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2013년12월14일 대림 제 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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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미숙 | 작성일2013-12-14 | 조회수522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2013년12월14일 대림 제 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17,12) --- 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그것이 희망이든 욕망이든 무엇인가를 원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모든 바람이 모두 소진이 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황에 놓여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어떤 바람 자체를 가질 수 없는 상황, 모든 희망과 욕망이 성취여부 상관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다시는 그 어떤 것도 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임종의 순간을 체험해왔다. 묘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이 다가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신부인 나의 말이나 기도에 철저하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우리의 모든 인간적 욕망이 끝을 맺어야만 할 때, 본능적으로 절대적 존재를 찾으려 한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세계가 주는 두려움은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든다. 그 순수함을 끝이 보일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인간적 바람이 살아 있는 지금 찾아야만 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지극히 간단한 명제일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숙제일 수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태오16,26)는 그분의 말씀. 너무도 지당하고 쉬운 말씀이거늘 우리는 눈앞의 욕망에 주체를 못한다. 어느 인간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숙할 수 없다. 여기서 성숙이란 잡을 것과 놓을 것을 식별하는 지혜이다.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들, 아니 믿고 싶어 믿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들. 분명한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담보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시간이고 생명이다. 가끔 욕망의 끝자락에 서있는 자신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그 끝에 놓였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렇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오랜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다. 제대로 그것을 알고 그에 맞게 삶을 만드느냐, 아니면 제멋대로 다루느냐가,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마지막 모습을 결정하게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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