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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14일(토) 십자가의 聖 요한 님..등♥
작성자정태욱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3 조회수755 추천수1 반대(0) 신고

 

 

 

 

12월14일(토) 음11/12

십자가의 聖 요 님..등

 


 

요한(십자가의) (12.14)


 성인명

요한(십자가의)(John of the Cross)

 축일

12월 1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비가,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42-1591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후안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근교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
카탈리나(Catalina Alvarez)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Luis)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Juan de Santo Matia)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Duruelo)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Toledo)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Granada)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Andalucia)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Ubeda)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님의 조언을 받아

엄격한 정신을 바탕으로 가르멜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신

십자가의 성 요한 님이시여,

 

현세의 수도 성직자들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바르톨로메오 부온페도니(12.14)

 성인명

바르톨로메오 부온페도니(Bartholomew Buonpedoni)

 축일

12월 14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300년

같은이름

바로톨로매우스, 바르똘로메오, 바르똘로메우스, 바르톨로,
바르톨로매오, 바르톨로메우스





성 바르톨로메오 부온페도니(Bartholomew Buonpedoni)
 

 


  



 

이탈리아의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에서 태어난
바로톨로메우스 부온페도니(Bartholomaeus Buonpedoni, 바르톨로메오 부온페도니)
영적인 삶을 위해 집을 떠나 피사(Pisa)에 있는
베네딕토회 성 비투스(Vitus) 수도원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 수도원의 원장은 재빨리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수도원 진료소의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그를 수도승이나 사제처럼 대했다.
그는 꿈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수도승이 아닌 교구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30세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페치올리(Peccioli) 본당의 사제로 발령받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에 가입하여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정신을 따라
병든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였다.
이때 그는 헛된 삶에서 돌아선 복자 비발두스(Vivaldus, 5월 11일)를 집으로 데려왔고,
그는 후에 그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가 되었다.

 

                                 


1280년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가던 중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유럽에는 위생 형편이 나빠서 나병이 널리 퍼지던 때였다.
그는 과거 꿈속에서 주님께서 영광을 얻기 전에
20년간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그는 첼로리(Celloli) 부근의 나환자촌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의 충직한 동료인 복자 비발두스도 함께 따라나섰다.
주교는 그를 나병 요양소의 책임신부로 발령했다.
그는 나병으로 살과 뼈가 썩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미사를 봉헌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인내의 삶을 살다가 정확히 20년 후 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토스카나(Toscana)의 욥(Job)'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 시복되지는 않았으나
1499년부터 그 지방에서 축일을 기념하였고,
1910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그를 복자와 같은 인물이라며 공경을 승인하였다.
그는 바르톨로(Bartolo)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주님을 더 닮기 위해

집을 떠나 수도원의 하인 일을 맡았으며
병자들을 돌보다가 나병에 감염된 후
일생을 그들과 함께 했던

토스카나의 욥,
사제 성 바로톨로메오 부온페도니 님이시여
주님 사랑의 열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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