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교회의 시체와 저승의 세력 독수리 [나타나심과 찾지못함]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5 조회수296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지혜서 / 금요일 제1독서 참조>

바리사이들처럼 오늘날에도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없으니.....[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하느님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죄,악스러운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멸망의 노아 때와 같은 일, 세속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다가 멸망하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 37 / 금요일 참조>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만큼은 멸망이 없을 줄 알고 다른 곳을 묻습니다. 그러나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암시로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죄,악스러운 것들과 세속적인 욕망의 때가 묻어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시체들에게는 하느님의 생명이 없어 저승의 세력인 독수리들이 모여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살던 그 시대에서나 오늘 날, 제자들이 사는 이 시대에서나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오늘 날에도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예수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못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간직하지 못한 이들은 죽은 이들이며 시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로마서 14, 17) 일이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했습니다.그리스도의 몸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닙니다. 죄,악스러운 것들과 세속 욕망의 때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진정으로 일치하는 구원의 삶, 사랑의 성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무 생각없이 율법에 매인 일처럼 그저 먹고 마시는 ㅡ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ㅡ 이렇게 너희 가운데에 오지 않습니다.그리스도와 진정 결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과 세속에 눈을 돌리는 노아 때와 롯의 아내와 같은 오늘 날에도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기 까지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이신 예수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내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성체성사, 사랑의 성사)에 일치하는 신자들(각자들, 공동체)도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하심은 영성체에서도 참되고 거짓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죽은 이들에게는 시체를 먹는 식성의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하셨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르치기 입니다. 죄,악과 세속의 때를 벗는 순수한 믿음으로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랑 곧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예수님 삶(성체성사적인 사랑의 일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의 세력인 독수리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아래의 게시글을 읽어야 ㅡ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하느님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시글 참조 ; 바리사이들처럼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없으니)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 20 - 25 / 목요일> 

상기의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의 나라, 사람의 아들의 날,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 그러나 그는]이라는 말씀에 집중합니다.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엘리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하고 물었다...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 10 - 12)

특히,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아들의 날""그러나 그는" 이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봅니다. 바리사이들이 질문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과 예수님 자신(그러나 그는)"으로 질문의 대답을 대신 합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하신 다른 말씀을 한편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 20 - 23 참조)하셨습니다.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바리사이들은 전혀 잘 알아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셨습니다.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사람의 아들의 날"과 "그러나 그는"이라고 분명하게 연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그 나라는 예수님을 멀리하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요한 18, 1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지금을 보라'라고 바리사이들에게 지적해 주십니다.

이같은 일은 그 당시 뿐만아니라 현재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각자, 공동체) 안에 사시지 않는다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가르침과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그들처럼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강도의 소굴과 같은 자신 안에 혹은 공동체 안으로, 강도의 소굴을 정화시키고자 오신 예수님을 참으로 모시지 않고 물리친다면 그들과 같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대나, 현 시대에서나, 다가 올 시대에서는 여전히 사랑을 미워하고, 사랑을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는 일에서 반복되어 집니다.  자신 안에, 공동체 안에 '사랑을 없애는 일'은 많습니다.

세속과 타협하면서 발생하는 온갖 이기적이고 집단적인 현상은, 사랑으로 정화시키러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오히려 사랑을 물리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사랑'을 미워했던 것처럼 오늘도 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께서 사시지 않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분의 사랑'이 자신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사시고 계시는지요.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을까요. 과연 이 믿음이 있다면, 이 믿음을 실행하는 순종에는 머물고 있는지요. 순수한 믿음이 없고 믿음에 세속의 여러 때가 묻어 있다면 이 믿음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나약하다는 손쉬운 핑계거리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처럼 '거짓된 가르침'을 펼치는 몇몇 분들에 의해서 오늘 날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사랑 때문에 모멸과 모해를 당하시고 마침내 죽임의 수난을 받으십니다.세속과 타협하면 어김없이 순수한 믿음은 없어지고 그래서 대중들 조차 때묻은 믿음으로 추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믿음이 나약한 사람을 돕는 것과 추락하게 만드는 일은 엄격하게 다릅니다.'세속의 힘'들에 유혹당한 거짓된 가르침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일 뿐입니다. 코린토2서에는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손쉬운 세속의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이 참으로 자기 및 공동체 안에 살아 있어 일치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의 힘에 결코 무기력해 지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그 정신이 다르지 않고 같을 경우에 오늘 날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 사시지 못하게 됩니다.오히려 사랑을 못 박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거짓의 힘이 공동체 안에 설치면 사랑이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는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보다는 세속적인 것들이, 예수님 대신에 공동체 안에 꽉 차여져 있는 것입니다.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저미다 세속적인 것들을 신뢰하고 '예수님적'인 것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대중들에게 '사랑을 믿지않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악스러운 것들(마귀들)을 서로 공유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셨는데, 하느님의 영(성령)이 공동체 안에 없을 경우에는 죄악스러운 것들(마귀들)을 성령의 힘으로 쫓아내지 못하여 사랑스러운 것들(거룩한)들은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 보다 먼저 예수님(그리스도의 몸)과 결합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자기 몸 안에 그리고 공동체 몸 안에 모시는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뜻이며 '사랑의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인 줄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듯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에서 나신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너희 가운데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의 나라인 것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계약입니다. 죄악스러운 것들을 서로 서로 공유하는- 거친 삯꾼들의 공동체는 그들의 노동력에 지배 당하는 기업체적이고 수용소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없으니 - 성 가정의 집들 역시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며 '사랑(예수님)이 있는 나라'에서는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