 역사가 아니라 같은 역사를 마카베오 상권과 마카베오 하권이 조금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공관 복음이라는 게 있지요?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카 복음

그런 공관 복음들이 있는데 그걸 따로 읽다보니까 항상 헷갈려요. 그래서 제가 작년에

강의할 때 그런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처음으로 온 사람이

누구냐? 동방박사냐? 아니면은 목동이냐?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머리 속으로 생각을 하세요. 누가 먼저 왔을까?
그런데 이렇게 텍스트를 비교해 놓고 보면은 그냥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동방박사는 마태오 복음에서 왔고 목동은 루카 복음에서 왔다.

이 둘이 어떤 한 복음에서 순서적으로 온 것은 아니다. 뭐 그런 것들을

텍스트를 비교하면서 읽었을 때 우리가 조금 더 분명하게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탈출기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재앙 이야기를 비교합니다마는 각각 재앙 이야기

안에서 그 재앙 이야기를 적는 그 관심이 처음에 재앙 두 번째 재앙 이야기 할 때는

어디에 있다가 나중으로 갈 수록 어디로 옮겨지는가? 라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트 전체를 일관해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표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습니까? 텍스트를 읽읍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뻗어 땅의 먼지를 쳐서,

그것을 이집트 온 땅에서 모기로 변하게 하라고 말하여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저는 가끔씩 이렇게 하느님 창조의 뜻과 신비를 생각하면서

참 이렇게 세상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특히 산에 올라가서 보면은 그런

생각 자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정말로 오늘날까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하느님께서 왜 모기를 창조하셨을까?^^*~~~

 

피 빠는 거는 그냥 저는 상관 없는데 이 앵앵거리는 소리 때문에 저는 약간 좀 잠잘

불면증 비슷한 게 있는데 밤에 자다가 그 앵앵거리는 소리에 깨면은 하느님을 조금

원망할 때도 있어요. 아무튼 모기에 관한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기

인지 뭔지는 잘 모르는데 이게 잘 모르다보니까 우리 말 성경에서도 또 외국 성경에

서도 일반적으로 모기로 번역을 합니다.

 

자, 셋째 재앙.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셔서 아론이 지팡이를 가지고 이렇게

치니까 그냥 땅의 먼지가 모기가 됩니다. 따라서 앞의 두 재앙이랑 어떤 점이 다르지요?

여러분들 표를 보십시오.

 

 

 

1번 피, 2번 개구리 뭐 이렇게 쭉 나오는데 3번 모기들에 관해서는 1,2 번에는 뭔가가

있는데 3번에서는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이 비어 있지요? 그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은

미리 파라오에게 가서 모세에게 경고하라고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이런 셋째 재앙 모기들에 관한 재앙에서는 그 경고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겁니다. 경고하지 않고 곧장 재앙으로 들어갑니다.

 

이야기의 논리를 따르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경고가 있었는데 파라오가 듣지

않지요? 그리고 두 번째 재앙에서는 심지어 이스라엘이 광야로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요? 그러니까

세 번째에서는 아마도 적어도 작은 흐름 안에서만 본다면은 인제는 경고 없이

바로 그런 재앙으로 들어가는 틀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 아론의 역활이 여기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아론과 지팡이. 그런데 셋째 재앙

까지만 등장합니다. 이 이후에도 아론도 등장하고 지팡이도 등장합니다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에서 여기까지 계속 등장하는 아론과 그의 지팡이의 비중은

이 이후에는 조금 약해집니다.  다음 번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 지팡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9장 23절에 보면은 모세가 지팡이를 하늘로 뻗자

야훼가 우박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0장 13절에 보면은 모세가 이집트

땅 위로 지팡이를 뻗자 야훼가 메뚜기 떼를 몰고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4장 16절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뻗으면서 바다를 가르는 이런 장면에서만 지팡이가

언급 될 뿐 이 이후에서는 지팡이가 굉장히 간단히 등장하는 그와 같은 빈도수를

보게 됩니다.

 

이 세 번째 재앙은 모기들이 일으키는 재앙인데요. 그 모기들을 히브리 말로 '키님'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모기들이라고 번역한 '키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70인 역에서는 이거를 뭐라고 불렀냐하면은 '스크닙스'라는

그리스 말로 불렀는데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말로 따지자면은 작은 날벌레

같은 겁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영어에서는 뭐라고 번역했냐하면 small fly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작은 날벌레 같은 것.

 

예, 그 모기들이 앞선 개구리들은 강에서 올라 왔습니다마는 여기서는 땅의 먼지가

변해서 모기가 됩니다. 이거 꼭 무슨 마술하는 것처럼 이렇게 변하게 되요. 비슷한

일들이 앞서서 창세기에서도 일어났습니까? 먼지가 변해서 뭔가가 됐습니까?
예, 먼지가 변해서 사람이 됐었지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자면은,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직역하자면은, "그때에 야훼 엘로힘이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따라서

사람도 본래는 먼지였다라는 그런 이야기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창세기 18장 2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어떤 대목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예,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50명의 의인만 있다면

그러면서 점점 깍아 내려가죠. 45명만 있다면, 40명만 있다면 뭐 그렇게 점점점점

깍아 내려가는. 그런데 자기를 굉장히 낮춥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창세 18,27)

 

이렇게 보면 우리들이 재의 수요일날 머리에 재를 쓰는 의미도 어떤 의미입니까?
한편으로는 나를 좀 지저분하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어떤 나는 좀 불결합니다.

그런 지저분하게 하는 표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재를 발라 주면서 사제들이

여러분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해라!" 우리도 한점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어떻게 보면은 하느님의 굉장히 창조주적인 그런 능력을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겁니다. 먼지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시고 또 먼지를 가지고 모기를 그렇게

만드는. 반면에 먼제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표현에도 쓰입니다.

창세기 13,16; 28,14에 보면 "땅의 먼지처럼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

 

* 창세 13,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창세 28,14: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

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후손의 수가 많겠다라는 거는 앞서 우리가 기억하는 걸로는 어떤 표현이

있었지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땅의 먼지처럼. 따라서 어떻게 다

비유가 되는 겁니까? 하늘, 땅, 바다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 안에서

가장 많은 것처럼 그렇게 너희의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

 

저도 한번 혼배 때, 이런 강론 때 한번 이런 축복을 할려구 그래요. "하늘의 먼지처럼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 ^^*~~~ 신랑 신부가 기가 막힐꺼예요. 사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하라구 그러십니까? 하지만 과거에는 달랐습니다. 자손이 많은 것이 축복이었고

그런면에서 약간 좀 인간의 어떤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있어요.

 

과거에는 왜 자손이 많은 게 축복이었을까요? 자손이 곧 노동력입니다. 노동하면서

살았던 시기이니까 나에게 도움이 됐었습니다. 아이들이 많은 게. 그런데 요즘은

자손이 노동력이 아니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나로부터 뭘 뺏어가지요?

그리고 자손이 많으면 내가 자꾸 무슨 일을 해야 되지요? 나중에 시집살이 두 번씩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식 많이 낳았던 것은 인간의 어떤 이기적인 마음을 우리가

그 안에서도 볼 수 있을 거 같애요.

 

예,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땅의 먼지 그러면서 어떤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는 그와

같은 표현인데 여기서는 이집트의 재앙, 먼지를 가지고 모기를 만드시는 그런 어떤

창조주의 주권을 갖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의 한 단편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예, 13절 텍스트가 인제 관심이 조금 이동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지요?


"그들은 그대로 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요? 모세와 아론이겠지요?

"아론이 지팡이를 든 손을 뻗어 땅의 먼지를 치자." 여기까지는 아론이 등장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이 야훼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모기들이 사람과 짐승들에게 달려듭니다.

 

그 재앙의 고통스러움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문학적인 과장이 사용되는데 8장 13절이

우리 성경에서는 "이집트의 온 나라에서 땅의 먼지가 모기로 변하였다." 여기서는

저자가 얘기하고 싶은 그 뉘앙스를 조금 지나쳤습니다.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땅의 모든(!) 먼지가 이집트의 모든(!) 땅에서 모기들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좀 끔찍하죠? 여기서는 조금 일반 성경보다 뉘앙스를 살리면은  모든, 모든

이런 것들이 계속 반복해서 쓰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재앙이 갖고 있는 그런 어떤

무서움, 공포스러움을 조금 가중시키는 그런 표현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자, 14절 다시 한번 요술사들이 등장을 합니다. 앞선 대목에서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

요술사들은 요셉 이야기에서도 등장했었지요? 요술사들은 요셉 이야기에서 어떤

대목에서 등장했는지 기억나십니까?

 

파라오가 꿈을 꿨는데 그 꿈을 해몽해 줘야 되는 그러면서 우리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것들이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도 성경에서는 그걸 딱 집어서 얘기하지 않지만

요술사라는 고 말이 아마도 이집트어와 연관성이 있다면은 그것을 약간 좀 음성학적

으로 추정해 본다면은 아마도 이집트의 사제들이 이런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뭐 그와 같은 역활도 하면서 또 어떤 현명한 사람으로서 파라오의

꿈도 해몽해 주면서 또 이런 남들이 하지 못하는 조금 초자연적인 일도 하면서 뭐 이런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좀 능력자들인 거지요. 그런데 그들이 모세와 아론이 그렇

게 하니까 자기들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됩니까? 안 됩니다. 이게 좀 이상한

게 있어요.  14절입니다.

 

"요술사들도 똑같이 자기네 마술로 모기들을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정말 능력자들이라면 모기를 더 만들어야 됩니까? 아니면 나온 모기를 없애야

됩니까? 없애야 되는데 자기들도 만들려고 해요. ^^*~~~

 

누가 내 친구를 한대 펑 쳤는데 그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누가 더 아픈지 보자고 또

때리는 거예요. 이건 좀 이상해요.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좀 자신의 어떤 국민들,

백성들을 아끼는 그런 사제들이고 요술사들이라면은 자기의 능력을 막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때는 모기를 없애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오히려 모기를 더 만들려고 하는데 그게 되지가 않습니다.

 

예, 이때부터 처음에 이집트의 요술사들은 나일 강 물을 퍼다가 피로 만드는 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뱀으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개구리들을 그렇게 땅으로

올라오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부탁을 하지요? 여기서부터는 안 되는 겁니다.

 

요술사의 능력이 처음에는 비등비등 하다가 물론 처음에 뭐 아론의 지팡이로 만들어진

큰 뱀이 요술사들이 만든 뱀을 잡아 먹고 뭐 이런 건 있습니다마는 점점점점 능력이

떨어집니다. 나중에 심지어 어떻게 됩니까? 예습하신 분들.

 

종기가 등장하는 기적에서는 요술사들까지 종기가 옮아 가지고 모세 앞에서 제대로

수가 없었다라는 그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비슷비슷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모세와 아론 또는 야훼의 그런 재앙에 그 능력과 요술사들의 능력이

점점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예 15절입니다.

 

이제 요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 요술사들이 누구를 인정하는 겁니까? 예, 이 재앙은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정확히 표현하자면은 "엘로힘의 손가락"이고 여기서 하느님이라고 얘기하면은 우리는

그냥 하느님을 직접 생각하는데 여기서 요술사들이 파라오에게 말한 그 의미는 이거는

인간의 능력이 한 것이 아니라 신의 손가락이 한 일입니다. 신의 능력으로 한 일입니다.

어느 신인지는 모르겠지마는 신의 능력입니다라는 그런 어감으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이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들 중에 혹시 지금 나온 주석 성경을 갖고

계신 분들은 주석 성경에 보면은 거기에서 "이것은 이 도구 아론의 지팡이를 가리킨다."

라고 주석 성경은 이 부분을 보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모기들'인

것 같습니다. 모기들이 복수이기는 하지마는 단수로 쓰일 수도 있는 그런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것은 "엘로힘의 손가락이 한 일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알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주석가들은 각각 다른 의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주석 성경은 제가 알고 있기에 블란서 쪽에 그런 주석서들을 여기 좀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아마 그것을 쓴 분은 누군지는 확실히 모르겠고 아론의 지팡이라고 그 부분을

해석한 거 같습니다.

 

예, 파라오는 사실상 이미 둘째 재앙인 개구리를 없애 달라는 부탁을 통해서 야훼의

어떤 존재를 인정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요술사들까지. 따라서 요술사

들과 함께 이집트인들까자 아. 야훼라는 히브리인들의 신이 정말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으로 전체적인 사고의 체계가 야훼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퍼져나가는, 성공해 가는 그와 같은 틀로서 우리가 이야기의 전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파라오의 심장은 완고해져. "그러나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은

"파라오의 심장이 강해졌다."는 겁니다. strong 해졌다는 겁니다. 강해져서 그들의 말을,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라고 탈출기의

저자는 마지막 부분을 해석합니다.

 

사실은 따라서 누가 이미 예상한 겁니까? 야훼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리 말로 따진다면 전지전능(全知全能) 중에서 전지(全知)에 해당

하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라는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자, 조금 더 깊이 있게 텍스트를 보자면은 앞서서 말씀드린 '킷님' 모기들을 얘기하는

킷님이라는 히브리 말 단어는 그 어원에서 보변은 뭔가를 판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살을 파고 피를 빠는 그런 흡혈의 의미가 그 안에 조금 있는 거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벼룩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계속해서 신문에 뭘 얘기하지요? '진드기' 뭐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뭐

그런 해충이라면은 어떤 것이라도 사실은 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대표적으로 피를

빠는 것들이 이제 모기다보니까 또 이렇게 먼지가 뭔가 변했다고 그러니까 날아다니는

그런 것들로 생각하면서 현대어 번역들은 대부분 모기로 번역하는 그와 같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거를 어떤 주석가들은 자연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요 모기 소동 앞에 뭐가 있었지요?

개구리들의 문제가 있었지요? 그런데 개구리들은 모세가 기도해서 다 어떻게 했습니까?
개구리들이 죽어서 이렇게 산처럼 쌓여 있었지요? 그런 시체들 앞에 있는 재앙과 뒤에

있는 재앙을 묶어 가지고 앞서서도 어떤 얘기를 했지요?

 

물이 피로 변하니까 개구리들이 물에서 올라왔고 그 개구리들이 죽어서 다시 거기서

모기가 생겼고 뭐 이런 식으로 앞선 재앙과 연결해서 논리적으로 연결 구조 안에서

설명할려는 주석가들도 있는데 텍스트 안에서는 그와 같은 것들을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텍스트 안에서는 각각의 재앙들을 독립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고 저희는

그거를 존중해야 할 그런 어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 땅의 먼지들로부터 모기들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제가 인터넷을 그림을 막 찾다가

결국 못 찾아서. 조금 에로틱한 그림인데 ^^*~~~ 뭐 아무튼 그 이집트의 신화입니다.

 

  

 

이집트에서는 하늘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하늘을 관장하는 신은 Nut 이고 땅을 관장

하는 신은 Geb 입니다. 그런데 땅의 먼지들을 쳐서 먼지들이 그 모기가 되는 거를 보니

까 여기서는 어떤 신과 관련이 있을까요? Geb이라는 신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 땅을 관장하는 신이 이집트인들을 보호해야 될. 이집트인들이 그 신을 섬기니까

보호해야 될 책임이 있는데도 아론의 지팡이가 땅을 치니까 땅의 먼지들이 모기가

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이 이집트의 땅의 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등장하는 그런

어떤 해석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보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예, 이집트에 관한 기록들을 보자면은 특히 역사가 중에 한 명이지요? 헤로도투스와

같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보면, 이집트의 사제들은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몸의 털을 밀고. 몸의 털을 다

면도를 했다고 그래요. 밀고, 해가 있는 동안 두번 그리고 해가 없는 동안 두번 찬물로

목욕을 하고 그리고 아마포로 만들어진 하얗고 긴 옷을 입었어야만 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몸의 털을 다 밀고 낮 동안 두번 저녁에도 두번 목욕을 하고.

땀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이게 어떤 사제로서의 정결함의 그런 하나의 외적 표현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모기들 그런 것들이 이집트의 만약 사제들까지 공격했다면은

사제들은 제사를 드리기 굉장히 어려운, 제사를 드리기 힘든 그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라는 그런 어떤 주석가들의 그런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약간 좀 이런 해석은 좀 오버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하여튼 이렇게 이집트의 본래의

풍습 내지는 문화적인 상황과 성경 텍스트를 연결해서 해석할려는 학자들의 주석적인

경향에 관해서 그냥 언급만 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8장 15절에서 나오는 "엘로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

탈출기 31장 18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증언판에 관해서.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이렇게

쓰는. 뭔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쓰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탈출 31,18: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

 

이거는 굉장히 어떤 그 뭐라고 그럴까요? 자상함의 표현입니다.

뭔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나를 부드럽게 만지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해 주는

증언판의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단지 이거는 첫 번째 증언판입니다.

그 첫 번째 증언판이 깨지고 두 번째 증언판을 가지러 모세가 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그 대목에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그런 자상함에 대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든지 아니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예, 또한 시편 8장 4절을 보면은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 이라고 표현하면서

천체에 있는 그 달과 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그런 달과 별을

만드셨다라는 어떤  하느님의 그런 어떤 창조적인, 하느님이 세상의 어떤 개입

하시는 그와 같은 내용들을 시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어떤 예찬이겠지요.

 

* 시편 8,4: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고 별들을

 

신약에서도 손가락은 등장합니다.

* 마태 23,4: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에 관한 얘기지요? 예,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뭐 그런 사람들. 굉장히 법적으로

어렵게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돕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건 사실은 요 마태오 복음 요 대목은 오늘의 교회가 조금 반성해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예를들어 오늘날 교회도 굉장히 윤리적으로 여러 가지로 신자들에게 엄격한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잖아요. 예를들어 무슨 중요한 교회의 그와 같은 입장에 관해서

우리들이 충분히 알아 듣고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예를들어 생명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라는 그런 의미에서 낙태에 관해서 굉장히

엄격하게 교회가 얘기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거는 제 생각에도 옳은 생각인 거 같습

니다. 하지만 정말로 낙태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

가 정말로 모를 해야지요? 뭐 작은 그런 것들이 있지마는 제가 보기에 충분하지 않

거 같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어떤 이유 때문에 낙태해야만 되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하여 생명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런 어떤 노력들 필요할 거 같애요. 만약 그런 걸 하지

않고 그냥 교회는 옳고 그름만 판단해 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라고

누군가가 생각한다면은 마태오 복음 23장 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비난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을 향해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마르코 복음 7장 33절: "당신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을 귀먹은 이의 두 귀에 넣고. 누가 넣었을까요? 예수님이 손가락을

귀에다 이렇게 넣고. 조금 이상해요. 또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침을 발라서 이렇게 하시는 ^^*~~~

 

제가 옛날에 성경에 관해서 질의 응답하는 계시판인가 홈페이지인가에서 "예수님은

왜 침을 바르셨을까요?" 라고 이렇게 물어 봤는데 저도 할말이 없드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밑에 대답으로 그냥 "그러게나 말입니다. " ^^*~~~ 쓸 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옛날 고대의 그런 치유자들이 치유하는 풍습으로는 침을 바르는 그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저도 어렸을 때 다치거나 그러면은 침 발랐던 아니면 어머니들이

아이들한테 침 발라 주는 그런 것들은 우리 한테도. 그리고 의학적으로도 약간

이렇게 좀 나쁜균들을 죽이는 그런 소독 작용은 조금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의학에 관해서는 무식하기 때문에 제가 틀렸으면 교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리고 또 루카 복음 11장 20절 :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어떤 대목인지 기억나십니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는데 뭐라고 고발하냐하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얘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에 관한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예, 요한 8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는 예수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어떤 내용이지요? 예,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이 여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뭐를 이렇게 쓰고

계셨는데 뭐를 쓰고 계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청년이 저한데 가르쳐 줬어요. 예수님이 저 때 땅에다 손가락으로 다음과

같이 쓰셨대요. "너나 잘하세요!"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예수님이

뭔가를 쓰시다가 사람들에게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뭐 그러다가 이 여인을

용서하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가서 더 이상 죄 짓지 마라 라고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는 대목.

 

모두 손가락이라는 이야기가 신구약을 걸쳐서 이와 같이 나오는데 따라서

뉘앙스는 어떤 뉘앙스들입니까? 하느님의 권능 중에서 큰 권능입니까?

작은 권능 입니까? 작은 권능입니다. 하지만 그런 작고 뭔가를 보살피는,

누군가를 돌보는  하지만 그 작은 권능으로도 상당히 커다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일을 하시는 그런 하느님의 두 가지 그런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표현을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전에부터도 계속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이런 표현에는 크게 세 가지 표현이 나오지요?

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손, 하느님의 팔. 하느님의 권능에 관한 가장 쎈 거는

뭘까요? 하느님의 팔입니다.

 

 

 

이제 네 번째 재앙으로 넘어갑니다. 등에 떼에 관한 그와 같은 재앙입니다.

16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라.

그가 물가로 나오면, 따라서 아침 그리고 물가입니다. 이 표를 보시면 첫 번째 재앙

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물가로 나갈 터이니, 나일 강 가에 있다가 그를

만나라." 앞선 해설을 기억하십니까? 파라오는 왜 아침에 물가로 가를 거를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목욕하러 가는 거는 아니고 아침에 물가로 가서 정치가로서,

왕으로서 당연히 어떤 치수를 한다는 의미에서 "어, 오늘을 나일 강의 상태가 어떤가?"

라는 것을 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는 두 번째로는 그런 종교적인 목적, 아침마다 물가로 가서 제사를 지내면서 어떤

풍요로움을 비는. 결국 이집트의 경제라는 것은 물에 달려 있기 때문에 풍요로움을

비는 그런 제사를 드리는. 또는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다 있는. 한편으로는 물을

살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아침에 물가로 나가는 그런 파라오의

모습을 해석할 수 있다라는 그와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여기 이렇게 먼저 물가로 가고 그리고 파라오에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예언자 같이 얘기하는 겁니다.

이거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야훼가 너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네가 나의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너와 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또 너의 궁궐로 등에 떼를 보내겠다."

 

우리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여기에는 언어의 유희가 있습니다.

니가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보내지 않으면 내가 등에 떼를 보내겠다.

파라오가 보내지 않으면 야훼가 보내겠다. 목적은 다릅니다. 파라오가 보내지 않는

거는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반대로 야훼가 보내는 것은 등에 떼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언어의 유희가 있습니다. 니가 보내지 않으면 나는 보내겠다라를

그와 같은 언어의 유희입니다.

 

자, 여기서 말하는 등에는 히브리 말로 아롭(arow)이라고 하는데 이게 단수로 쓰여도

복수처럼 사용되는 그런 개념인 거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왜 단수 복수가 동일한 명사

같은 경우가 있지요. 예를들면 fish 이런 것들은 단수 복수가 동일하잖아요.

여기서도 등에 떼입니다. 따라서 단수로 등장하는 명사이지만 복수처럼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벌레인지는 모르겠는데 앞에 그리스 말 번역을 보자면은 이거는 앞에 있는

벌레보다 좀 큰 벌레입니다. 앞에 있는 게 smallfly 라면은 여기 있는 것들은

horsefly 그러니까 쇠등에. 서양 사람들은 말에 자꾸 얘기를 하는데 우리는 소에

이렇게 비유 하는 것 같습니다. 쇠등에.

 

그런데 제가 쇠등에를 직접 본적이 없습니다. 쇠등에 큽니까? 엄지손가락만 합니까?

제가 빈대도 본적이 없어가지고. ^^*~~~ 크기로 보면은 손가락만 합니까?

아, 손가락보다는 작아요? 그럼 파리만합니까? 쇠파리보다 커요? 쇠파리보다 크고

손가락보다는 작은 ^^*~~~ 예, 아무튼 그것도 피를 빨아먹는 그와 같은 해충인

모양입니다.  시골에 살아본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보기도 합니다. 앞서 그 셋째 재앙

에서는 모기떼 같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다른 곤충들이 합류한 게 아니냐? 그래서

여러 가지 곤충들 하지만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그런 해충들의 조합 아니냐?라고

이런 '아롭(arow)'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석가들이 안다는 이야기입니까? 모른다는 이야기입니까?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인지. 구약 성경의 무슨 곤충도감 이런 게 하나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게 없다보니까 단어는 등장하는데 실지로 어떤 것인지를 좀 알기 어려운 그와

같은 그런 처지인 것 같습니다.

 

자, 그 다음에 그 등에 떼들이 재미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집과 그들이 사는 땅이

등에로 가득할 것이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이 앞에까지는 집이라는

단어가 항상 단수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복수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재앙도 이제 점점 더 그 재앙의 강도가 더해지는 것을 이런 표현들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 18절로 넘어가서, "그러나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사는 고센 땅만은 구분하여"라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고센 땅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구요.

여기서 중요한 거는 '구분하다'라는 겁니다.

 

탈출기에서 몇번 등장하고 시편에서도 몇번 등장하는데 여기서 '구분하다'라는 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좀 더 특별히 선택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 분명합니다.

 

* 탈출 8,18: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사는 고센 땅만을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는

등에가 없게 하겠다. 이는 나 주님이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 탈출 9,4: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의 집짐승과 이집트의 집짐승을 구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것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할 것이다 .

 

* 탈출 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개조차 짖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그러할 것이다. 이는 주님이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였음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탈출 33,16: 이제 저와 당신 백성이 당신 눈에 들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만 저와 당신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주민과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거는 인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가서 이제 새로운 길을 떠나는

장면인데 야훼 하느님이 "나는 안 간다. 니들끼리만 가라!" 그랬을 때 모세가 좀 항의

하는 아니면 하느님께 청원하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같이 가셔야지 그래야지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저와 당신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주민들과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 따라서 '구분한다'라는 것은 선택의 의미이고 보호하는 의미로 일관성 있게

쓰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시편으로 넘어가면 아예 같은 동사로 쓰였는데 번역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거는 틀린 번역이 아닙니다.

 

*시편 4,4: 주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기적을 베푸심을 알아라.

                내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는 들어 주신다.

 

같은 동사입니다. 따라서 같은 뜻으로 그냥 직역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를 구분한다는 것을 알아라."라는 뜻인데

어떤 구분이냐? 특별한 일들을 보여 주신다는 겁니다. 내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는 들어 주신다. 그와 나는 보통 관계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 시편 17,7: 당신 자애의 기적을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시는 분이시여!

 

우리 시편에서는, 우리 말 성경에서는, 우리 말뿐만 아니라 외국어 성경들도

다 저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따라서 '구분한다'라는 것은 특별하게 대한다.

어느 정도로? 그런 기적을 보여 줄 정도로 특별하게 대한다라는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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