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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4 조회수705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Mt.17,11-12)
 
 
제1독서 집회 48,1-4.9-11
복음 마태 17,10-13
 
어떤 신자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우리 본당신부님한테는 특별한 광채가 나는 것 같아요. 글쎄 작년 서품식 때, 그렇게 많은 신부님들이 계신데도 다른 신부님들은 잘 보이지 않고 우리 본당 신부님만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이 신자의 말씀처럼 그 신부님한테는 특별한 광채가 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신자의 관심이 자신의 본당신부님께 향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본당신부님을 향한 관심이 전혀 없다면 어떠했을까요? 광채난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마 나중에 “우리 본당신부님이 서품식에 오셨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양에 대한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목자들이 자신들의 양을 무리를 지어 치고 있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그 근처의 동굴로 모두 비를 피하러 간답니다. 이때 많은 양들이 서로 뒤섞이게 되겠지요. 그런데 어떤 목자도 양들이 서로 뒤섞었다고 걱정하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다시 길을 떠날 때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을 결코 떠나지 않는답니다.

본당신부님만 환하게 보인다는 어떤 신자의 말씀처럼 또한 자기 목자만을 쫓아가는 양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모습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주님만을 바라보기 보다는 세상의 것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더욱 더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바로 내 옆에 계셔도 알아차릴 수가 없으며, 주님께서 내 귀에 큰 소리로 말씀하셔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예수님을 미리 준비 시킨 세례자 요한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뒤에 오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갖은 비난을 던진 뒤에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기준을 예수님 앞에 맞추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 역시 부정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좋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셨지만, 이 역시 마귀의 명을 받아서 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흠집 내기로 예수님을 깎아내립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독설에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뉘우치기 보다는, 예수님을 제거해야겠다는 복수를 다짐했고 또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세상 기준만을 앞세우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옳다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 한 주님을 보지도 또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기준인 사랑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해 보았으면 합니다. 바로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며,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코르네유).

 
착한 목자상. 우리 모두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양을 돌보아야 합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한 회합에서 주교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을 보면 목자인 사제를 신자들이 돌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목자로서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목자의 명을 받았지만, 얼마나 그 명을 잘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말이지요. 자신을 낮춰서 양을 잘 돌보는 것이 목자의 임무일 텐데, 양이 자신을 섬겨주길 원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가 참 많았다 싶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길 원했으며, 존중해주지 않고 무시한다 싶으면 괜히 억울한 마음을 간직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제들만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닙니다. 누구나 내가 돌보아야 할 ‘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라는 양, 부모라는 양, 친구라는 양, 이웃이라는 양 등등……. 우리가 돌보아야 할 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나를 돌보기만을 원하고 또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벌써 2013년도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이 연말에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목자의 사명을 잘 실천하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내게 맡겨진 양들을 잘 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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