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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가톨릭 대학 인본주의 국제포럼 : 푸르른 자연 속에서 노닐며. . .
작성자유웅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3 조회수308 추천수1 반대(0) 신고

가톨릭 대학 인본주의 국제포럼

 

생명 : 존재의 시작

  

제목 : 푸르른 자연 속에서 노닐며. . . . .  

            

(낙천주의적으로 사신 아버님 베르나르도 옹을 그리워하면서. . . )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이 찬란한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놀랍고도 정교한 아름다움과 포용력을 보여줬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며 놀이터이자 삶의 정원으로서

우리가 친근감을 느끼는 동시에 가꾸고 보호해야 할 곳입니다.

 

1) 과학과 신앙에 대하여. . . .

 

과학적 연구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두 분야 간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어 결국 과학과 신앙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실제로 교회 안에서 과학에 대해 논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고

물리학 연구실에서 신앙을 거론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앙과 과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즉 신도들은 신앙의 신비로움과 자신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서로 섞일 수 없는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피조성과 우주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며 과학적 결론에 기인한 것은 아닙니다.

 

2) 창조는 하느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지혜13,5)

 

창조는 어떤 예술감각을 동원한 계획의 결과도, 어떤 예술감각을 동원한

계획의 결과도, 어떤 행위에 의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물도

아닙니다.

 

창조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성을 인정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느님의 계시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도들은 다양한 문화와 철학에서 제시하는 서로 상충된

견해에 부딪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하느님은 또한 초원적 존재로서 세상의 사물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즉, 하느님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의지로 만물과 그 진행과정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우리들의 삶과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생명 : 존재의 시작)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창조물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며 원래 주어진 찬란한 아름다움을 복구하고

그 염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자유와 수용의 정신과도 같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과 세상을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놓고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영원한 사랑과 영성으로서, 사랑의 위대한 역사에셔 인간의 역사의 영성을 구현할

것이다. 이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드라마이며 하느님의 그

미래입니다.

 

우리는 박물관 지기로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의 정원을 가꿀 의무가 있다.

(요한XXIII)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작업에 우리도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계시가 우리가 해야할 역할의 당위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 하느님, 세상, 그 자신과의 관계로 규정됩니다.

관계의 존재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의지가 직접 드러난 피조물로서 창조물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독특한 존재입니다.(창세1,26-2,20 시편8,6-7 지혜9,2-3)

 

자연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를 분담함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재구성하는데 한 몫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물리적인 세상을 관리할 의무를 지닌다.

하느님의 섭리와 창조물의 신성함을 인지하면서 인류는 자연의 질서를 조정하고

세상의 진화를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지식을 관리함에 있어서 신학자들은 현대 과학에 대한 이해를

그리스트교의 관점에서 조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4) 인간의 삶

 

인간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자연환경 경시의 자세에서 벗어나서

피조물을 개발하고 관리해야하며 관리의 역량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세상을 관리하는 상황에 대해 하느님께 동의를 구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하느님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자연에 내재하면서

이를 치유하고 변화하는 보이지 않는 자비를 통해서 구현됩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며 온전한 것을

허(許)하고 승격시킵니다.

 

우주라는 정원 속에서 인간은 증인으로서, 보고자로서, 전달자로서,

정원사로서, 보육자로서, 대표로서, 치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세상은 신의 장엄함으로 충만해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소진되지 않는다.

사물들 속에 깊이 아주 소중한 신선함이 살아 있으므로

성령이 굽은 세상 위를 따스한 가슴과 아! 빛나는 날개로 품고 있다."

(Gerard Manley Hopkins)

 

5) 낙천주의적인 삶과 긍정의 힘

 

우리는 "성령이여, 오소서. 세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세상을 밝혀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성체 성사 중에 우리는 끊임없이 오시는 하느님을 접합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살아계신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 앵커 톰 브로커가 언급한 바 있는 "위대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심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특히 무자비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속에서 죽음의 문화의

징후를 일찍이 인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삶의 기쁨,

정체성, 열정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며

생명의 문화를 가꾸려 노력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지니셨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성체의 전례의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6) 인간의 죽음은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께서

새로운 보금자리인 천국의 푸르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언젠가 함께할 날을 그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도,

거기 가득한 것들도 다 함께 환성을 올려라.

들도, 거기 사는 것도 다 함께 기뻐 뛰어라.

숲의 나무들도 환성을 오려라.

 

야훼께서 세상을 다스리러 오셨다.

그 앞에서 즐겁게 외쳐라. 그는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시편96,11-13)

 

 

 

           아버지 이 원 길 베르나르도 옹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다섯째 아들, 바오로 이 덕효 신부

 

참고사항 : 내용은 이 덕효 바오로 신부님의 쓰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의 제목은 내가 읽은 소감을 소제목으로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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