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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 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1 조회수739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위령의 날


<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


복음: 마태 25,1-13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루벤스(RUBENS) 작, (1612)


     <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벌 >

    

 

어떤 자매님이 같은 신자인데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괴롭힌다고 합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벌이라고 받게 하고 싶지만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참고 참고 하다가 병이 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의가 빠진 자비는 비겁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지옥이고, 또 그래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연옥입니다. 왜냐하면 평생 나쁜 짓만 하다고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아무런 보속도 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주어도 항상 벌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봅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갖은 첫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고 그 죄도 용서를 받았지만, 하느님의 다윗의 집안에 평생 칼바람이 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또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며 자신의 소실들이 겁탈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병적조사를 해서 나중에 뉘우치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세 가지 벌을 준비하십니다. 삼년 동안의 가뭄, 석 달 동안 칼에 쫓기는 것, 그리고 사흘 동안의 전염병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짧은 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날 동안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을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같은 죄의 벌을 위해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양의 보속을 내놓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결코 사흘의 전염병이 다른 고통보다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막심 퓌상의 연옥실화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성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회개한 한 죄인이 하느님께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죽어서 3일간 연옥에 있든지 또는 2년간 이 병을 참아 받고 바로 천국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병자는 주저하지 않고 연옥을 원했습니다. 얼마 후에 천사가 연옥에 갔는데 그 환자가 천사를 보며 말했습니다.

사흘만 있으면 될 이곳에 나는 벌써 몇 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여기 온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청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인간 세계에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거기서 가장 괴로운 병을 몇 해라도 즐거이 참아 받겠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병자는 연옥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하고 그저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쁨으로 먼저의 병을 잘 참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치릴로는 연옥의 아주 잠시의 고통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했고,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에서 당한 라우렌시오의 고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이 크다보니 연옥에서의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보다 훨씬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보속의 시간이 짧다고 결코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위 세 가지 제시된 벌을 다 거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죗값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이고 이는 참으로 죄를 뉘우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죄가 용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벌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합니다.

혹은 우물쭈물 하다가 그 벌을 받기 전에 죽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라도 죗값을 치르고 깨끗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죄에는 반드시 죗값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면, 어떻게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죗값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에서 키레네사람 시몬이 져야 했던 고통이 있는 것처럼, 내 죄에 대한 나의 보속도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분이 해 주시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분에게 전가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청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옥은 결국 우리가 남은 죗값을 청산할 수 있는 은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보속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로마에서 한 방탕한 부인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영혼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나 다만 때때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갑작스레 그 천한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범한 죄가 무서워져 통회하고 고백하여 올바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연옥 영혼이 은인을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감탄할 만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영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는 영혼들은 하느님 앞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백성 7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죽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백성이 아닌 자신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의 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항상 비르짓다의 기도를 추천해줍니다. 1년 동안 바치는 주님수난 15기도는 15명의 연옥영혼을 구해준다는 약속이 있고, 12년 동안 바치는 주님성혈 7기도는 자신 또한 연옥에 가지 않게 해 준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굳이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나 1년간의 금식보다 더 낫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나의 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큰 보속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보속을 다 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잊혀진 연옥영혼들을 위해서도 공로를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사랑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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