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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13년10월2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8 조회수494 추천수5 반대(0) 신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13년 10월 20일

마태 28, 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이 이제부터 하늘을 위해서나,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향한 결정적 길이라는 선포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면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가르치겠다는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의 결의도 담겨 있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유럽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한 사회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신앙 사회가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교역을 위한 상선(商船)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백인이라는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은 그들에게 만고(萬古)의 진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미신(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유색인종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시혜(施惠)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우월감과 권위주의의 잔재(殘滓)를 확인합니다.

 

그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식민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것이 원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퇴색하면서, 유럽 교회는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정신문화에 있어서 아시아는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중세의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떼 같다”(마르 6,34)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가 하느님이 버렸다고 믿던 죄인들과도 예수님은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집단의 옹졸하고 배타적인 집단이기주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신앙인이 하는 선교는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고, 보살핌의 실천으로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있습니다.

 

어느 종교 혹은 어느 교파에 속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깊이 생각하여 결단할 일입니다. 가두(街頭)에서 사람들에게 보험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으로 사람을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섬김의 실천, 곧 보살핌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화는 교세확장이나 신자배가(信者倍加)운동과 같은 단어로 표현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업이 기업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세확장하고, 제품 판매 배가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배워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해 과연 사랑과 섬김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신앙인인 우리가 보살핌을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정 지역의 주민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정부가 하는 시책(施策)에 맞서서 시위하고, 선동하며, 그것이 신앙인의 사명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일인 양 착각하지 않는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정부의 시책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말에는 그 시책과 관련된 전문성이 있어야 하고, 그 전문성에 입각하여 그 시책의 결정권자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는 자세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 안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그것이 실종하면, 비난하고 폭력에 호소하는 정치적 편법만 남을 것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마태 5,13)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강자가 승리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배려와 보살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동물에서 진화하여 인류가 출현하는 데에는 배려와 보살핌 현상이 결정적이었다는 최근 어느 과학자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화과정에 인류가 발생하는 단계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으면서 그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신앙공동체는 이웃을 위한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화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내세를 위한 보험회사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섬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배워,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하면서 그것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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