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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겸손은 포용력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26 조회수617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30주일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복음: 루카 18,9-14





예수님 십자가의 길


MEMLING, Hans 작, (1470-71)


     < 겸손은 포용력이다 >

          

한 잘 생긴 20대의 총각 선생님이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신앙인이었고, 그래서인지 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안신경증이 발병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모를 불안이 엄습한 것입니다. 안절부절못하고, 누가 쫓아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절이 되지 않는 불안입니다. 너무 불안해 자살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입원을 시켰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불안증의 원인은 성적 욕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파른 육교를 올라가다가 고개를 들자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인의 속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황급히 눈을 돌렸지만 그 장면은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수업시간에도, 잠자리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는 누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누나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았는데, 특히 겨드랑이 장면이 자신을 자극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는 누나를 두고도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변태고 죽일 놈이야라는 양심의 엄한 심판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며칠 잠을 못 자고 자책하고 또 자책하다가 불안신경증이란 병이 걸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입원이 도움이 되었는지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면담을 하였습니다. 퇴원 후에는 음란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1년간 세상과 소식을 단절하여 신앙의 힘으로 이제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능력이 있으니 바로 취직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와 상담하러 올 때 이제는 죄책감과 함께 분노와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묵는 하숙집 옆방의 군인들이 너무나 혐오스런 음담패설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찬송가만 듣고 싶은데 세속 유행가를 크게 틀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이제는 세상 탓으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그러한 세상을 등지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겠다며 짐을 싸서 사라지고는 3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조: 이무석, 친밀함, 212-214]

 

오늘 복음에 두 명이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 하나는 누가 봐도 성인처럼 사는 사람이고 하나는 누가 봐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하느님께 인정받을만한 일을 많이 했다고 믿었지만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께 기도드릴만한 자격도 없다고 믿었지만 하느님께 인정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합니다. 즉 마음이 편안해 졌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도 마음이 불편하면 바리사이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위의 청년도 누구보다 거룩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 자신이 아는 대로 살아가는데 아주 죄가 될 수도 없는 정도 가지고도 자신을 질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바리사이와 세리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지킬 것은 다 지키려고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이 나옵니다.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나, 양심의 심판이나 같은 것입니다. 즉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교만의 증거입니다. 오늘 세리는 죄는 많이 짓는 사람이지만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되어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마음의 겸손이지 외적인 행위들이 아닙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의 순결한 사랑이지, 음식 잘하고 청소 잘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내가 세리의 모습이 아닌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니고 기도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힐링 캠프에 패티김이 자신이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장 잘 나가던 4-50대 나이 때 갱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까지 패티김은 인기를 얻고 자신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인사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고, 팬들과 악수를 하고도 손에 묻은 땀이 더럽게 느껴져 자신의 바지에 닦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사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지고 노래하면서도 왠지 모를 눈물이 자주 흘렀다고 합니다. 결국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불안함과 공허함에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없었던 그녀는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다녔고, 스님도 만났었는데, 어떤 노스님의 한 마디에 우울증이 극복되었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너무너무 높이 있습니다. 이제 내려놓고 내려오세요. 조금 겸손해지세요. 높이 있으면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우울증을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지 알고 보면 답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두 번째 교만의 특징은 남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가 세리를 심판했듯이, 신앙심만 깊었던 청년도 옆방 군인들을 끊임없이 심판하고 있었습니다. 교만함의 명확한 확증은 바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 서로 핑계를 대게 되었음은 그 안에 교만이 들어왔다는 확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청년도 군인을 판단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아는 군인들이 자신이 거룩해야만 한다고 믿는 청년보다도 더 정당하게 판단을 받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자가 아우구스티노에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덕목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성인은 대답했습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그런 아우구스티노가 하루는 볼일이 있어서 한 제자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해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겸손은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허공 높이 올라가 있으면서 머리를 숙여봐야 밑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발밑에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머리만 숙이는 거짓 겸손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선거철에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참다운 겸손은 마음의 겸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낮출 필요가 없이 낮은 존재임을 마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지, 육체나 생각이 겸손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로 낮추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높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낮아짐이기 때문에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장 낮은 땅은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와 같이 겸손하셨던 분은 성모님이고 성모님은 세상 모든 것뿐만 아니라 세상보다 크신 하느님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이건 따먹으면 안 돼?’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첫 조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겸손입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까지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바다처럼 넓지 못하다면 교만이 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모든 것 다 버리고 신학교 들어가서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고 생각했을 때는 매우 교만했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에 사는 것이 불만이었고, 선배 신학생이나 교수 신부님들도 많이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단식하고 너무 배가 고파 성체를 영했을 때, “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느냐?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라는 것을 느끼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분이 아니시면 전혀 쓸모없는 존재임을. 그 때부터 저의 성소와 신학교, 주위 사람들까지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이미 공중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면 그 때서야 땅에 닿은 것입니다. 내려가다 내려가다 보면 가장 편안한 자리가 나오는데 그 자리가 바다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그리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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