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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최승정 신부님 성서백주간 2 제21회 종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26 조회수512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성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세요.

성경을 영성적으로 읽는다는 게 도대체 뭐냐? 영성이라는 거를 그냥 우리가

영어에서 소위 말하는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라고 얘기하는 건데요.

스피리추얼(spiritual) 하다는 거의 반대말은 그럼 뭘까요?

영성적이다의 반대말은?

 

그러니까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돼 있다면은 '영성적이다.'의 반대말은

육적인 것이다. 영적인 거는 좀 보이지 않는 건데 육적인 것은 조금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육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또 그 안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영성을 생각하는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자는 어떻게

보면 육적인 겁니다. 그죠? 하지만 이것을 읽으면서 내 마음 안에 생기는 울림

그것은 영적인 겁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종의 하나의 훈련 영어로 우리가 디씨플린(discipline)

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훈련, 수련 뭐 이와 같은 건데 그런 식의 하나의 훈련을

하는 것. 그것이 이런 영성수련의 어떤 기본적인 틀인 거 같애요.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져 보고

맛볼 수 있는 것을 맛 보되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내가 인식하려는 것.

그것을 알아 들으려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입장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한번 그와 같은

것들을 한번 보고 듣고 느껴보자. 이게 굉장히 영성 수련의 하나의 높은 목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마음에서 기도를 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

어요. 우리가 흔히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면은 십자가를 이렇게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지요? 십자가를 이렇게 올려다 보면서. 그런데 영성 수련이 갖고

있는 그 마지막 목표 지점에 가면은 나의 위치가 거기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치에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 예수님의 위치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보게 되는 것.

우리가 보통 기도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 밑에 신자들의 자리에서

저 위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내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가 된다면은 나는 어디에

있어야 될까요?

 

그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나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 그것이 영성수련의 하나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서 하느님과 하나됨

안에서 세상과 나를 성찰해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데

가지 길이 있는거예요.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지금 이 강의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 드리는 것 같이 머리로 좀 이해할려고 그 말씀을 머리로

우리에게 와 있는 텍스트를 머리로 이해할려고 좀 애써 보는 것. 이것을 좀

폼나는 얘기로 신학적인 접근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논리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 이런 것을 가지고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한번 대답을 찾아 보는 것. 이것이 신학적으로 하느님을 좀 알아가는 길

입니다. 반대로 무슨 기도회 체험이라든지 아니면 어떤 나눔 안에서라든지 아니면

생활 안에서라든지 아니면 어떤 피정의 체험이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하느님을

느낌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거를 조금 폼나는 얘기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직관을 통해서 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인싸이트(insight) 라고 하는데요. 직관 뭐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자녀들과 나누고 있는 그와 같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요? 하지만 알고 있지요? 직관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끼리 만나면은 아,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니면은 귀하게 생각하는구나, 아니면은 나랑 그렇게 크게 만나고 싶지 않구나.

뭐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우리가 그냥 느낌으로서 알게 되는 것.

 

하지만 그런 느낌은 언제나 옳을까요? 아니면 틀릴 때도 있을까요? 틀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만을 의존한다면, 직관만을 의존한다면은 그것도

역시 오류가 있더라. 따라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그런 직관 또는 신앙, 느낌

이런 것들과 또 우리가 반대쪽으로 우리 머리로 하고 있는 신학, 논리적으로 좀

따져보고 그것이 옳은지를 한번 점검해 보는 거랑 그 두가지는 균형이 좀 맞추어

져 있어야 됩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신학만 누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앙, 느낌, 직관 이런 것은 그거는 다

믿을 수 없는거야. 그런다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역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뭡니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인데 이거는 어떤

논리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길이 아닌 거 같애요.

 

우리가 친구와의 우정을 나눌 때 아니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때 아니면은 가정

안에서, 아니면은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사랑을 나눌 때 그 안에서는 어떤 논리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과학자자 "아, 니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는 단지 뭐 몸속에서

나오는 도파민의 작용에 불과해." 하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산다면은 그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을 거 같애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반대로 논리도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혹시 보신 분도 있을텐데 [뷰디플 마인드]

라는 노벨 경제학상을 탄 존 네쉬(Jdhn Nash) 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실 꺼예요.

1950년대의 아주 중요한 그런 게임 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해서 30-40년 있다가 결국 노벨상을 받게 되는게 그 중간에 정신 분열증을 앓게

되요. 그러면서 계속 환영 같은 거를 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계속해서 나는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나를 미쳤다고 하니까

굉장히 답답한 그런 상황에 놓여요. 그런데 마지막에 그것을 이 사람이 논리로

극복합니다. 어떻게 극복하느냐하면 그 영화를 보시게 되면 40년 동안 자신 앞에

나타나는 환영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늙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는 너를 분명히 보고 있지마는 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것을 논리로 극복합니다.

 

따라서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두개 중에 우리가 항상 그 어떤

것을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어떤 딜레마에 빠집니다.

직관, 신앙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지 논리 같은 거는 필요가

없다라는 그와 같은 사람들도 있고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그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게 너무 잘못되게

해석이 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지 그 외에 다른 것은

믿지 않겠다. 이것도 역시 올바른 태도는 아니예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저와 함께 이런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뜯어읽어 가시면서 이게 다라고

생각하시면은 그것보다 나쁜 거는 없는 겁니다.

 

이렇게 텍스트를 이해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는지 또 그것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 내 삶 안에서 어떻게

체험 되는지 그런 어떤 궁극적인 신비를 향해서, 그런 신비로운 신앙의 체험을

향해서,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을 향해서 나 자신을 열어 가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꼭 이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거는 글쎄 뭐라고 그럴까요? "저랑 같이 1년쯤 가시면은 그렇게 자동적

으로 되요." 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그건 또 아닌 것 같애요. 그 자체가 하나의

은총이기 때문에. 여기서 은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깨어 기다리는 겁니다.

 

그날과 그 순간이 언제 될지 모르니 깨어 기다려야 된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이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거는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어 기다리는 태도

영어로는 어웨니스(awareness)라고 합니다. 그런 깨어 있음.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깨어 있음. "너희는 깨어 있어라."

절대로 잠자지 마라. 그런 어떤 불면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라라는

건 하느님께 집중하고 그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면서 성찰하는

그와 같은 어떤 삶의 태도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고런 깨어 있는 태도로 오늘은 여섯째 재앙 탈출 9장 8절부터 여섯째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같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여섯째 재앙 종기부터 하는데

요번부터는 제가 좀 다른 실험을 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실험을 하냐하면,

한절한절 읽어 가면서 지금까지는 한 파라그라프(paraggaphe, 글의 단락, 문단)씩

이렇게 읽었는데 이제부터는 한절한절 읽어가면서 조금 더 깊이있게 문장을 좀

관찰해 봤으면 합니다.

 

* 탈출 9,8: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마에 있는 그을음을

         두 손 가득히 쥐어라.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공중에 뿌려라."

 

예, 그 앞에 있는 넷째, 다섯째 재앙일 경우에는 모세를 야훼 하느님께서 미리

파라오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보냈습니다. "니가 내 백성을 안 내보내니까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무섭지?" 뭐 이런 경고하는 이야기들이 항상 있었어요.

그런데 여섯째 재앙에는 그게 없습니다.

 

또 우리가 읽어 본 것 중에 몇 번째에 그게 없었지요? 나눠드린 표를 보시면,

page1.

0 큰 뱀

1 피

2 개구리들

3 모기들

4 등에 떼

5 가축병

6 종기

7 우박

8 메뚜기 떼

9 어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침에 파라오에게 가거라. 그가 물가로 나갈 터이니, 나일 강 가에 서 있다가 그를 만나라.

파라오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라. 그가 물가로 나오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파라오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일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파라오에

 

첫째 재앙, 두 번째 재앙에는 차 있는데 세 번째 모기들에서는 그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차 있는데 여섯 번째 종기에는 그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일곱 번째, 여덟 번째는 차 있는데 아홉 번째는 그게 없어요. 따라서

3,6,9. 우리가 3,6,9 게임을 ^^*~~~ 만들어 내기 전에 이미 3,6,9. 따라서

1,4,7. 2,5,8. 3,6,9 이렇게 같은 틀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예, 그리고 또 한가지 이상한 것은 여섯 재앙에서 야훼가 누구에게 말합니까?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세 번째 칼럼을 보십시오. 그러면은

그 전까지는 다 누구에게 얘기하냐하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라는

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이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한번 나오고 그 다음에는 계속해서 누구에게 얘기합니까?

 

따라서 이거는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유일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

에게 말씀하셨다. 본래의 틀은 뭡니까?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은 모세가

아론에게 얘기하고 아론이 그것을 파라오에게 전하는 그와 같은 틀인데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론이 조금 승격한 그와 같은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이야기가 뒤집히게 됩니다. 오경 전체에서 따져보더라도 야훼가 모세와

아론에게 말했다라는 문장은 거의 없습니다. 탈출기에서 세 번, 민수기에서

두 번 정도 등장할 뿐입니다.

 

아짜 제가 말씀드린다고 하고 깜빡 했는데 많은 분들이 원하셔서 이제 탈출기

전체에 대한 주석서를 제기 지금 써서 3분의 1정도가 완결이 됐어요. 그래서

인제 한 권에 내기에 너무 많은 분량이라서 전체 원고를 다 보니까 천 페이지가

좀 넘어가는 것 같애요. 그래서 우선 1권이 나옵니다. 나오는 대로 이제 다시

한번 제가 들고 와서 소개의 말씀을 드리겠지마는 따라서 필기 너무 이렇게

열심히 하실 필요 없습니다. ^^*~~~ 책으로 나옵니다.

 

탈출기에서 한 세 번 정도, 민수기에서 두 번 정도. 장절은 나중에 책에서 확인

하시면 될 겁니다. 야훼는 이렇게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8절 후반부

부터 정작 야훼의 명령에서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는 모세만 언급이 됩니다.

 

여기서 뭐라고 그러죠? "모세는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공중으로 뿌려라."

너희는 뿌려라. 아니면 모세와 아론은 뿌려라가 아니라 모세와 아론에게

얘기하는데 모세만. 따라서 아론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조금 섭섭했을 거

같기도 해요. 둘을 불러 놓고 얘만 시키는 거예요.

 

이는 첫째부터 셋째 재앙에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리지마는 실지로 앞에서도

어땠습니까? 명령은 모세가 내리고 실지로 누가 합니까? 아론이 지팡이를 들고,

아니면 손을 뻗쳐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죠? 그 아론의 지팡이였다는 거였는데

여기서는 조금 대조됩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얘기하지마는 정작 그것을 하는 것

은 모세입니다. 뭘 어떻게 하라고 그러지요? 가마의 그을음. 조금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직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을 거 같애요. 가마의 그을음이니까

화덕의 검댕이입니다. 그게 뭐죠?

 

여기서 얘기 하고 있는 거는 화덕의 검댕이이니까, 가마의 그을음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가마솥 안의 뭐 이렇게 타 있는 재 같은 거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불을 피우는 장소에 보면은 나무 같은 게 타고 완전히 재 같은 게 남잖아요? 그런

어떤  검댕이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집어서 따라서 타고 남은 재지요?

그것을 집어서 그거를 어떻게 뿌리라고 그럽니까? 공중으로 뿌려라.

 

* "너희는 가마에 있는 그을음을 두 손 가득히 쥐어라.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공중으로 뿌려라."  직역한다면은 "하늘을 향해 뿌려라."고

    합니다. 하늘 방향으로 뿌려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 탈출 9,9: 그리하여 그것이 먼지가 되어 이집트 온 땅에 퍼져 나가, 이집트

   온 땅에 있는 사람과 짐승에게 궤양을 일으키는 종기가 되게 하여라.

 

예,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그 모세에 의해서 뿌려진 그 그을음, 그 검댕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예고하는 겁니다.  우리 말 번역에서는 그것이 잘 안

살아나 있는데요. 성경을 번역하는 그런 관계 안에서는 신자들에게 읽기에

편안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보면은 조금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먼지가 되어 이집트 온 땅에 펴져 나가, 이집트 온 땅에 있는

사람과 짐승에게 궤양을 일으키는 종기가 되게 하여라." 라는 문장인데 그것이

퍼져 나가서 땅에 떨어지면 먼지가 되고 짐승에게 떨어지면 종기를 일으켜라

라는 이런 뜻입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작용이 다릅니다.

 

따라서 땅 위 에서는 먼지가 될 것이고 인간과 짐승 위에서는 궤양을 일으키는

종기가 될 것이다. 궤양, 그 뭐죠? 이렇게 몸에 고통스러운 병 이름이 뭐죠?

아. 대상포진. 부종, 수포 뭐 이런 거를 일으키는 종기를 얘기합니다. 따라서

여기는 약간의 언어의 유희가 있는 겁니다. 여기 떨어지면 먼지가 되고 여기

떨어지면 종기가 되어라.

 

* 탈출 9,11: 요술사들과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종기가 생겨, 요술사들도 종기

                   때문에 모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참 처량한 처지가 됐지요?

 

본래 요술사들은 이집트 편에서 모세와 아론이 어떤 이적, 표징을 보여주면,

자기도 같은 것을 하는데 그래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었습니까? 물이 피로 변하는

것도 할 수 있었고, 그리고 또 어떤 것을 할 수 있었지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것. 개구리도 할 수 있었나요? 개구리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웃기는 게 그때도 강의하면서 말씀드렸지마는 정말 요술사들이 능력이

있으면은 모세와 아론이 물이 피로 변하게  했으면은 그 다음에 그거를, 피를

물로 변하게 하고 개구리를 올라오게 했으면은 개구리를 내려가게 해야 되는

그게 어떤 요술사들의 능력이 되야 하는데 이 요술사들은 따라 하는 거 밖에

못해요.

 

물이 피로 변하게 하고, 개구리들이 이렇게 올라오게 하고, 따라하는 것만.

여기서는 급기야 이제는 같이 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 종기의 피의자가 됩니다.

따라서 그 능력이 이제부터는. 그리고 나서 이 대목 이후부터는 요술사들이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예, 조금 처량한 처지지요?

 

신약에서도 보면은 뭐 이런 거와 비슷한 대목으로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와서

그렇게  얘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니가 메시아라면은 너 자신이나 구해

보라지!" 아니면 뭐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봐라!"라는 약간은 좀 그런 능력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그런데 반대로 보면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 대목과는 다른 문제입니다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들에게 그런 거를.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들이 정작 은총의 수혜자가 되는 경우는 조금 드문

것 같애요. 사실은 또.

 

그래서 의사들 중에서 뭐 이렇게 예를 들어 피부과 전문의 인데 본인도 뭐 피부병

에 걸리는 뭐 그런 경우도 있고. 신부들은 스스로 고해 성사를 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교회법에 보면은 어디까지 엄격하게 돼 있냐하면은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두 명의 신부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신부 둘이서 공범으로 은행을 털었어요. ^^*~~~ 서로 마주 보고서

한 사람씩 고백성사를 하는 거예요. ^^*~~~ 은행을 털었습니다. ^^*~~~

그리고 나서 서로 사해 주는 것. 이거 안 됩니다. 교회법으로.

 

그런데 참 웃기는 게 교회법으로 그런 조항이 있대는 거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뭐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던 그와 비슷한 적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어떤 범죄였는지는 모르지만. 뭐 교회 역사가 2천년이나 되다보니까 신부들끼리

뭐 같은 잘못된 일을 하고 서로 고해성사를 주는 일이 아마 있었을 것 같애요.

교회법에 그런 조항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본당 신부님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시면 안 됩니다.^^*~~~

 

* 탈출 9,12: 그러나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다.

 

앞서 계속 반복되는 거지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요 탈출기에서 등장하는 표현은 모두 세 가지 표현입니다.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는 것을 직역하는 걸로 말씀드리자면 파라오의

심장을 강하게 했다. 파라오의 심장을 무겁게 했다. 파라오의 심장을 단단하게

했다. 요 세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말 표현에서는 강하게 했다를 완강하게 했다라고 번역을 했으면

좋으셨을텐데, 좀 편했을텐데 강하게 했다라는 직역되는 동사가 나오면 항상

완고하게 했다라고 우리 말 표현에서는 번역했고, 무겁게 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완강하게 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아직까지 단단하게 했다라는

표현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때 나오면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어요. 흔히 구약에 있는 구약의

언어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무겁고, 강하고, 단단한 거는

좋은 겁니까? 아니면 나쁜 겁니까?

 

예를 들어 제가 앞에 있는 어떤 형제님이나 자매님에게 "아, 자매님은 참 마음이

강하십니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아, 자매님은 참 마음이 약하십니다. 자매님은

참 심성이 무거우십니다라고 하는 것과 자매님은 참 심성이 가벼우십니다.

마음이 단단합니다. 아니면 마음이 무릅니다. 이렇게 대조되는 표현만 쭉

생각하시면은 강하다, 무겁다, 단단하다, 약하다, 가볍다, 무르다라는 것 중에서

어떤 게 일반적으로 더 좋은 의미일까요?

 

예, 강하다, 무겁다, 단단하다. 이게 좋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이런 거를 하나의 역설이라고 우리가 얘기해 볼 수 있을 거 같애요.

이렇게 본래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떤 한 문맥 안에 들어와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아니면 뜻의 어떤 의미가 바뀔 때.

 

제가 옛날에 고등하교 땐가요? 이렇게 영어 공부하면서 무슨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에서 계속 주인공이 terrble 뭐 이런 단어를 쓰는 거예요. 그러면서 쓰는데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terrble. 우리 말로 얘기하면 끔찍하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끔찍하다는 게 본래는 좋은 뜻이었겠습니까?

나쁜 뜻이었겠습니까? 나쁜 뜻이죠. 나를 좀 겁나게 한다.

 

그런데 우리 말에도 마찬가지죠. "야, 그거 겁나게 좋아!" 뭔가 뜻이 한번 더

뒤바뀌는 그런 태도입니다. 여기서도 약간 그런 언어의 어떤 유희가 있는

겁니다.  본래는 단단하다, 강하다, 무겁다 하는 것이 좋은 것이었는데 더군다나

무겁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도 쓰이느냐 하면은 영광스럽다라는 그와 같은

어감도 함께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는 파라오가 그런 야훼를 대적하는, 자기 자신의 어떤 고집을

꺽지 않는 그와 같은 모습을 표현할 때 쓰이는 그런 단어로 사용이 됩니다. 예,  

따라서 종기에 대한 부분 짧기 때문에 여기까지 읽었습니다. 생각해 볼 것을 한번

되짚어 본다면은 종기를 의미하는 히브리 말 단어는 shechin 이라는 단어인데요.

그 shechin 이라는 단어는 뜨겁다 또는 열이 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shechin(종기 또는 부스럼) 이라는 이 단어는 특히 어디서 많이 나오느냐하면

레위기 13장에서 많이 나옵니다. 피부병을 앓는 부정함에 대한 그런 법적 판단을

내리는 레위기 13장에서 이 단어가 거의 매절 등장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8장에서는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에 대한 저주의 말씀

으로 특히 28장 27절에서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이집트의 종기가'라고. 그냥

종기가 아니라 이집트의 종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신명 28,27: 주님께서는 너희가 고치지 못할 이집트의 궤양과 종기와 옴과

                     가려움 병으로 너희를 치실 것이다.

 

그 다음에 종기 때문에 고생했던 구약 성경의 어떤 한 인물이 있죠?

유명한 인물이? 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걸린 병은 아마도 그런 어떤

한센병이 아닐까? 옛날에는 문둥병이라고 했는데 그거는 더이상 표준어로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병에 걸려 있는 환우들을 생각하면.

 

나병보다는 한센병이 요즘은 더 좋은 그런 저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 한센병을 욥기에서 언급하기 위해서도 같은 단어가

쓰여 졌고 이사야서 38장에 보면은 히즈키야가 죽을 위험에 그런 질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이 종기와 관련된 질병인 것으로 저희들이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예, 따라서 부스럼 정도가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은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어떤

두려운,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병 중에서

요즘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병 중에 하나가 탄저병이라는 병이

있는데요. 그 탄저병이 여섯 번째 재앙과 조금 관련이 돼 있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떤 주석 학자들도 있습니다.

 

탄저병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잘 안 옮겨진다고 하는데 제가 좀 찾아보

니까 울이나 가죽이나 털 제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가장 쉽게 감염된

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들 왜 동물 보호하는 사람들이 가죽제품 뭐

이렇게 밍크코트 뭐 이런 거 입지 말자고 그러는데 그것을 입지 말아야 될

과학적인 이유도 있을 거 같애요. 탄저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런 거 입지

않으셔야 될 거 같애요. ^^*~~~

 

예, 아무튼 처음에는 이 병에 걸리면은 벌레 물린 것처럼 가려움 같은 걸 느끼고

한 1~3cm 정도 그 가운데가 까만. 하나도 아프지 않답니다. 처음에는. 그런 염증

같은 게 생기는데 그러면서 점점 주위에 부종이 생기고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에

사망률이 한 20% 정도 된다고 해요.

 

따라서 여기서 11절에서 요술사들이 모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게 탄저에 생기는 부종 같은 것이 주로 이런 무릎 같은 데에 많이 생기

나 봐요. 그러니까 그런 무릎이나 정강이에 생긴 부종 때문에 서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한 것으로 짐작하는 그런 어떤 주석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건 조금

오버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이런 뭔가 추측해 보려는 학자들의 그런 짐작이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치료와 치유를 담당하는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세라피스(Serapis), 임호텝(Imhotep), 톱(Toch) 과 같은 그와 같은 신들이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그 신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거죠. 그렇게 그 신들이

작동했다면은 그런 병들이 있어도 그 신들이.

 

따라서 여기서 다신적인 신관 안에서 본다면은 야훼가 이 신들을 이겼다.

그 신들의 능력을 넘어섰다라는 이야기로 우리가 종기 이야기 하나만 딱

떼어 놓고 본다면은 그 신학적 메세지를, 단편적인 메세지를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다.

 

  

 

예, 그 다음에 일곱 번째 재앙 우박에 관한 재앙입니다.

 

* 탈출 9,1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내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자, 일곱 번째 재앙이니까 첫 번째와 네 번째, 일곱 번째가 같은 싸이클로 돌아가

지요? 그런데 조금 다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얘기하고 앞에 첫 번째와

네 번째에서 나왔던 어떤 것이 빠져 있습니다. 뭘까요?

page1.

0 큰 뱀

1 피

2 개구리들

3 모기들

4 등에 떼

5 가축병

6 종기

7 우박

8 메뚜기 떼

9 어둠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침에 파라오에게 가거라. 그가 물가로 나갈 터이니, 나일 강 가에 서 있다가 그를 만나라.

파라오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라. 그가 물가로 나오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파라오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일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파라오에게 가거라.

 

앞에서는 있었는데 여기는 없는 거. 앞에서는 물가로 가라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물가로 가라는 얘기가 없습니다. 아침에 가라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왜 없을까요?

이게 왜 이 일곱 번째 재앙에서는 물가로 가라라는 이야기가 없는지에 관해서

제가 다른 주석가들이 어떻게 얘기하나 주석서를 한 20권 정도 찾아 봤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강의를

준비하다가 오늘 새벽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들이 이게 괜찮은

생각인가 한번 저랑 같이 생각해 주시기 바래요.

 

자, 열 가지 재앙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크게 세 가지 틀로 나뉘어 집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물에 대한 재앙, 땅에 관한 재앙, 그 다음에 하늘에 관한

공기에 관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앞선 여섯 재앙을 통해서 물에

관한 재앙은 끝나버렸어요.

 

물이 피로 변하고 물에서 개구리들이 올라오고 그러면서 물에 관한 그런 재앙

들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거 같아요. 따라서 물에 관해서는 끝이까 물가로

가는 그와 같은 대목도 이제부터는 좀 관심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라는

그런 굉장한 생각을 제가 해 냈는데 ^^*~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예, 아무튼 일곱 째 재앙에서는 물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 탈출 9,14: 이번에는 내가 온갖 재앙을 너 자신과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려,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음을 네가 알게 하겠다.

 

이 구절부터 시작되는 야훼의 말씀은 아홉 재앙 전체에서 제일 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디까지 계속되느냐 하면 19절까지 계속돼요.

따라서 야훼의 말씀이 굉장히 길어요. 또한 야훼의 말씀은 흑사병과 앞서 나온

가축병과 종기라는 극단적인 재앙에 불구하고 이집트가 멸망하지 않는 신학적인

해설과 함께 왜 야훼가 우박이라는 새로운 재앙을 선택했고 또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야훼가 무엇을 의도하시는지를 이제부터 19절까지에서 천천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햐 될 것은 여기서 "온갖 재앙을" 이라고

얘기 했는데 직역하자면 "모든 나의 재앙들을" 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등장하는 재앙이라는 히브리 말 단어는

탈출기에서 딱 여기 한번만 나옵니다. 다른 경우에는 표징, 기적 뭐

이와 같은 단어들은 나오는데 재앙이라는 단어는 딱 여기 한번만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탈출기 외에서 민수기에서는 한 아홉 번 정도, 역사서와

예언  문학에서도 간간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한 번만 나오고 그리고

이 재앙이라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따라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와 같은 재앙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훼가 얘기한 모든 재앙이라는 것은 첫 번째부터 마지막

열 번째까지를 다 이야기할까요? 이걸 가지고 학자들의 의견이 조금 갈리는데

그런데 이걸 가지고 학자들은, 더 많은 수의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모든

재앙이라는 것이 열 가지 재앙을 다 얘기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곱, 여덟, 아홉, 열 번째 재앙을 얘기하는 거 같다.

 

왜냐하면 14절의 출발 부분에 "이번에는" 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네 재앙

만을 얘기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습니다.

 

* 탈출 9,14: 이번에는 내가 온갖 재앙을 너 자신과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려,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음을 네가 알게 하겠다.

 

야훼는 이 재앙들을, 직역한다면 "너의 심장에, 너의 신하들 안에, 너의 백성들

안에 보낼 터인데." 조금 이상해요. 그 재앙을 보내면서 너의 심장에 보내겠다고

그럽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이렇게 돼 있지요? "너 자신과"로 되어 있는데 직역

하자면 너의 심장에. 조금 저는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의 심장에, 너의 신하들 안에, 너의 백성들 안에 보내겠다.

 

"그리고 모든 땅에 야훼 같은 이가 없음을 파라오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재앙을 보내겠다." 파라오가 야훼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재앙의

목적은 이집트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와 이집트가 야훼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땅에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따라서 성경에서의 모든

번역은 온 세상이라고 그 부분을 번역을 했는데 저도 요 부분은 그냥 단지

온 세상이라고 봐야 될지 아니면은 온 이집트 땅이라고 봐야 될지에 관해서

조금 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거를 그냥 온 이집트라는

의미로.

 

따라서 온 이집트를 통틀어 이집트에 여러 신들이 있지마는 그 이집트에 있는

어떤 신들도 야훼 같은 신은 없다라는 뜻으로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

느냐?라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 탈출 9,15-16: 진작 나는 손을 내뻗어 너와 너의 백성을 흑사병으로 쳐서,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까닭이

       있어 너를 살려 두었다. 너에게 내 능력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 온 세상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지요? 예, 15절, 16절 야훼는

자신의 큰 권능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이 아직까지 파라오의 이집트를 멸절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합니다. 반복해서 같은 설명이 나오는 겁니다.

 

당장 손을 뻗어 흑사병으로 파라오와 그의 백성을 쳐서 그 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파라오에게 자신의 힘을 보게 하고 그리고 모든 땅에 아마도

온 이집트 땅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야훼의 논거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흑사병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미 있었지요?

앞에 나오는 가축병이 그게 이제 흑사병이거든요. 따라서 이미 흑사병에 대해서

언급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없었던 것처럼. 따라서 네 번째 재앙 이야기를 모르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라고 우리가 좀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네째 재앙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축에 관한 것이었지마는.

 

따라서 여기서 있는 열 가지 재앙 이야기들은 본래, 본래부터 다 함께 조직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사이 사이에 보면은 좀 문학적인 긴장과 균열이

일어난다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감안 하시고 그것은 다양한 옛 전승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정도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17절: 그런데 너는 계속 내 백성을 거만하게 대하면서, 그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거만하게 대한다라는 것은 히브리 말 동사를 우리가 둘로 이해할 수 있는

데요. 그 본래의 뜻은 뭐냐하면 세우다 또는 드높이다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자신을 탁 세우고 드높이고 뭐 거만하게 처신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역시 가능하고.

 

반대로 이거를 실제적으로 자신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어딘가로 이집트를 나가

려고 하는데 그것을 막아서는 그와 같은 하나의 회화적인 표현으로, 그림으로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딘가로 나가려고 하는데 파라오가 탁 일어나가지고

그것을 몸으로 막아서는 하나의 그림과 같은 그런 그림으로도 요 거만하게라는

동사에 숨어 있는 다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탈출 9,18: 그러므로 나는 내일 이 시간에, 이집트가 생긴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엄청난 우박을 쏟아 붓겠다.

 

계속해서 내일, 내일, 내일이라는 얘기가 앞에서도 등장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단지 내일이 아니라 내일 이 시간에,

내일 이 시간 즈음. 뭔가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지요?

 

"한번도 내린 적이 없는 엄청난 우박을" 이게 여기서도 언어의 유희입니다.

엄청난 우박인데 직역하자면 매우 무거운 우박을. 무겁다. 파라오의 심장이

무겁다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매우 무거운 우박을.

 

따라서 대량의 우박을 내리게 할텐데 그런데 그것은 이집트라는 나라가 수립된

날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이건 조금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이집트라는 국가가

수립된 날부터. 첫 번째입니다. 요 다음 재앙으로 넘어가면 이 표현이 어떻게

바뀌냐하면 이집트 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그리고 그 다음 재앙으로 넘어 가면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던.

뭐 이런식의 표현으로 점점점점 시간적으로 틀이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여기서도 이집트가 생긴 이래로라는. 다음에는 이집트 땅에서 사람이 산

이래로. 다음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해하셨죠?

 

* 탈출 9,19: 그러니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너의 짐짐승과 들에 있는 너의 모든

   것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라. 미처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들에 남은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을 것이다.

 

참 이상하죠? 재앙을 줄려면은 확실히 주시는 게 속이 시원할 거 같은데 그런데

여기서는 야훼의 어떤 배려와 자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흐름에서

본다면 조금 생소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15절, 16절에 나타난 야훼의

진정한 의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야훼가 뜻하는 것은 이집트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리고

이집트가 야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에서도 이렇게 모세를 향한 야훼의

말씀은 마무리 되고 이제 이 말씀을 모세는 파라오에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 탈출 9,20: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한 자들은 제 종들과

   집짐승들을 재빨리 집 안으로 피신시켰다.

 

이상하죠? 모세가 파라오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생략돼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하는 겁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그 말씀을 전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 파라오에게 전하는데 신하들이 그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떻게 한

겁니까? 주님의 말슴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제 종들과 집짐승들을 재빨리

집 안으로 피신시켰다라는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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