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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28일(목) 聖女 가타리나 라부레 님..등♥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7 조회수507 추천수0 반대(0) 신고


 

11월28일(목) 음10/26
聖女 가타리나 라부레 님..등



 

가타리나 라부레(11.28)

성인명 가타리나 라부레(Catherine Laboure)
축일 11월 28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환시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06-1876년
같은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Catharina Laboure)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Catharina Laboure, 또는 가타리나)는 프랑스의 디종(Dijon) 근교
팽-레-무티에(Fain-les-Moutiers)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조에 라부레(Zoe Labou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고
또 언니인 루이자(Louisa)가 파리(Paris)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자
어린 나이에 삼촌의 카페에서 일을 하며 가사 일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라 읽고 쓰는 것조차 배울 수가 없었다.

14살 때부터 수도성소를 느낀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언니를 뒤따라 1830년 샤티용쉬르센(Chatillon-sur-Seine)에 있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의 파리의 자비 수녀회에 입회하여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지원기를 마친 그녀는 파리의 뤼 뒤박(Rue du Bac)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도원 성당에서 일련의 성모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 환시에서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하셨음을 표시하고
공경하는 메달을 만들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그녀의 고해신부인 알라델(Aladel) 신부는 이 메달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파리의 켈랑 대주교로부터 받고,
1832년에 처음으로 1500개의 만든 것이
즉시 백만 개의 메달로 불어나면서부터 유명한 기적의 메달이 된 것이다.





성녀 카타리나의 환시는 파리의 대주교가 임명한 특별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836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 결과 기적의 메달은 급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831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의 앙기앵(Enghien) 요양원에서 천한 일을 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였고,
고해신부에게만 자신의 환시를 늘 말씀드리고 지도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성모님의 환시를 통해

원죄없이 잉태되신 어머니의 신비를 알게 되었고

자비의 메달 제작의 기초가 되신 수녀


성모님의 일꾼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님이시여

천상 영광 가운데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11.28)

성인명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Joseph Mary Pignatelli)
축일 11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에스파냐(Espana)
활동연도 1737-1811년
같은이름 메리, 미리암,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피나텔리, 호세

 



에스파냐의 성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Josephus Maria Pignatelli)

 




 

 

1737년 12월 27일 에스파냐 북동부 사라고사(Zaragoza)에서
칼라브리아(Calabria)의 몬텔레오네(Monteleone) 공작 가문 출신의 아버지
돈 안토니오(Don Antonio)와 에스파냐 백작 가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성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Josephus Maria Pignatelli)
16세 때에 타라고나(Tarragona)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칼라튜드(Calatyud)와 사라고사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 결핵에 걸렸다.
1762년 사제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감옥에서 죄수 담당 신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들을 자애롭게 돌보아 '사형수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1767년부터 에스파냐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원장직을 물려받은 그와 동료들은 수도회를 포기하도록 종용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가 에스파냐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회의 해체를 선언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로 은거하여 약 20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예수회 역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백러시아(White Russia, 오늘날의 벨로루시) 선교를 위한 수련소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내어 후보자를 양성하는 한편
예수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실제로 1807년 사르데냐(Sardegna)의 예수회 관구를 회복시켰고,
로마(Roma)와 티볼리(Tivoli) 그리고 오르비에토(Orvieto)에서도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던 중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1811년 11월 11일 로마의 산 판탈레오네(San Pantaleon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도 원하고 또 노력하였던 예수회의 재건은 1814년 8월 7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교서로 발표되었다.
그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일컬어 '예수회의 재건자'라고 불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예수회의 재건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사제 성 요셉 마리아 피나텔리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예수회 한국 지부와 서강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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