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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속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클까요 [사랑의 영] 목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7 조회수415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 27 - 28 /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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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생전시절에 유다인들 사이에는 '자칭 메시아'라고 자신을 부르고 또한 남들에게 불리고 있었던 여러 메시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학수하고 기다리던 이같은 메시아들은 모두 하나같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사람들이 말하는 메시아를 포함하며 그리고 그들의 메시아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메시아) 

자칭 메시아들은 모두 땅에서 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서 물론 사람이시며 자칭 메시아들과는 분명히 다른 하느님이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받으셨고 군중들에게서도 조롱과 멸시를 심히 당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오래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셨는데 <그들의 메시아>를 훨씬 넘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던 것입니다.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에 비해서 너무나 포괄적인 이같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차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도 육신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차마 자신들의 이성으로써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지금 <구제자 - 구제적인 사랑>과 <구원자 - 구원적인 사랑>을 구별해서 말을 하고자 합니다.그러면 더러는 받아들지 못합니다. 단어로 따지고 어쩌면 [구제 = 구원]이다며 구제의 측면을 마치 구원의 측면으로까지 옹호 할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자칭 메시아들'은 구제적인 측면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적인 것들을 포함하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구원적인 차원이셨습니다.구제는 밥을 주고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칭 메시아와 남들에게서 메시아로 칭송받는 측면들이 구제자 -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밥을 주고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 뿌리내린 죄를 없애시고 악을 쳐부시어 인간을 죄악에서 해방시키시며 그리하여 인간 영,육의 고통에서 건져주십니다. 또한 지금과 다가올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는 구원자 - 그리스도이십니다.

보십시오.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돈을 줌으로써 버려진 가난한 이들이 헐벗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며 병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해 줍니다.이것은 구제입니다.하지만 돈만으로는 죄,악을 물리치지 못합니다.인간 안에 뿌리내려진 죄,악들은 <악에 의한 고통 (과) 죄에 따른 죽음>을 계속해서 초래시킵니다.

'그 공동체'도 역시 구제적인 사랑은 있지만 구원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돈의 힘은 있지만 사랑의 힘에는 무기력합니다.그리스도와 일치한다면 구제적인 사랑을 뛰어넘는 구원적인 사랑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구원은 죄,악에 대한 해방으로 버려진 이들의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따른 죽음에서 건져내는 사랑의 차원이어야 합니다.

이같은 사랑은 세상의 인간에게서 오는 -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느님에게서 오는 -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인간(세상)의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죄악의 고통에서 인간을 보호함에 있습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교서 참조)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 사랑에서 나신 사랑]이십니다. 이 도식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구제적인 사랑의 차원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구원적인 사랑의 차원이다는 뜻입니다. 아직 구제적인 사랑에 머무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이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1요한 4, 7 참조)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에서 오는 인간의 사랑(구제적인 사랑)이 아니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하느님의 사랑(구원적인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에서 나신 사랑>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는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면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다고 가리키는 것은 얼마나 실수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구제적인 - 인간의 사랑을, 구원적인 - 하느님의 사랑이다면서 죄악스런 배경을 정화시키고자 노력하지 못합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따른 죽음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구원적인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해 지기만 합니다. 세속의 힘들(돈 힘,규정들,삯꾼들)에 맛들어져서 영적인 식별을 잃어버린 탓이기도 합니다.

세속화가 되면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없고 '구원적인 사랑의 힘'을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 그리스도와 결합한 이들에게서 '사랑의 은총'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인간에게서 오는 구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하면 주님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토 6, 17 참조) 그리스도와 결합하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랑의 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영이 주어지면 (사랑의 은총) 영적인 식별을 잃지 않습니다. 세속화되어지면 주님에게서 오는 은총, '사랑의 영'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영이 없으니 -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지 못합니다. 대신에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해 지고 따라서 점점 겉으로는 아닌 척 - 거짓말 잘하는 온갖 술수만 늘어납니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고심하면서 세속화는 더욱 심화되어져 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적인, 영적인 고통에 민감하셨으며 그들의 이 고통에 다가가서 일치하셨습니다. 밥과 치료를 포함하고 이를 뛰어넘어 죄악에서 해방시켜 인간을 보호하고자 하신 바로 구원적인 사랑이셨습니다. '사랑의 영'은 - 영적인 고통의 측면까지도 제외되지 않으셨습니다. 겉으로 남들에게 거짓말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악을 없애지 못하시는 거짓된 사랑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와 결합된 공동체와 자기 자신은 사랑의 영으로 이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에페 3, 19 참조)] 그러므로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따른 죽음>을 감추고 속이는 거짓된 사랑은 - 그리스도와 떨어진 까닭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 사랑의 은총(사랑의 영)]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할 때 뿐입니다.주님께서 인간의 죄악된 고통에 당신의 고통으로 일치하셨듯이 공동체 및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고통'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속화되어져 죄악의 고통을 등한시한 탓에 있습니다.

속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클까요.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선동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사랑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창세기 때에 하느님께서 먹지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인간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창세기 때와 같이 다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창세기 때처럼 또 거짓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힘이 있는 용서>로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을 이루십니다 죄악된 고통과 죽음을 등한시하는 - 구원의 힘이 없는 용서가 아닙니다.하지만 사랑의 반대자들은 계속해서 거짓말들을 끝없이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힘들고 고생하며 고난을 겪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자들은 이같은 사랑을 미워합니다. 창세기 때에도 뱀은 '하느님의 사랑' 미워했습니다.거짓말로 유혹했습니다.인간을 죄악되게 했습니다.지금 이 시대에도 구원의 힘이 없는 사랑(구원적인 사랑)과 구원의 힘이 없는 용서의 온갖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사랑의 영)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 십자가에서 매달리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 사랑 때문에] 미움을 받아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인간이 제일 하기 싫은 것이 바로 사랑이기에 미움을 받습니다 

가짜 제자(수도자,사제)들이 온갖 거짓말로 대중들을 현혹할지라도 십자가에서 구원의 힘은 결코 잃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악의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는 구원의 힘이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대중들이 <너 자신이나 구원해라> 등등으로 얼마나 예수님을 조롱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아기,중년,노인)을 보호하기 위해 - 자신의 고통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곧, 제 십자가)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제일 하기 싫은 사랑, '사랑의 반대자'들일 뿐입니다. 혹은 거짓된 사랑으로 남들을 속여야만 돈이 되어지는 -  공동체와 그 집단주의에 있습니다.

인간의 <영,육적인 모든 고통>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 차원으로 그들과 일치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의 영, 사랑의 영)들은 예수님의 모상에 따라 자신의 고통 차원으로 버려진 이들과 일치합니다. 참된 생명의 결실(열매)는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나타납니다. (게시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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