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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바보같은(?) 선택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0 조회수616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대림초가 두개 째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회개의 길로 초대 하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가톨릭 굿 뉴스 회원 여러분들의 행복을 기원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99점보다 1점이 낫다???

지금 멀쩡한 99마리 양들이 어찌 될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려 나서신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소탐대실 - 바보같은(?) -  행동을 하시는지  

'인권 주일'에 '인권'과 관련해서 말해 보려고 합니다.

 

직장 생활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제 000가 해고 되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게가 직장에 불필요 하다고 해서 라고 합니다.


"부당 해고 아닌가? 일 좀 미숙하면 가르쳐 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물어 보면,

"차라리 전문적인 외국인 근로자나 비정규직을 써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라는 대답과 함께 반드시 듣는 논리가....

" 상사는 100명 중에 한 사람이 공동체 이익의 눈에 거슬리면 재빨리 그를 버리고 나머지 99명을 살려야 한다."

라는 논리를 듣습니다. 

그런 '공동체 이기주의'에 휩싸인 상사에게 성경의 '되찾은 한 마리 양'의 논리를 말 한다는 것은 

전혀 씨가 먹히지 않습니다. 

전체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시키자는 논리는 어떻게 보면 그럴듯 합니다.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  99 마리 양에 더 신경(오늘 TV 매일미사 강론)을 쓰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당연시 하는  논리는 단, 100명 만 중요하지 다른 200명, 300명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을 반증 합니다.

왜냐면 사장에게는 그야말로 '모두'가 눈에 거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대상에 포함이 되기 때문이죠.

반면,

예수님의 양들은 주인 눈에 거슬리더라도 구원 해야 하는 대상인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이 200, 300, 400 마리.... 아니,  무한대로 있다고 해도 

한 마리가 없어지면 찾아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한 마리의 양을 구하기 위해 나서면 나머지 99마리 양들은 주인의 눈을 피해 달아날 것 이라는 걱정도 모순입니다.

왜냐면 양을 찾는 주체는 이야기의 선인인지 악인인지 먼저 설정이 않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라면 달아나기 전에 다 잡아먹을 대상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TV 에서 이 대립되는 두가지 명제 (대를 위해 소를 희생, 작은 것이라도 희생시키면  않됨)

를 가지고 대학생들이 양단으로 나뉘어 끝장 토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예상을 깨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쪽이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심사한  이어령 박사가  진 팀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작은 것이라도 희생시키면 않된다'는 쪽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자네들이 진 이유는 위압적 분위기가 가미된 프레임에서 자신감을 잃었고 토론중 자신들의 논리를 다양화 시키지 못했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말하는 쪽에  '그렇다면 그 희생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겠나?' 라고 질문하지 않는가?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숫자적으로 ' 1 마리' 이기 때문이 찾아 나서신 것이라기 보다 

더 큰 의미는 바로 그 양이 특별히 '소중 ' 하기 때문에 찾아 나서신 것 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단 한 사람을 이해 함 으로서 우주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단 한 사람을 사랑 함 으로서 모든 것을 사랑 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요즘 잘 회자되는 말 중에 하나가 '페르소나' 라는 말인데 우리 말로 ' 가면' 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가면은 자기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가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특출한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권'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나옵니다. 


'인권'이란 말은 거룩한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듣기 좋은 낱말 아닙니다.

인권은 그저 삶의 진실 입니다. 

그렇게 '인권'이란 '작지만 소중하다'는 개념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인 자유의지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허락하신 권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 인권의 정의는 절대로 악용되어서도 않됩니다. 

예를 들어 큰 공동체가 인권 개념을 내세워 자기들의 공동체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인권이란 어떤 부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그 정의가 부여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소중한 나'는 당연히 '소중한 타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처음부터 무조건 '소중한 타인'만을 외치거나 또는 '공동체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인권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는 것입니다.


 평생 '인권 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신 '故 넬슨 만델라'가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결정적 이유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27년간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정권의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는 '화해와 포용'의 정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권'이라는 개념은 '나와 너' 라는 이원적 차원에서 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자신을 가둔 이들에게 차별과 복수의 정책을 추구 했다면 오늘 날 전 세계에서 이토록 많은 사절들이 고인이 된 만델라를 추모 하려고 한 자리에 모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델라 인권 운동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러한 '화합과 소통'의 정책에서 그 꽃을 피웁니다.

단순히 과거에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혹독한 차별정책(아파르트 헤에트)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아마도 너 또한 소중 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께서 지상에 주신 새 계명 정신 입니다.

"서로 사랑" 하라는 이 상대적 사랑의 계명이 바로 '너와 나'의 사랑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습니다.

오늘 TV 매일미사 강론에서 한마리 어린 양이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다가 떨어진 '그리스도인들'을 가르키는 비유고, 나머지 99 마리 양들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이방인 사람들'을 가르키는 비유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99마리 양들이 흩어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연히 그리스도인들(한 마리 양)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우리 죄인들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겉으로 보기에 바보같은 결정을 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 이와 같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마태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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