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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9 조회수659 추천수0 반대(0) 신고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라오디케이아는 사실 이름이 그러니까 동명이인이라고  하죠? 우리가 이름 같은

것을 여러 명이 함께 쓸 때. 열 개 남짓 라오디케이아로 불리웠습니다. 이 성경에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리코스 지역에 세워진 도시로

뭐 많아요. 라오디케이아가. 10개나 되는데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구요. 에페소하고

동아시아를 연경하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고 교통의 요지다보니까 주위의 어떤

여러 도시들과 연합을 합니다.

 

이렇게 연합을 해서 자, 예컨대 큰 도시가 있으면 주위에 위성 도시가 있죠? 위성 도시

들이 큰 도시로 몰리겠어요? 큰 도시가 위성 도시로 가겠어요? 큰 도시로 몰리죠?

몰리면 뭐가 몰리느냐? 예, 많은 일 때문에 저번에 노동조합 같은 거 말씀드렸죠?

그런데 여기도 동업끼리 모여서 같이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뭐가 많이 쌓이냐 하면

돈이 많이 쌓여요. 그래서 은행, 요즘식으로 하면 은행 이런 것들이, 금융 이런 것들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섬유 공업이 아주 활발합니다.

 

* 라오디케이아: 동업 조합이 번성했고  섬유공업, 향유와 연고를 통한 제약업이

   발달했음

 

제가 있는 대구도 이 섬유쪽이 아주 유명한데요. 여기도 섬유가, 그리고 향유, 연고

 우리가 이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면 눈에 바르는 안약도 만들고 연고도 있고 뭐

정련된 금 이런 거 다 재화와 관련된, 돈과 관련된 그런 어떤 활발한 그런 산업이

있구요. 그래서 아주 잘 삽니다. 부자 동네입니다. 서울의 부자 동네는 어디죠?

예, 강남이예요? 하여튼 그러한 어떤 모습이 있는.

 

그러면 그리스도 신자는 잘 살았겠습니까? 못 살았겠습니까?

예, 조금 참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세상하고 참 적응이 안 됩니다. 제대로 살려면.

그래서 약간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질투까지는 아니고 약간 반감? 잘 사는 것에,

부유함에 대한 반감이 약간 요 라우디케이아 교회에 약간 들어 있습니다.

예, 그래서 어떻게 들어 있는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3,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시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아유, 여기는 인제 하느님의 창조 근원까지 튀어 나왔습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예수님이 당신 표현 하는데 있어서 호칭들이 이제는 뭐 끝까지 갔어요. 인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습니다. 창조의 근원까지 가버렸습니다.

 

자, 그런데 처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뜻은 우리 진실되다. 뭐 이런 어떤 형용사적인

어떤 의미인데 이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호칭을 사용하는 게 이게 유일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내 이름은 아멘이다. 이게 좀 그런데 아멘, 진실 이 단어를 우리가 뒤에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인이가 말한다라고 돼 있지요?

 

그래서 왜 성경 어떤 주석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게 아멘이 아니고 아마도

아몬이 아닐까? 이 막 적다보면, 필사를 하다보면 잘못 적을 수 있거든요. 아멘

아몬 비슷하죠? 우리 말로도. 그러니까 히브리 말로 적어도 되게 비슷합니다.

 

이게 왜 그런고 하니, 잠언 8장 30절에 보면, 아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뭐냐하면,  * 아몬(잠언 8,30): 어떤 작품의 주인. 그러니까 창작자 뭐 이런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아멘으로 요기 적었는데 물론  이거는 하나의 가설

이겠지요. 어떠한 이 주석 학자가 그 아몬으 아멘으로 잘못 적었지 않았을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아멘이라고 적혀져 있으니까 아멘이라는 단어를 가지고도 우리는 또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당신 말씀은 진실

되고 그래서 내가 진실되이 따르겠다. 참되게 당신 뜻을 따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멘 그 차체죠. 하느님 말씀에 아멘 그 자체죠. 그렇게 뭐 이해를 우리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뒤에 이제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이니까 동시에 아멘이니까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

때문에 아마도 창작자, 어떤 물건 만드는데 있어서 주인, 주된 역활을 하는 이라는

아몬이라는 것이 매치가 되니까 그런 가설을 이해하는데 아멘이라고 우리가 이해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되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받으신 이니까

그 자체로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이가 말한다.

 

자, 여기 창조의 근원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근원, '아르케'입니다. 그리스 말로

아르케인데 이 아르케는 뭐와 연결해서 꼭 같이 가야 되느냐 하면, 처음과 끝. 끝이라

는 단어를 꼭 염두에 두는 끝과 대칭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자, 태초에 하느님께서. 태초 할 때 '브레쉿'이라는 히브리 말인데 그 안에, 그 때에

브레쉿 그러면 태초에 브레쉿입니다. 히브리 말로. 그 태초라는 말은 이 단어도 동시에

끝날에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뭔가를 만들었다 히지마는 실상 그 의미는 처음

에 고 때만 만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창조 사업은 계속된다.

 

여기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씀은 창조할 때 고 때만 딱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르케는 끝과 함께 가야 될 단어이기 때문에 창조 그것이 끝까지 가는.

* 근원(아르케: 그리스 말) : 끝까지 가는(알파와 오메가)

그래서 쉽게 얘기해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이것이 우리가 아르케라는

이 근원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해해야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만들었다 그러면 언제 만들었을까? 그때가 언제일까?

몇십만 년 전, 몇백만 년 전 일까? 이런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 순간에도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라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안다.

 

어떻다구요? 미지근하다. 예, 라오디케이아를 비롯해 이 일곱 교회 전체가 어떻게

보면 지진을 겪고 온천, 화산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온천수와 비유해서 말씀

하신 건데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미지근함.

 

* 미지근하다: 사회와 타협하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사회와 타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어떤 표현을

당시에 어떻게 했냐하면, 그리스도교 덕목은 비타협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의 덕목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영지주의 입장에서는 사회에 타협하라는 거죠.

적응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어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을 안 해요. 완고하고

고지식하다는 거죠. 왜 좀 "아이, 좋은 게 좋은데 좀 안 되겠냐?" 이렇게 막 합니다.

그렇게 하는 그 타협하는 거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미지근하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 확실히 하라는 거죠. 타협하지 말고

똑바로.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 묵시 3,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제 일곱 개 교회 마지막 편지 안에서 강합니다. 이것이. 아주 강하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관계 단절을 하겠다는 말은, 이때까지 다 어떻게 하셨나? 관계를

하겠다, 일치를 하겠다 불러 주셨는데 니가 확실히 신앙을 지키지 않으면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라는 것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묵시 3,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

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부자라고 그랬죠? 이 지역이. 그런데 가난하다. 이것을 복음하고 연결하면 쉽습니다.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이가 행복하다죠?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는 세상적인,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친교 안에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너는 그런 어떤 물질적인 것에 휩싸이다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사회와 타협하고

대충 이렇게 살아가고 하느님의 뜻은 나중에 인제 옆으로 밀쳐나 놓고 돈벌이에 바쁜

그런 모습에 대한 경고일 수 있습니다.

 

* 묵시 3,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불로 정련된 금은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흰옷. 알죠? 일치, 영광 속에 들어가라.

 

* 묵시 3,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하느님께 돌아오라. 예수님께 일치라여라는 것이죠.

 

* 묵시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요. 함께 먹어요. 아가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가서 보면.

 

* 아가 5,2: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

 

문 열어 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이렇게 돼 있죠?

사랑하는 사람, 요때 사랑이 필레인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신적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필레인이라는 인간적인 사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 묵시 3,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요기의 사랑(필레인)은 신적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

 

참으로 인간 안에서 인간다운 사랑을 하겠다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이렇게 "문을 열어 다오!" 하는 거와 같이.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여기서 먹는다라는 의미는 뭐냐? 성찬례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예수님을 함께 나누는 것이죠.

 

*묵시 3,20: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라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자, 함께 나누었으니까, 예수님의 성체를 나누었으니까 내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되어서 함께 앉아 있죠.

 

* 묵시 3,21: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자,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는 부자 동네라고 했습니다. 강남이든

그 어디든 예, 부자 동네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 그 부유함 거기에 휘둘려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뭐 제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뭐 신앙적인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아닌 그냥 그렇게 성당을 취미 생활을 하듯이 다니거나, 신앙을 정말로 끼리끼리,

유유상종하기 위해서, 내 이해 관계에 맞게 끔 그렇게 따라 다니고, 성당에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면에서 강한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은 필요하죠. 재화는. 그러나

필요한 것을 절대적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어떠한  정말 사

랑처럼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나를 사랑해 달라!" "

사랑 안에 함께 있게 하자!"

그러한 사랑을 무시하지 마시고 재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재화는 필요한 것이고

사랑해야 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가 믿어 고백하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천상 예배,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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