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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모든 성인 대축일, 2013년 11월 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1 조회수416 추천수5 반대(0) 신고

모든 성인 대축일, 2013년 11월 1일

마태 5, 1-12

 

오늘은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신 모든 성인(聖人)들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는 당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성인들을 특별히 기억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의 키드론 골짜기에는 성인들의 무덤이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23,29)는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소를 꾸민다.”고 말합니다.

 

초기신앙공동체가 성인이라고 특별히 기억한 분들은 먼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은 꽃과 향료를 가지고 그들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인을 기억하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들은 화장(火葬)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묻혔기에 신앙인도 죽으면 땅에 심어져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가톨릭교회에서 성인(聖人)이라고 하면,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로마교황청이 성인으로 선포한 분들을 뜻합니다. 오늘의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의 절차는 20세기 초에 교회법전(敎會法典)이 반포되면서 생겼습니다. 로마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서 성인들을 공경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는 12세기 초(1171년)에 이미 내려졌습니다. 그때까지는 각 지역 신앙공동체가 성인을 추대하고 기억하였습니다. 서기 1200년을 전후하여 절대군주(絶對君主)로서 로마교황의 입지가 교회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고, 성인들에 대한 신심도 그 무렵에 로마교황청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는 단어가 달력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4세기 말, 안티오키아 교회에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성인의 축일’은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날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 연옥에 대한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천당에 간 영혼과 연옥에 간 영혼을 함께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11월 1일은 천당에 간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이 되고, 그 다음날인 2일은 연령, 곧 연옥에 간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그 선언과 가르침을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 부릅니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대신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활동한 갈릴래아에는 시나이와 같은 높은 산이 없고, 작은 언덕들만 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의 지형을 감안한 루가복음서는 그 가르침을 예수님이 평지에서 주셨다고 말합니다(루가 6,17 이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원칙들 혹은 통념(通念)들이 있습니다. 재물은 많을수록 좋고, 재물이 있어야 행복하다. 굶주리는 것은 불행하다, 우는 것은 불행하고, 웃으며 사는 것은 행복하다, 지위는 높아야 하고, 높은 사람은 대우를 받는다,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 등의 통념입니다.

 

그런 우리의 통념에는 어떤 부정(否定)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가난한 생명, 굶주리는 생명, 우는 생명, 지위가 낮은 생명, 죄를 지은 생명들의 가치를 부정합니다. 그런 우리의 통념이 종교적 언어로 나타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면, 재물과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종교적 언어들입니다. 그 언어들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 등은 하느님의 뜻으로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신앙언어도 이 세상의 그런 통념으로부터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신분과 지위를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말하는 것, 잘 지키고, 잘 바쳐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모두 그런 유혹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이 세상 사람들의 그런 통념 안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을 배워 그분의 자녀로 살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고, 그 생명이 하는 일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오늘의 행복 선언이 말하듯이, 사람이 가난해도, 굶주려도, 울며 살아도, 또 죄인이라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런 우리의 통념에서 해방되어, 어떤 생명이라도 소중히 생각하고, 돌보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통념에서는 모두 불행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 행복해야 한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통념들이 불행하다고 믿는 생명들을 위해, 하느님이 하시는 일, 곧 그들을 긍정하고 그들을 돌보는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불림을 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철저하게 실천하다가 유대교가 지닌 통념에 의해 재판 받고, 로마총독이 지닌 통념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긍정하고 희망하며 죽으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름받은 이에게는...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3-24). 이 세상의 통념에서 보면, 예수님은 어리석고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어떤 ‘내어줌과 쏟음’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우리의 통념은 버려짐과 고통을 보지만, 신앙은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는 어떤 긍정과 새로운 생명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성인들은 모두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내어주고 쏟으면서’ 주변의 생명들을 긍정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통념이 지닌 차별과 부정을 거슬려 십자가의 어리석음, 곧 하느님의 능력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그분들 안에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겪은 아픔과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통념에서 해방된, 하느님 자녀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가 사람 안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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