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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녹슨 영성 - 영적 비만에 걸리다 [ 몸 신앙 2. 끝맺음]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8 조회수398 추천수0 반대(0) 신고

 

잠시 '비만'이 무엇인지 짚고 갑니다.   한편, 지난 게시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란 [주님과 통하는 삶] 용례로 이해>와 앞의 <영적 비만을 해소해야 한다 [통하는 삶, 기도] 몸 신앙 2>를 읽지 않는다면 지금의 이 글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진다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글에서 '비만'이란 내적인 의미로 욕망의 포화 혹은 죄악성이라는데 있습니다. 이것의 반대되는 의미는 '가난'이 있습니다. 육적 비만이라고 하면 욕망으로 포화된 육체이고 영적 비만이라고 하면 죄악성에서 죄악에 대한 분별없는 상태[죄악 + 자신]을 이 글에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적 비만에서 '포화된 욕망'은 육체에서 필요하고 좋은 요소를 제외한 더 이상 불필요하여 '썩어지는 것'들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비만은 자기 안에 자리잡은 죄와 자기 곁에서 도사리고 있는 악의 분별 없이 영적 차원에 열중함을 가리키고자 합니다.

이 글의 바로 직전에 전개된 [육체의 형상은 영혼]이며 [육 + 영 = 몸(단일체)]이다는 글에서육적 비만은 영적 비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지지 않는 자신의 몸입니다.육체의 비만을 수리하지 않고서는 영적 차원의 열정적인 훈련은 성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비만은 - 영적 비만인데, 영적 비만의 상태는 육을 움직이는 동력원이 될 수 없고 영적 비만의 상태는, 영적 차원이 '녹이 끼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영적 차원을 위한 영성적 열정은 성과적인 효과를 기대하지 못합니다. '모래 위에 집짓기'와 같습니다. 

[육체의 비만 상태를 무시한 영혼의 영성적 열정]은 그렇지 않아도 육적 비만 때문에 영적 비만인 상태를 더욱 영적으로 비만하게 만드는 격이 되어집니다. '비만을 없애어야 할 판에 또 다른 영적 비만'의 추가는 영적 차원의 비만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육적 차원은 영적 차원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 차원은 육적 차원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인 것입니다.영적 차원의 영성적 열정은 육적 차원의 비만 상태부터 수리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영적 비만을 해소하기 위한 '영적 운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비만에 대한 영적 운동은, 육적 차원과 분리된 영적 차원의 영성적 열정에 노력하는 것과 다릅니다. 먼저 육적 비만을 없애어야 - 영적 비만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 비만이 해소되어진 이 영혼의 상태에서 영성적 열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영적 운동)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욕망의 포화]로 가득차 있는데 [영성적 열정의 효과]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시간이 지나면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영적 감흥에 집중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영적 감흥으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육적으로, 심적으로 보상은 차지할 수는 있지만 영적 차원은 변함없이 허술할 따름입니다.

육체는 욕망 혹은 육정으로 가득차 있고 [욕망(육정)으로 인한 죄,악성]은 영적 비만을 이루며 영적으로 이를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이같은 영적 차원의 '녹슨 상태'에서 영성적 훈련의 열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명확하게 자각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다음은 예시입니다.

육체의 포화된 욕망(육정)에서 [죄,악 +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랑이라는 면'이 놓여져 있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고생하며 고난을 겪기도 하는 일입니다.자신이 죄악 쪽으로 기울여진다면 이미 그 육체의 영혼도 죄,악 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 + 영혼은 죄악성으로 기울어져 있는 탓에 자신의 몸(육 + 영)은 '사랑' 쪽으로 택할 수 없습니다.

영성적 훈련으로 영적 차원을 생각해 보겠지만 얼마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시 죄악 (예시; 술)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게시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란 [주님과 통하는 삶] 용례로 이해>를 반드시 필독해야 합니다.그 과정이 적혀 있습니다. 읽지 않고 이 글을 이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악을 버린다고 죄악성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악과 사랑]의 두 갈림길에서 죄,악을 버린다고 해서 또한 자신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한 순간의 일입니다.어떤 육체적 상황에서 다시 유혹이 오면 죄,악을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육적 비만에 걸린 탓입니다.

힘들고 고생하는 사랑의 선택으로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육체는 욕망(육정)에 따라 죄,악 쪽으로 행동하고 맙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 사랑 쪽으로 선택할 때에 죄,악을 참으로 버리게 되고 또한 자신을 참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만이 아니라 가난입니다.

육체의 비만(육정)을 먼저 해결하여-> 영적 비만(죄,악성)을 해소해야 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이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라고 의미합니다. 주님과 결합한 통하는 삶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님과 결합한 통하는 기도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벽한 몸'을 말하지 않습니다.육체의 비만을 줄이면서 - 영적 운동의 영성적 열성의 한 축이 되는 기도생활 등의 신심활동을 한다면, 영적 비만을 예방하고 영성적 성과를 얻게 될 것으로 봅니다.<나 홀로 수덕주의>는 영적 비만입니다. 육적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될 때 영성 차원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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