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으로의 초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2 조회수954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28주일


<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복음: 루카 17,11-19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 행복으로의 초대 >

         

제가 어렸을 때 저나 저희 집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왔고, 유치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개구리잡고 물놀이하며 지냈습니다. 불편한 것도 없었고 있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이미 유치원을 나와 글을 쓸 줄 알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는 우리 동네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보아야 행복할 것 같았고, 전깃불이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몇의 아이들은 우유를 먹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서 그것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자 삶은 더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함께 개구리 잡던 친구들이 공부에서는 경쟁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2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컬러 TV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좋아하셨습니다. 전기밥솥과 세탁기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전기밥솥에서 저절로 밥이 되는 것을 온 가족이 둘러보며 환희에 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아주아주 조금밖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 나올 때였는데, 그것으로 게임을 하는 얼마 안 되는 부러운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가니 이 시골에 살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구리 잡던 소년이 그들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겨울 잠바가 없어 어머니 잠바만 입고 다녔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과외를 받아 벌써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수학과 영어를 다 배우고 들어온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공부도 나름대로 노력해보았지만 3시간을 통학해야 하는 저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에 학력고사 보기 두 달 동안은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버텨야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더 대단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쟁쟁한 부모님들을 둔 아이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점심 값도 내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게 되겠고, 결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도 낳아 다른 아이들처럼 키워야하고 ... 결국 이 세상 속에서 만족이라는 단어를 나의 것으로 삼고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조금 더 많이 가지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의 경험으로 본다면, 아니 모두가 그럴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더 편하고 더 발전하고 더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갈수록 덜 행복해지게 됩니다.

저도 귀가 한 쪽이 잘 들리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귀가 잘 들리는 것에 대한 감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이명까지 나게 되자 두 귀가 다 그렇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귀라도 잘 들리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쓰게 된 계기가 작은 화분 하나 선물 받아서 그 마음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져서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지선씨가 화재로 인해 자신의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도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이유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행복을 알기에, 가지게 되면서 더 가지고 싶어지는 부족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마존의 눈물에 나온 부족들은 사냥을 해도 그날 먹을 것만을 잡습니다. 저장하기도 그렇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인이나 도둑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물질문명에 물들게 된다면 이제 행복은 깨어지고 범죄가 들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먹혀버린 불쌍한 부족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그들이 도시의 빈민촌을 형성하고 집에서 화려한 삶만 나오는 TV를 보지만 실제 삶은 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사가 곧 믿음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고, 구원은 감사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믿어야 감사가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고백에서 그 해답을 있을 것입니다.

 

Nada te turbe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말라

nada te espante 무엇에든 걱정하지 말라

todo se pasa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나

Dios no se muda 하느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나니

 

La paciencia 인내함으로

todo lo alcanza 모든 것에 이르라

Quien a Dios tiene 하느님을 지닌 자

nada le falta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Solo Dios basta” 오직 하느님으로 만족하리로다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란 바로 “Solo Dios basta”, 즉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음을 아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돌아오지 않은 9명은 세상으로 나간 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왜 같은 것을 얻어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조 때 유한준이라는 문인이 석농 김광국 수장품에 붙였다고 하는데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써서 유명해진 글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온 세상이 변하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는 세상도 어두워지고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정말 희한한 일인데, 사람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영향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상을 돈으로 보고, 쾌락을 받아들인 사람은 쾌락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또 다른 세상에 살게 됩니다.

 

우리 첫 조상은 뱀을 바라보았습니다. 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뱀이 만든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뱀은 자아를 상징하고 그 자아는 불만족입니다. 불만족스럽게 만들어 세상을 향해 손을 뻗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불만족은 갈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 사셨습니다. 만족하셨기에 세상 어떤 것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어주셨습니다. 봉헌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1요한 3,6)

 

 

 

두 세계의 차이점은 여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여인이 일어나 메시아를 잉태하고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소리 지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즉 외적으로 당신을 낳으셨다고 보는 것은 뱀의 세계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복한 것은 내적인 하느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행복을 찾되 내적인 세계,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얻게 되는 양심의 자유와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뱀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와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다면 선악과에 손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믿었기에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함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 박사의 환자 중에 루시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는데 갑자가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부에 대한 사랑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언니가 병으로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언니의 시신 곁에 서 있는 형부를 보며 속으로 이제 형부는 자유인이야. 나와 결혼할 수도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다리가 감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마비가 시작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마비와 형부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프로이트 박사가 루시의 숨겨진 마음 즉, 형부에 대한 사랑과 언니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의식 아래 숨어 있던 감정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는 극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이런 환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마음의 지하실을 비의식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병과 마음의 문제들이 여기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출처: 이무석, 친밀함, 13]

 

프로이트는 비의식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저는 비의식에 있는 양심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하느님 뜻에 맞으면 기쁨을, 그것에 맞지 않으면 고통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벌을 받기 전에 이미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고, 가리고, 서로를 탓하였습니다. 이는 그 내면의 양심이 이미 그들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가지거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에 어긋나게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거나 자신의 뜻대로 살거나에 달렸습니다. 당신을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겠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참 행복의 원천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즉 당신을 낳으셨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모님도 행복하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하느님 뜻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하느님 뜻을 따라 행복하여 마니피캇을 노래하셨던 성모님을 본받아, 세상 것에 가난하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그분 뜻에서만 행복을 찾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