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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저 세상 부활은 이 세상 겸손에서/신앙의 해[364][-1]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2 조회수537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수원 교구 정자동 성당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다. 저녁에 메뚜기는 ‘우리 내일 또 놀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니?’라며, 메뚜기의 설명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았다. 깊은 가을에 개구리는 ‘우리 내년에 또 만나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지?’라며 개구리의 장황한 설명을 통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루를 살다 죽는 하루살이, 한 해를 살다 죽는 메뚜기는 내일과 내년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살이는 오늘, 메뚜기는 한 해 뿐이었기에.

하루살이와 메뚜기의 한계를 보면서 인간과 하느님의 눈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게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활하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 알려 주신다. 사두가이들은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알지 못하는 이며, 메뚜기처럼 ‘내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안다. 내일과 내년, 영원한 시간이 있다는 걸. 

죽은 이들이 주님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은 가톨릭 교회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신앙은 단순히 죽은 신앙에 불과하다. 못된 사두가이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부활을 믿었다. 사실 부활은 신앙인들의 믿음의 바탕이자 복음 그 자체이다. 부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거고, 복음도 거짓일 게다. 죽음으로 시작된 부활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이리라.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의 부활 신앙에 일침을 가하셨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 따위에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곳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이다.  

부부 관계도 이웃 관계도 팔을 오므리고 자신 안으로만 안는 사랑에서, 내어 주는 그런 사랑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게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처럼 사는 방법이다. 그러니 부자도, 가난한 이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할 따름이다. 현세에서 좀 가졌다고 으스댈 게 아닌, 자비로우신 주님을 본받아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게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닌 ‘깨달음’이다.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 이 세상의 ‘인연’과 ‘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이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될 이 간단한 걸 어렵게 생각한다. 사실 겸손해야 할 게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죽은 이가 살아난다는 믿음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게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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