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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희망하라, 하느님을- 2013.11.10 연중 제3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0 조회수412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3.11.10 연중 제32주일, 마카베오 하7,1-2.9-14 2테살2,16-3,5 루카2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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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희망하라, 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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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문이요 절망의 벽입니다. 희망의 빛이요 절망의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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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이불요(光而不耀),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 하느님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살아있는 ‘희망의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목을 보고 자주 찾는 제 책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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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생각 있는 사람들의 절박한 물음이요 이보다 더 중요한 물음도 없습니다.

반대의 질문 역시 중요합니다.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11월 위령성월에 숙고해야 할 두 질문들입니다.

사실 이 두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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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론 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부제는 '희망하라, 하느님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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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어야 합니까?’라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이르게 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곧장 삶에 대한 성찰로 옮겨갑니다.

본격적 강론에 앞서 세 가지 예화로 시작합니다.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전달된

어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의 넋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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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려했어요.

지금은 아니 예요.

왜냐하면 그이가 없어요.

내 모든 것인 그이가 없어요.

이 괴로움 누가 압니까? 하늘이 압니까, 땅이 압니까?

신이 있다면 우리 그이를 돌려줘요.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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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죽음 같은 절망의 현실을 사는 분입니다.

‘잉여(剩餘)’라는 신문 칼럼의 글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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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대다. 30대 명퇴, 청년 실업과 취업난, 소매상 도산, 88만원 세대, 양극화,

교실붕괴, 얼마 전 모 대기업의 입사 시험에 9만 명이 응시했다는 기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을 다 어떻게.

요즘은 어딜 가나 수백 대 일이 기본이다.

…원래 잉여는 남는 장사, 이익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잉여가 되었다.

없어도 되는 사람.…대부분의 인간이 잉여이거나 잉여 직전인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의 공포에 떨면서도 먼저 잉여가 된 이들에게 안도감과 경멸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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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의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시골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는 뜻있는 분의 인터뷰 기사 중 한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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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노동자들이 그랬잖아요.

‘이 사회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 같다.’고.

그때 너무 슬퍼서 통곡을 했어요.

그 말이 저는 정치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이야기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농촌도 똑같더라고요.

왜 저렇게 좋은 농산물들을 생산하는 농민들을 밖으로 밀어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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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 하거나 ‘밖으로 밀어내어’ 소외시키는 오늘날 죽음의 현실입니다.

곳곳에 암처럼 번져가고 있는 죽음의 문화, 죽음의 현실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이 전부가 된 절박한 세상살이입니다.

이런 현실이 더욱 깨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게 하고 희망을 찾게 합니다.

희망을 찾는다는 말은 결국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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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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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따로 죽음 따로가 아닙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직결됩니다.

삶을 진지하게 맞이하지 못하기에 죽음도 진지하게 맞이하지 못합니다.

삶을 모르면 죽음도 모르고 죽음을 모르면 삶도 모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면 제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아, 이제 죽어도 좋다.’ 고백하며 눈감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삶이 환히 들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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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고마움을, 삶의 진가를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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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찾았던 노 수도사제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앨범 사진들은 다 태워 정리했고 남은 물건들도 서서히 정리 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돌아가실 때도 아닌데 죽음을 서서히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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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는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죽음을 기억할 때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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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일생(一日一生), 인생사계(人生四季), 제가 자주 예로 드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루로, 또 일 년 사계로 압축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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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갑자기 좋은 죽음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며서도 가장 멀리있는,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 가장 모르는, 날짜를 알 수 없는 마지막 시험의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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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그대로 삶의 반영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유치한 질문을 통해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천박한지 깨닫습니다.

반면 1독서의 일곱 형제의 장렬한 순교의 죽음 장면을 대하면서

이들이 평소 얼마나 하느님께 희망을 둔 진지한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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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답은 희망의 하느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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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없이는 삶에 대한 답도, 죽음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영원히 물음만 있고 답이 없는 공허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중심이요, 방향이자 의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 안에서 살다가 하느님께로 가는 삶의 여정이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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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죽음은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삶과 죽음의 답이 하느님이라는 말은

바로 하느님이 삶과 죽음의 활짝 열린 희망의 출구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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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느님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잃어, 희망의 출구를 잃은 오늘 날 사람들,

흡사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들 같습니다.

오늘 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에 일곱 형제들의 순교 장면을 보십시오.

절망 중에도 희망의 출구가 활짝 열린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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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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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은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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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 모두가 빛나는 하느님 희망이 있었기에 비굴하거나 비겁함이 없이

영예로운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강한 사람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 희망입니다.

짙은 구름 넘어 희망으로 빛나는 태양 같은 하느님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존엄한 품위의 삶이요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은 희망의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위령성월은 그대로 ‘희망의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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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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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이치도 이와 흡사합니다.

수확이 끝난 배농사의 전지로 또 배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끝은 시작이듯이 죽음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현세 삶의 연장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에 의한 완전한 변형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답변이 명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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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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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미사경문의 위령감사송 대목 역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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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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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도 주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님 안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요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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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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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사는 이들은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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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천상영혼들, 연옥영혼들, 지상영혼들인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살아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 살아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하느님 안에 있다는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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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은 회색 빛 '우울한 달'이 아니라 하느님 희망으로 빛나는 '희망의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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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과 죽음을 깊이 성찰하는 달이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느님 목표와 방향을 새롭게 확인하는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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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시며,

우리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주십니다.

따뜻한 밥이, 따뜻한 사랑이 그리운, 추워지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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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따뜻한 밥이자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은 우리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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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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