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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15일(금) 聖 알베르토, 福女루치아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4 조회수539 추천수0 반대(0) 신고


 

 

11월15일(금) 음10/13
聖 알베르토, 福女루치아


 


 

알베르토(대) (11.15)

성인명 알베르토(대)(Albert the Great)
축일 11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00-1280년
같은이름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성 알베르토(Albertus, 좌)와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중)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우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남부 독일 슈바벤(Schwaben) 지방에 있는
도나우 강가의 소도시 라우인겐(Lauingen)에서 그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223년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시기에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쾰른(Koln)에서 수련 기간을 보내고 신학을 전공한 알베르투스는
1220대말 힐데스하임(Hildesheim)을 비롯하여 프라이부르크(Freiburg),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강의하였다.
쾰른으로 돌아올 즈음에 그의 지식과 강의에 대한 명성은 날로 치솟고 있었다.
1243년 혹은 1244년에 파리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여
1245년부터 그 대학의 교수로 강의하였다.

이 시기 그의 제자로는 훗날 위대한 신학자가 된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가 있었다.
그는 토마스의 천재성을 일찍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는 지적으로 나의 좋은 동료이자 친구이다.”
이말 그대로 토마스 데 아퀴노는 1274년 죽을 때까지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 지냈다.
1248년 도미니코회는 쾰른에 ‘수도회 대학’(Studium Generale)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알베르투스를 임명하였다.
 
 





 
 
그는 쾰른의 수도회 대학 철학과 교수로서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1254년에 알베르투스는 독일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로마(Roma)로 갔는데,
그곳에서 빌리암 아르무르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데 진력하였다.
빌리암은 그 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신학 고문으로서 봉사하였다.
알베르투스는 1257년 관구장직을 사임하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1259년 타렌타시아의 베드로(Petrus)와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교과 과정을 작성하였다.
그의 소망에 반하여 그는 1260년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쾰른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2년 후에 사임하였다.
 





 
그는 1274년의 리옹(Lyon)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특히 로마와 그리스 교회의 일치에 공헌하였다.
또한 알베르투스는 1277년 파리(Paris)의 스테파누스 탕피엘 주교와
그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대항하여
토마스 데 아퀴노와 그의 입장을 옹호한 사건도 유명하다.
그 당시 알베르투스는 소위 만물박사로 통한 듯하다.
그의 저서에는 성서와 신학 일반은 물론 설교,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한 논문들이 많이 있으며,
그의 관심은 천문학, 화학, 생물학, 인간과 동물의 생리학, 지리학, 지질학
그리고 식물학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감각-경험으로 얻는 지식의 유효성 및 조직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치 확립 등이 돋보인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런 종합을 완성한 신학자이다.
성 알베르투스는 1931년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 칭호와 더불어 시성되었고, 과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최초의 위인이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님의 스승이셨던
교회 학자 성 알베르토 님이시여,

성령의 빛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루치아(11.15)

성인명 루치아(Lucy)
축일 11월 15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나르니(Narni)
활동연도 1476-1544/1547년
같은이름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성녀 루치아(Lucy)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나르니에서 11명의 형제 중에 맏이로 태어난
루치아(Lucia)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키로 작정하였으나,
그녀의 나이 14세 때에 거의 강제적으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약혼반지를 버리고 완강히 거부하다가,
다음 해에 그 젊은이와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그녀가 고해신부의 충고도 있었지만
성모 마리아를 환시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명목상의 부부였지 실제상의 부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3년을 살다가 남편이 아내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용하자,
그녀는 도미니코 재속 3회의 수도복을 입고
비테르보(Viterbo)의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오상 성흔을 받았다.
매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피가 흘렀는데,
3년 동안이나 계속되니 이를 숨길 수 없었다.
교황청과 의사들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전의 남편도 이 현상을 보고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또 페라라(Ferrara)의 공작 에르콜레는 그녀를 위해 수도원을 지어주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그러나 1505년부터 그녀는 대중들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39년을 수녀원 안에서만 살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1544년에 그녀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있었음을 알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성모님의 환시에 따라 결혼하여
결혼 즉시 3년동안 동정을 지키다가
남편의 허락으로 도미니코 3회의 수도복을 입은 님

군중을 피하여 수도원에 은둔했던 3년간
수요일 금요일마다

오상의 상흔에서 피가 흐르는 신비 체험을 겪었던

복녀 루치아 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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