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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9 조회수724 추천수13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32주일


<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복음: 루카 20,27-38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50), 프레스코, 169x134 cm,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십니다. 과연 내가 살아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은 아니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연탄길로 잘 알려진 이철환 작가가 산에 올랐을 때 거미줄에 걸린 사마귀가 거미를 잡아먹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거미는 사마귀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사마귀는 어떻게 되었을까?’하며 다시 그 곳에 가보니 사마귀도 거미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있더랍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일까요?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새벽이 올 때까지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동네 어귀에 조그마한 분식집 민희 분식을 차린 한 가난한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직장을 잃고 어렵게 모은 돈으로 처음 분식집을 차릴 때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민희네 분식집엔 손님이 많이 오지 않았고, 민희 분식 옆에 주차장까지 갖춘 큰 음식점이 들어오자 밤마다 번쩍번쩍 네온등이 빛났습니다.

일 년도 안 돼 민희 분식은 문을 닫고 산동네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민희네는 산동네 단칸방에 살며 엄마 아빠는 우유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유 배달을 나갔다 오토바이와 부딪혀 한쪽 팔을 깁스한 아버지는 당분간 일을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이 떠들어서 숙제를 못하겠어, 엄마.”

아빠, 애들이 내 운동화 보고 거지 신발이래.”

철없는 아이들의 투정에 아빠의 등은 자꾸만 웅크려집니다.

후두둑 후두둑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거센 비바람을 몰고 와 가난한 민희네 지붕과 창문을 사정없이 두들깁니다. 급기야 민희네 천정에선 빗방울이 떨어지고... 민희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 대신 양동이를 받쳐놓았습니다. 아빠는 말없이 아내에게 소주 값 1000원을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새벽 한 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 밖에는 비바람이 치고 천둥 번개까지 몰아치는데... 민희와 엄마는 아빠를 찾아 동네 곳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아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민희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민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지붕 위에 앉아 깨진 기와 위에 우산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갈까 봐 한 손으로 우산을 꼭 잡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

민희가 아빠를 부르려고 하자 엄마는 민희 손을 잡았습니다.

아빠가 가엾어도 지금은 아빠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아빠가 저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민희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주고 아빠는 늘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빠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가족들의 가난을 아슬아슬하게 받쳐 들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가족들의 지붕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

 

민희 아빠는 자신이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산 것이 아닐까요?

돌아가신 분 이야기를 자꾸 해서 죄송하지만, 최진실씨의 경우는 어떨까요? 자신을 미워하여 악플을 올린 몇 명의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마도 그들을 죽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뒤에는 항상 거미줄이 있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고 싶으면 자신이 죽는 법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자녀들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았다면 자신도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남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진정 살아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검은 연탄과 다 타 버리는 연탄 중 어떤 연탄이 살아있는 연탄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그 연탄에 불이 붙어있지 않다면 검든 희든 그 연탄은 죽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태우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연탄이 자신을 태운다는 것은 주위를 따듯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태운다는 것은 사랑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랑의 불로 자신을 소진시켜 죽어가는 모습이 가장 살아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진되는 이유는 바로 또 다른 누군가를 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하느님은 그 아기가 그들의 죄의 탓으로 죽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거친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기를 살려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죽자 다시 왕의 의복을 입고 먹고 마셨습니다. 아기가 죽으면 슬퍼해야 당연하지만 다윗은 고행을 멈추고 편안함을 찾았습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이 소진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희생하는 이유는 아기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기가 죽었다면 소진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아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진정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소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지 못한 아기를 위해서는 자신 또한 희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남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겨 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줄 아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남을 죽이려는 사람, 그런 사람의 하느님은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이철환 작가가 수집한 실화 중, ‘눈 치우는 할아버지’(연탄길 3)란 글이 있습니다.

사회복지과에 근무 중인 영주 씨는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기 위해 육교를 오릅니다. 육교 계단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단 중간쯤에서 어떤 노인이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눈보다 하얀 노인의 머리칼 위에 눈송이가 수박이 쌓여 있었습니다. 삽질을 하는 노인은 힘이 달리는 듯 손을 떨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연세도 많으신 것 같은데, 이런 일은 저 같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요...”

젊은이들은 회사 나가야지요. 이런 일 할 시간이 있나? 이런 일은 나 같은 노인들이 해도 충분해요.”

영주 씨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미안했다.

할아버지, 댁이 이 근처세요?”

요 앞동네에 산다오... 사실은 내 아들이 이 육교에서 넘어졌거든. 그때 머리를 다쳐서 지금까지 삼 년째 방 안에만 누워 있다오. 아들놈 때문에 이 늙은이 가슴이 새까맣게 타 버렸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내 아들처럼 될까 봐, 눈 오는 날이면 이렇게 나와 눈을 치우는 거지요.”

할아버지, 저도 좀 도와 드릴게요.”

아니오, 하나도 힘들지 않아. 이것마저 할 수 없다면 아마 더 힘들었을 게요. 나는 삽으로 눈덩이를 떼어 내며 자식에 대한 아픔까지 떼어 내고 있는 거라오. 이 일을 하고 나면 응어리진 마음이 많이 풀려. 이 일을 하는 건 아들놈 빨리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니까요.”

 

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아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십니다. 한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모든 이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때 자녀에게 대한 사랑은 모든 이에 대한 사랑 안에 하나가 됩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태양과 같이 모든 이를 비추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줄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도 살아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의 덕으로 살기 때문에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줄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태양도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느님도 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기에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과의 사랑의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와 나의 사랑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촛불을 합쳐도 태양의 빛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사랑 앞에서는 우리 인간들끼리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혼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서 또 다른 촛불을 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분의 사랑만으로 또 우리의 살아있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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