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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6강(사르디스 교회)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22 조회수774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6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4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요한 묵시록 잘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 계속 너무 오래 머무른다라고

생각하는 분들 계실꺼예요. 아마 오늘 이제 마지막 시간입니다.

네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좀 바빠요. 세 개의 교회를 봐야 됩니다.

 

에페소 교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보다가 두개 보다가 지금 세개로

지금 빨라지는데 이렇게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 어떤 서간에 우리가

네 시간이나 이렇게 머무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주제들이 이제

요한 묵시록 4장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반복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기 서간문의 것만 확실하게 우리가 이해를 하면 뒤에

여러가지 장면, 묵시적인 장면이 나타나는 것 쉽게 이해가 빨리 됩니다.

이게 키 포인트죠.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이. 그래서 오늘을 세 개의

교회이기 때문에 좀 빨리 집중해서 좀 정신 바싹 차리셔서 그렇게 좀

우리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묵시 3,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예,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누구? 예수님.

자, 여기서는 많은 호칭 중에 일곱 별, 일곱 영. 예수님께서 일곱 영을

가지셨다는 것은, 일곱 별은 우리가 잘 알죠? 뭡니까?

1장에서 나왔습니다. 뭡니까? 별이? 천사들. 뭐의 천사들입니까? 교회.

다시 말해서 일곱 개 교회, 곧 모든 교회의 권한을 가진 예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자 모든 교회를 다스시시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죠.

 

*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예수님(하느님으로서 모든

   교회에 권한을 가진 이)

 

* 묵시 3,1: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자, 여기 매번 반복하는 "네가 한 일을 안다."는 것은 이 사르디스 교회

에서는 네가 한일 그것이 어떤 일인가?

 

* 묵시 3,1: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이 말씀과 한번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그 일은 안다라는 것이죠. 이 말이 왜 나왔는가? 우리 교회

를 싹 보면서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의 어떤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는 게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이 사르디스라는 곳이 페르시아 정복기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 거기에

정복기간에 완전히 황폐했던 도시였어요.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약간

좀 이렇게 재건을 해서 거기다가 이제 신전을 막 세웠죠. 그런데 서기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또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런데 티베리우스

황제가 또 도시를 재건하면서 황제를 위한 신전을 또 세웠죠.

 

그러니까 죽고, 살고, 죽고, 사는. 예, 죽음과 생명 이것에 대배되는 이

개념은 요한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사실은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마는

너는 죽은 것이다. 그것이 네가 한 일이다. 죽었다? 뭐가 죽었겠습니까?

죽었다. 살았다. 우리 신앙적인 얘기로 야고보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어떤 신앙이 죽은 신앙입니까? 행동 없는, 실천 없는 믿음.

너는 살아 있다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사실은 너는 죽은 것이다.

뭐가 없기 때문에? 행동이, 실천이 없기 때문에. 사르디스 교회에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실천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지금 죽음과 생명이라는 요한계 문헌의 어떤 대비되는 개념을 가지고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

 

* 묵시 3,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신약의 복음서에도 "깨어 있어라." 라는 말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깨어 있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메세지 안에서는 깨어 있다는 것은, 튼튼하게 있는 것은,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든다. 이 튼튼하게 만들다라는 동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테리조(sthrivzw/στηρίζω)' 라는 동사가 사용됐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튼튼하게 하다. 튼튼하게 한다면 세례는 어떤 의미입니까?

새롭게 태어나는 것.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내어나는 것. 그것이 튼튼

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들, 믿음에 실천이 없이 뭐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서 생명을 불어 넣어서

활기차게 뭔가 하도록 하여라라는 것이 튼튼하게 만들어라라는 것입니다.

 

* 튼튼하게 만들어라: 생명을 불어 넣어서 활기차게 뭔가 하도록 하여라.

 

* 묵시 3,2: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완전하다? 불완전하다? 라고 하면 내 일이 내가 만족할 만큼 뭔가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마시고요. 요것도 요한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완전하다는 말. 이 말마디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 완전하다(묵시 3,2):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들도 어떻게 하라고요?

하느님과 일치라라고요. 하느님 같이 닮으라고요.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완전해도 하느님과 똑같을 수는 없지요?

인간이 어떻게? 한계가 있을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완전

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

예, 그 어떤 법전,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무슨수로?

그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함의 방법, 우리가 완전해질 수

있는 방법 그거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가능한 거죠. 일치하라. 그래서

너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다시 표현하자면은 "너희들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지 않다고 본다. 나는. 요런 표현이죠?

 

* 묵시 3,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자, 요기서 보면 어떻게 받아 드리고 어떻게 들었는지 고것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자, 요기 동사가 우리 한국 말로 번역하면 잘 이러헤

눈에 확 안 들어오는데 요기 자세히 다시 보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 동사는 지속적인 시간 개념, 내가 지난 시간부터,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가르침인지 자꾸 되새기는 거죠. 되뇌이는 거죠. 내가 성당에 다니

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말씀을 들었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들었는지

계속 곱씹어 보고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요렇게 살펴보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고 그런데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

여라라고 그랬지요? 요 때 쓰임 동사는 일회적인, 지금 유일한, 이 순간에

바로 해야 하는 것으로 지속적이지 않다는 말이죠. 내 삶을 되돌아보고

내 지금 회개하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동사가 딱 구분이 됩니다.

 

*묵시 3,3: 살펴 보는 것(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

                회개 하는 것(지금 바로 해야 하는 것)

 

지속적인 동사, 일회적인 동사. 살펴보는 것는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거고. 회개하는 것은 지금 바로 해야 된다는 급박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은 앞에 문장과 연결해서

보자면,

 

* 회개: 튼튼하게 말들어라, 완전하게 되어라, 새로 태어나라,

           예수님과 일치하라.

 

* 묵시 3,3: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이거는 복음서에도 있죠? 하느님께서 언제 오시고 종말이 언제 오고?

도둑처럼 온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아까 제가 지속적

이라고 했지요? 도둑처럼 오니까 언제 올지 모르죠? 그때 확실한 그때를

몰라요. 모르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요? 계속 가르침을 되새기고

계속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가르침? 어떤 가르침? 무엇을 되새기겠습니까?

여러분 예컨대 신앙생활 하면서 무엇을 되새길까요? 하느님이 도둑처럼

오시는데 그걸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는데 무엇을 되새겨야 되겠습니까?

말씀? 어떤 거? 예컨대 뭐 토라? 율법? 성당에서 지키라는 거? 사랑?

봉사? 실천?

 

예, 여기서 쓰여져 있는 걸 보세요. 어떠한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 남아 있는 것들이라는 단어와 그 가르침을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는 어떻게 보면 그리스 말에는 남성이 있으면

중성이 있어요. 중성 복수가 있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중성이.

 

그러니까 이거는 무슨 의미냐하면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 이

모든 것이라는 이 개념을 가지고 요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 무엇을

지킬까? 말씀? 가르침? 뭐 이런 식으로 자꾸 어떤 신앙적인 것을 우리가

자꾸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끔씩 보면 한국 교회의 어떤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면 우리는

너무 신앙이라는 단어를 세상살이와는 별개의 어떠한 정신적 어떠한

수양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빠져버리느냐하면 그냥 마음의

수련, 그냥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 그러면 내 안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거 같다. 그렇게 성댱에서 묵상을 하고 성체 조배하고 나서, "아,

이제 나는 신앙이 가득찬 거 같애. 이거는 한쪽만의 신앙, 편협한 신앙

입니다. 이것도 분명 필요하고 좋은 것인데 아까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실천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과 우리 왜

무친다고 하죠? 파도 무치고 뭐도 무치고 하죠? 이게 버무려지지 않으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죠. 너무 이쪽으로만 치닫고 나가버리면

실제 삶이 빠져버린 그러한 어떤 신앙, 이거는 죽은 신앙이고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되새기고 또 그것을 지키고 무엇을 지켜야

될 지 개념이 그냥 성당에서 묵주만 돌리면 된다라는 개념에 빠지면 안

된다라는 것이죠.

 

내가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가는가? 굳이 사랑 실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라는 거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게 깨어 있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묵시 3,3: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는 계속해서 그런 충실한 삶. 제가 예전에 신앙이라는

단어를 설명해 드리면서 신앙은 타존재에 대해서 기대고 의지하는 것 그런

의미도 있지만 1차적인 의미는 삶의 충실성입니다. 견고함. 아까 튼튼하게

하다. 튼튼하게 만들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라고 세례의 의미와 연결

되지마는

 

* 내 삶이 새롭게 태어나려면은 내가 내 삶에 충실하고 늘 새롭게 바라보고

열심하려는 게 있어야 되겠죠. 그게 신앙이죠. 그게 깨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어떤 모습이다.

 

* 묵시 3,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자기 옷을 더럽힌다. 이 더럽히다라는 표현에는 우상 숭배에 빠져든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이 더럽히지 않는 사람?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

 

*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

 

* 묵시 3,4: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자, 흰옷? 우리 너무 잘 아는 흰옷? 구원, 영광, 기쁨, 하느님과 일치.

예수님과 함께 다닐 것이예요. 이거 친교죠?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묵시 3,4: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왜? 자기 옷을 어럽히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 묵시 3,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승리? 또 나오고, 자 여기 또 다른 주제 생명의 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교에 들어가다.

 

요  내 이름있죠? 이름을 올렸지 않습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어디 소속돼

있고 일치해 있다라는 의미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분과 일치해졌다는 거죠. 생명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느님. 그러니 하느님과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안 지우는 것이다. 거기에 적혀 있기 때문에.

 

* 묵시 3,5: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

   할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 복음서에 있지요? 누가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안다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르디스 교회.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우상 숭배 하지 않고 예수님 당신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알았다. 나도 아버지께 증언해 주겠다. 서로가 증인이

되죠. 증인이. 예, 이 보십시오. 주고 받고 일치하고 어떤 그런 모습들

그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 묵시 3,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기는 반복되는 것. 여러 교회 그 일곱 교회, 모든 교회,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사르디스에 보내는 메세지는

되게 간단하죠? 너무 빨리 왔는가요? 괜찬으셔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롭게 태어나서 나를 튼튼하게 하고 그리고 나를

완전하게 하고 이것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일치는 

단순히 내가 정신적으로 영성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 안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새롭게 완전하지도 않고 새롭게 태어

나지도 않고  튼튼하지도 않는 그냥 죽은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

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자, 우리 필라델피아 교회로 가 보겠습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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