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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5 조회수938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look for another?"
(Mt.11,12)
 
 
제1독서 이사 35,1-6ㄴ.10
제2독서 야고 5,7-10
복음 마태 11,2-11
 
어제는 오랜만에 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래는 모임이 있었지만, 갑작스런 기상 악화로 인해 모임 자체가 연기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저 혼자만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지요. 방 안 정리도 하고, 또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있다가 문득 ‘텔레비전이나 한 번 볼까?’하면서 전원을 켰습니다. 그리고 저는 텔레비전 프로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것 같은데 너무나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낄낄’대며 정말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보다가 어렸을 때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렸을 때에 주말 밤에 하는 ‘주말의 영화’를 꼭 챙겨 보았으며, 명절 연휴 때에는 신문에 나와 있는 방송편성표를 오려서 붙이고는 어떤 프로를 볼 지를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모든 방송을 섭렵했었습니다.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은 마치 텔레비전 안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고 사람들이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이 말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신문에서 제일 먼저 보는 부분은 방송편성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어제 텔레비전을 본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지요. 텔레비전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텔레비전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음을 이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종종 현실 탓을 하면서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직 자신이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될 때 실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면,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면서 계속해서 ‘나중’만을 외치고 있지요. 물질적인 욕심의 증가는 무한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이 더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과연 물질적의 풍요를 내세울 수가 있을까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텔레비전 없이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영원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셨던 것을 그대로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기다리던 메시아시며,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제자들을 통해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보고 들음으로써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에 온 힘을 다 집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행동에 집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을 따르기 보다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커다란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게 있어 무엇을 가장 첫 자리에 두고 있었을까요? 자선주일인 오늘, 내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점검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고서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았던 내 자신을 반성하여 봅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종일 기다리는 마음은 애타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마음은 두근거리고 기쁩니다. 희망도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탁현민).

 
평화신문의 자선주일 임선형씨 삽화입니다. 나의 자선을 생각해봅시다.

 
말 잘 한다고 데려왔더니만....

어떤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많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봅니다.

명쾌한 강의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신부님께서 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기업가들의 모임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기업가들에게 이 세 가지를 꼭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십시오.”

이 말에 기업가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고 또 돈도 많이 벌게 되었음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둘째, 번 돈을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십시오.”

이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부님의 말씀에 깊은 공감을 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 저축한 돈을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십시오.”

이 말에 곧바로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말 잘 한다고 해서 데려왔더니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에만 귀가 열려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듣기 싫은 말은 무조건 거부하고 반대하는 모습.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예수님 말씀이 듣기 싫어서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그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을 들으려고 했기에 벌어진 커다란 잘못입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 대해 우리들은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고, 지지하는 사람이 다르다고, 그 밖에도 많은 다름 때문에 서로 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무서운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무조건 맞을 수 있습니까?

다름도 인정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것. 이러한 사회가 될 때,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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