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가난한 과부 [완전한 가난 / 수정]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4 조회수424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 1 - 4 / 월요일>

...................................................


하느님의 어린양 처럼 속죄의 제물이 되시어 하느님의 생명을 줄 수는 없는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어린양에 충만하게 내재되어져 있는 당신의 사랑만큼은 - 우리 인간도 사랑의 모상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합일'을 이룰 수 있슴을 사랑의 계명에서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속의 가난 
가난이란 물질적 결핍보다는 청빈, 소박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복음삼덕의 하나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생활을 의미하며 이 때에는 물질적 결핍의 관점보다는 물질적 소유욕망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즉 스스로 취한 단순 소박한 생활모습이다. -가톨릭대사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첫째 조건 = '가난한 과부'(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어 주는 참된 가난한 자)에서 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 안에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해서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천상의 것들마저 집착이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집착에는 언제나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사실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과 조화로와야 하는 것입니다.따라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은 생명이 아닌 죽음 뿐입니다. 소멸입니다.모든 것에 생명이 살아 나도록 감미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모든 것을 없애는 파괴(소멸, 없앰)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 얽매여 있는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자신의 육정과 욕심이 가득차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아서 결국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덜 가지려고 노력할 수 있을 때에 영혼은 육정의 온갖 사욕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고 하여 벗어나고자 이것들을 없애 버리려고 한다면 그것들은 언젠가 다시 되돌아와서 자신을 한순간에 덮쳐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모든 것들을 자기 안에서 자신을 비워 모든 것들로 감싸 안을때에 이는 없애는 소멸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을 주는 것이며 모든 것에 생명이 풍성해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 안에 있는(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는) 자신(목숨)마저도 결코 버리지 못한다면 실상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였다(얽매였다)는 뜻입니다.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 자신을 속박시켜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주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 안에 모든 것이 담아져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 있다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들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유혹하기를 세상 영광(여기서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세상 영광을 거절하였습니다.이는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 자신 안에 담겨져 있으시다는 것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당신 자신 안에서 다스리신다 설명이 됩니다. 
사탄은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상 모든 것(영광) 안에 예수님을 속박시켜 (들어오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당신 자신 안에 세상 모든 것을 사랑과 생명으로 포용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모든 것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조화가 아닌 파괴는 생명이 아닌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반대로 자신 안에다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것입니다.겸손한 자세입니다.자신 안에 겸손으로 만물을 포용하는 것은 만물의 다스림이지 만물의 지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영광 ( 모든 것 안에 들어가는 것 )을 거절하셨던 것이다 할 것입니다.
세상 영광의 모든 것들 안에 들어가면 - 세상 영광(모든 것들)에 도리어 지배당하고 맙니다.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경배드리며 '당신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러 오셨습니다(사랑의 탄생이 사랑의 구현을 이루게 합니다).겸손으로 만물을 당신 안에 가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만물의 모든 것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희생으로 모든 것들이 사랑과 생명으로 넘치게 하셨습니다.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애는 파괴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든 것들에게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평화의 생명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세상)에게 영광을 받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참으로 영광을 주시는 분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 뿐이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그렇게 아낌없이 내어 주신 이같은 '무소유의 참된 가난'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람은,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된 성체성사적인 사랑의 삶입니다.
 
자신의 '어둔 밤'은 자신의 수덕에서 거쳐 지나는 것이지만, 만일 수덕에 빠진다면 이 어둔 밤은 영혼의 동물적인 탐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덕에 게걸들린 탐식인 것입니다.자기 안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께 집중(순수 그리스도)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영혼들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갖 빛이 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 내면에 사랑이 (자신을 내어주는 -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욕과 맛)들만이 자기 안에 꿈틀거리고 자기 자신만 커져만 가게 됩니다. 자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애심에 묶여버리는 것입니다.
이 자애심은 '비우고자 하는 자신' 곧, '자기(자아)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자아인가 ? '비우고자 하는 자아' 자체가 자기 안에 있다는 자애심입니다. 자기 비움(버림)이 아닙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기는 사실 '비우지도 못하는' 자아에 묶여 버리고 맙니다. '자기 비움'(자기 버림) => '완전한 가난' => '자신을 비우는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것' 뿐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이지요. 성인(십자가 성 요한)은 우선 우리의 감각적인 것(비우고자 하는 자기)을 영적인 것(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모든 영적인 것)들에로 집착(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했습니다.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자기 비움'은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끊어버리려는 모든 것들에 도리어 의지가 묶여 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제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람) 가운데'를 거니시게 됩니다.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는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가진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자신을 버리고) 그후 나를 따라라'하신 말씀에서 사랑의 실천은 재물을 '악'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재물에 묶여 있는 자기)를 버리는 것을 말함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비우고자 하는' 것 그 자체도 비우고자 하는 자신에게 묶여 있는 부자의 재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 '비우고자 하는 자신' = '비우고자 하는' 것에 묶여 있는 자기 ]의 자애심이지요.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런 자애심마저 끊어버리는 '순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뿐입니다. 
 
'순수 그리스도'란 -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 살아계시며 행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을 겸손, 순종이라 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처럼 자기 영혼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만 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따름은 자신을 내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 (그분의 그대로)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삶이고 삶은 기도가 되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서로 일치되어 집니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가난>이란  '가진 것이 완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 자기가 완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기를 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심'입니다. 성체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 자신을 거저 내어 주는 행동(완전한 표현)을 뜻합니다. 단순히 없는 것이 가난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 없슴을 비움이라 하지 않으며, 거저 주는 가난함, 거저 자기를 내어 주는 비움이 [ 완전한 가난, 완전한 비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가난> 이란 
'가진 것을 완전하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  '완전하게 내어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이란
자기를 완전하게 버리는 것 아니라  /  완전하게 자기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2008년7월10일. 첫 게시글 수정, 보완.
 
<완전한 가난, 완전한 버림>에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우리의 실천이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