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토마스 머튼을 통한 명상
작성자이황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02 조회수1,896 추천수4 반대(0) 신고

 토마스 머튼을 통한 명상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으며, 어머니 역시 오하이오 출신의 화가였다. 아버지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따금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부모의 영향 탓인지 머튼은 다섯살 때 이미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머튼이 태어난 이듬해 가족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는데, 머튼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그림 전시회 때문에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는 1931년에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숨진다. 당시 열여섯살이던 머튼은 영국 오캄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클레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1934년까지 머문다. 

스무살 되던 해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긴 그는 공산주의자 모임에 참여하며 학생들의 간행물인  <제스터>의 삽화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에티엔느 질송의 책을 통해 스콜라철학에 접하고, 불교 승려였던 브라마차리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움에 눈을 떴다. 결국 1938년에 무어 신부에게 교리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16일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향을 받아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마음도 먹었으나 포기하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 뉴욕 올린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방학에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다.  

1941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을 떠나 뉴욕 할렘의 가난한 흑인들 가운데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던 1942년 12월 10일, 스물여섯살의 머튼은 모든 옷가지와 책을 주변에 나눠주고 더블백 하나만 들고 홀로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갔다. 

1968년 12월 10일,  머튼은 가톨릭과 비 기독교 수도사, 종교 간 회의에 참석, 방콕, 태국에서 전기 팬에 의해 감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이송되어 12월 17일 안장되었다. 그는 Bardstown, 켄터키에있는 트라 피스트 수도원, Gethsemani 성당에 묻혀있다. 토마스 머튼은 천주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자랑할 만한 영성의 대가이다. 

 




Merton (right) with his brother, John Paul 



Merton as a freshman at Cambridge 

(켐브리지 대학 1학년 시절)

 


 

Partying with his friends at Cambridge

 

 

Merton (middle) worked as an English professor at the 

small Franciscan college of St. Bonaventure 



 


토마스 머튼과 젊은시절 달라이라마



자끄 마리땡과 토마스 머튼

 

 

머튼은 프랑스에서 화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6살에, 아버지는 16살에 세상을 떴다. 대부분 일찍 부모를 여읜 뒤 삶과 죽음을 고뇌하면서 출가한 우리나라 고승들의 궤적을 닮아 있다. 컬럼비아 대학 시절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중세 스콜라 철학에 심취하는가 하면 불교 승려와 교분을 맺기도 한 그는 26살이던 1942년 옷가지들을 할렘의 흑인들에게 나눠주고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된다. 머튼은 48년에 자신의 영적 여정을 담아 펴낸 자서전〈칠층산〉으로 일약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지만, 세속적 명망은 그의 비움과 침묵을 훼손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위험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위험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두렵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까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에 떨 때 머튼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침묵과 가난과 ‘홀로 있음’의 축복을 즐겼다. 따라서 모든 인간과 자연이 그에게 이르러서는 하느님과 다름이 없었다. 

“홀로 있음은 내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이 기도로 바뀌는 곳이며, 하늘이 나의 기도가 되고, 새들이 나의 기도가 되고, 나무에 스치는 바람도 나의 기도가 되는 곳이다. 하느님은 그 모두이시니 말이다.” (김기석 옮김)

 

머튼의 영성 

머튼의 영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은 그가 어떤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의 관점은 노트, 일지, 자전적 성찰, 그리고 개인적 서신을 통해 비춰진다. 그의 언어는 자주 은유, 상징, 명상을 통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은 생활 속의 다양한 사건, 긴장 그리고 역설 속에서 형성되었다. 한 마디로 그의 영성의 핵심을 잡는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모든 삶은 역설과 모순이라는 신비 속에서 자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은 거룩한 자비에 집중된다.”  다음은 머튼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몇가지 핵심적인 특성들이다: 

순례 : 머튼은 자아와 사회적 관습의 테두리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순례자로서 자신을 보았다. 머튼은 영적 여정을 더 경험할수록 더 거룩한 신비를 향해 항상 자신이 떠날 수 있다고 인식했다. 

수도적 삶 : 머튼이 보았던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은 수도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평범치 않은 비젼을 가진 수도자이지만, 수도자에 불과한 사람의 눈으로. 머튼 수도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그의 믿음을 살려고 갈망했다. 수도 생활은 회심과 마음의 변화에 집중되며 사막의 경험 속에서 피어난다. 

고독 : 머튼은 하느님과 공포의 어두움, 가난, 신비 그리고 변화가 드러나는 속에서 정화되는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고독의 여러 차원을 탐구했다. 그는 사랑과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는 경험을 위해 침묵과 고독을 찾았다. 머튼은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고독하지만 혼자임에 두려움을 느끼므로 이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어둠과 비움의 길 : 머튼은 자신의 죄, 상처 입기 쉬운 약함, 무지,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에 직면하게 되는 인간정신의 황폐함을 기꺼이 껴안고 받아 들였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가득히 채워지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깨달았다. 

기도의 중요성 : 머튼은 기도의 체험 속에서 감각과 몸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기도는 삶으로부터 흘러나오고 그 목표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과 모든 창조물과 살아 있는 일치가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머튼에게 관상기도는 우리가 발견해 왔던 모습 그대로 그분 안에서 휴식을 얻으려는 방법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기는 하느님을 찾는 길이다. “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친구, 일, 몸. 그리고 환경이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자아의 신비로움 : 머튼은 전적으로 성령의 자발적인 움직임 안에서 살기 위하여 낡은 자아로부터의 자유로 우리를 부르고 변화로 초대하는 내면의 소리에 일깨워지기를 우리가 갈망한다고 말했다. 이 내면의 자아는 연구될 수 없는 비밀이고 기술로 달래어 드러나게 할 수 없으며, 다만 우리가 하느님 현존의 놀라움을 목격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침묵, 겸손, 이탈, 마음의 순수함을 우리 자신 안에 연마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진실한 자유의 추구 : 머튼은 혼잡, 산만, 자유를 빼앗는 인위적인 요구들로부터 그의 생활을 자유롭게 하기를 열망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실체를 보고 응답하며 하느님께만 의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수도자는 자유와 이탈의 삶, 정상적인 사회적 구조물 바깥의 ‘사막 생활’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다”(<행동의 세상 안에서의 관상>에서). 

예언자적 소명 : 머튼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를 정화시키고 빛을 주며 변화시키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할 때, 우리의 삶은 최고의 자유를 증언하고 그것을 향해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관심 : 그의 삶 속에서 관상의 폭이 증대되면서 머튼은 그가 세계와 떨어질 수 없고 또 세계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장 깊은 기도가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 된다고 믿었다. 머튼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내면의 생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기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짜 행동주의에 쏠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심성 : 그리스도에 초점을 둔 머튼의 수도 생활은 전례생활, 성서, 기도, 노동,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 안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의 우리의 삶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말해왔던 ‘관상적 삶’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삶인데, 그 어떤 것은 예수님 홀로 필연적이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 분 안에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다”(<행동 안의 관상>에서). 

오늘날을 위한 머튼 

토마스 머튼은 그의 순례여행과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의 관상적 경험을 통해 풍부한 지식, 지혜, 영적인 양분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는 우리가 내면의 굶주림을 탐험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보편적 인간 정신의 깊이에 닿도록 우리를 민감하게 만든다. 머튼은 ‘영적인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생활이라 불리는 삶을 터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삶의 모범과 글로써 수도승들과 봉쇄 생활에 불리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수도적 삶의 방식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 모두가 따를 수 있는 영적인 길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에 영적 스승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충실하다면 관상적 체험의 선물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준다. 글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










 .....+침묵의 소중함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사람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싹트는 것을 기다릴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게 되던 내버려둘 때도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 안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사람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믿음입니다.


침묵은 흠숭(欽崇)입니다.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분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고 그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 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 토마스 머튼 -  


 

 

 토마스 머튼의 고백록 '칠층산'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은 웬만큼 독서를 하는 사람치고 안 읽은 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좋은 화제가 되겠다 싶어 몇 마디 얘기를 꺼내보면 의외로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어찌된 영문일까?  좋은 책은 한 번만 읽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진대 안타깝기만 하다. 두 번, 세 번, 아니 여러 번 읽을수록 좋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이 책은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이와 그러한 젊은이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가를 참으로 감동적으로, 동시에 매우 문학적으로 저술한 명저다. 어떠한 설명도 책에 쓰인 본문을 직접 음미하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그러한 감동적 장면을 몇 군데 뽑아서 음미해 본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뉴질랜드인이고, 어머니는 미국인이다. 부모가 모두 화가로 파리에서 만나 혼인해 토마스를 낳았는데 아버지에게서는 세상을 바로 보는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에게서는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작가 자신은 술회한다. 토마스가 여섯 살 되던 해 어느 날 일이다. "아버지가 편지 한 통을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과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나는 집 뒤뜰에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결국 무슨 뜻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절망이 무겁게 밀려왔다. 그것은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릴 수 있는 어린 아이의 슬픔이 아니었다. 몹시 당혹하고 침통한 어른의 슬픔이었다.…(정진석 추기경 번역 이하 같음)

이같이 어린 토마스는 일찌감치 인생, 그 사바세계의 신고를 겪는다. 그 후 토마스는 방랑벽이 있는 부친을 따라 이곳저곳을 전전했고, 동생 폴은 외가에서 자랐다. 중ㆍ고교 교육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받을 무렵 토머스 나이 16살 때 부친마저 뇌종양으로 런던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토마스는 그때 고아가 됐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나라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친구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천당도 없고, 은총도 없고 하여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1학년을 마치고 외조부의 나라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한 토마스는 특히 활력이 넘치는 뉴욕과 컬럼비아대학을 사랑하게 된다. 영문과에서 마음에 드는 교수와 친구들에 둘러싸여 학위도 받고, 또 시와 소설 등 많은 습작을 해 장차 문사가 될 기초를 단단히 다졌다. 

토마스는 개신교 집안 분위기에서 컸다. 어머니는 퀘이커 교도였다. 아버지는 종교적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지만, 특별한 교회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이 무렵 토마스는 출세주의자였고 이따금씩 강한 종교적 충동도 느꼈으나 그래도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저자 에티엔느 질송이라는 이름에 끌려 「중세철학의 정신」이란 책을 읽다가 스콜라 철학자들이 예사로 쓰는 무미건조한 용어 중의 하나인 자존성(自存性)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다. "이 개념 덕분에 나는 가톨릭 신앙이 비과학적 시대의 애매모호하고 미신적인 유물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줄로 믿어왔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가톨릭 신앙의 하느님 개념은 깊고도 간명하며 단순하고도 명확한 것이다." 

이 정의의핵심을 가리키는 말이 라틴어로 'aseitas', 영어로도 그냥 음역하여 'aseity'다. 자존성(自存性)이다. 하느님은 "나는 있는 자이다(Ego sum qui sum)"는 말씀과 같이 그냥 있는 존재이며, 존재 자체이며, 따라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연속되는 인과율에서 벗어나서 계신 분이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하느님 자신의 원인이라는 논리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계신 분이다. 하느님은 무시무종(無始無으로 존재 그 자체, 존재하는 순수 현실유(現實有)다. 이런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이다. 

하느님에 대한, 일반 논리를 뛰어넘는 이러한 정의(定義)는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절대 논리에 깨끗이 승복하고,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께 모자를 벗고 귀의하는 청년 토마스는 얼마나 순수하고 선량하고 총명한가! 구질구질한데라곤 추호도 없는 토마스의 이러한 결심과 선택을 지켜보면서 거의 미학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아마 이 부분이 이 책의 숨은 (화려하게 극적이 아니기 때문에) 정점이 아닌가 싶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결심한 후 그는 어느 날 미사에 (영세 전이지만) 참례한다. 첫 미사를 경험하고 난 후의 심경을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다시 브로드웨이를 한가하게 걸었지만 세상에 새로 나온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행복하고 평화스러웠는지, 왜 생의 보람을 새삼 느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나는 확실히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이었다. 컬럼비아의 못 생긴 건물까지도 다르게 보였고, 폭력과 소란이 늘 판을 치던 그 거리 구석구석까지도 어디나 평화로웠다. 

111번가 어둠침침한 작은 차일드 식당 밖 지저분한 생나무 울타리 뒤에 앉아 아침을 먹노라니 신선이 땅에 내려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기로 결심을 했고, 나아가 수사 신부가 될 결심을 한다. 마침내 봉쇄수도원인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사가 됐지만, 단 하나뿐인 동생 폴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하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난다.(전사하기 전에 폴도 세례를 받도록 토머스가 인도했다.) 1948년 이 책이 출판된 이래 이 책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됐다. 

가히 몇십 년 동안 꾸준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 책은 20세기에 쓰인 「고백록」(아우구스티노 성인의)이라는 평을 듣는다. 매우 타당한 비교다. 토마스 머튼의 문체는 간결하고 뜻이 분명하면서도 그 뜻이 또 깊다. 가히 이상적 문체라 할 수 있으며, 꼭 수도자가 지향할 법한 문체다. 

나는 머튼의 글을 읽을 때 머튼의 지성이 어딘지 모르게 T. S. 엘리어트의 지성과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는다.  토마스의 이 책은 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전기적(傳記的)이고, 전기라 하기에는 너무도 재미가 있어 소설적이다. 전편을 통해서 방황하는 인간의 고뇌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절묘하게 부각돼 있다. (글: 성찬경 시인)




Thomas Merton Society (NI Branch) Meditation





토마스 머튼의 기도
Whispers of My Father  -  A Prayer of Trust by Thomas Merton




토마스 머튼의 기도


주 나의 하느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당장 제 눈 앞에 있는 길도 보지 못합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목마름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러한 목마름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런 목마름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제가 당신께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를 잃어 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이고,

제가 죽음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의탁하겠습니다.

당신이 늘 저와 함께 계시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홀로 위험에 직면 하도록

저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에멘+


 

 

 

 

Gethsemani: Merton's hermitage (the chapel) 

Photo by jimforest on Flickr (cc)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