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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과 사랑의 일치 -성체성사의 은총- 2013.10.31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31 조회수42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3.10.31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로마8,31ㄴ-39 루카13,31-35

 

주님과 사랑의 일치 -성체성사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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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모르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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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끝없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모두가 초보자입니다.

평생 배워가야 하는 사랑이요

하여 수도원을 사랑의 학교라 하며

평생 사랑을 공부해야하는 수도자들은 평생학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 인생입니다.

몇 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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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취모구자(吹毛求疵)라는 사자성어의 뜻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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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모구자(吹毛求疵):짐승의 몸에 난 사소한 흠은 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 불어 헤치면 안 보이던 흠집이 드러난다.

취모구자는 남의 잘 보이지 않는 허물까지 각박하게 캐내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라는 말에 백배 공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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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취모구자 하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 내는 것이

사랑입니다(1코린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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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옛 초등학교 시절 성적표를 받았을 때의

다섯 단계 평가 기준인 ‘수, 우, 미, 양 가’의 뜻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차별이나 계열화가 아닌

그 독특함을 인정하는 인간 긍정이, 인간에 대한 배려하는 사랑이

그 말 안에 함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수秀는 빼어나다, 우優는 우수하다, 미美는 아름답다, 양良은 좋다, 가可는 가능하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모든 말에 긍정적인 인간관이 배어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이 또한 인간에 대한 배려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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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예수 부활 상 앞을 지날 때의 깨달음 또한 잊지 못합니다.

마침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마주 오던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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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여기 수도원의 원장이십니다.”

농아들이라 수녀님은 말하면서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습니다.

순간 제 응답에 만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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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분이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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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생들 옆에 우뚝 서 있는

예수 부활 상을 가리키며 웃으며 예수님이 원장님이라고 답변한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답변했고 답변 후에야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진정 예수님이 원장님이라는 자각이 투철할 때 저절로 겸손이요 만사형통일 것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가슴 활짝 열고 맞이하는 예수님은 진정 원장의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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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흡사 예루살렘의 원장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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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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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좌절된 사랑에서 오는 슬픔이 짙게 배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예언자들의 슬픔이요 하느님의 슬픔입니다.

슬픔의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합니다.

어찌 보면 예루살렘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 사랑의 호소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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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사랑 중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과의 일치가 삶의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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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바오로의 장엄한 고백은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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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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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뿐 아니라

예수님 역시 이런 하느님 사랑과 완전 일치되어 사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이런 사랑의 일치에서 오는 힘으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예루살렘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구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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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니 다는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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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일치의 사랑이 있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항구히 주님을 따라 내 길을 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위의 예수님 말씀과 연상되어 떠오른

저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시의 마지막 연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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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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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구히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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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성체성사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되는 우리들입니다.

세상 그 누구,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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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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