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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13년 12월 25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3 조회수517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13년 12월 25일

요한 1,1-18.

 

지금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예수님의 기원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만 알립니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생명으로 나타났고, 그 생명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는 빛과 같은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도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졌지만,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과 진리의 때가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삶은 우리를 위한 은총과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나타낸 은총이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보여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면서 이스라엘 안에 죄인들만 많이 만들어 놓은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과 달리 가르치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죽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기득권자들이 잘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에서 요한복음서(2,22)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23).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현재 교회는 개인이 고해소에서 반드시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고백을 수반하는 고해성사는 13세기에 도입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죄의 대가를 치른다고 엄청남 고행을 하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본당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그 신부가 정해주는 보속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임의로 보속을 하지 못하게 신부가 보속을 정해주면서 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발생한 개인고백고해성사입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권력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을 대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탄이 전하는 메시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의 횡포를 정당화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작은 생명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생명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고치고 살리는 생명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전하는 그분의 삶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든 이를 고쳐주며, 절망한 이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에 충실하다가 당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은 그분을 오래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더 많이 갖기에 골몰합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용서를 우리 삶의 빛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하며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 일이 너무 많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빛을 추방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우리 삶의 여백(餘白)으로 밀쳐놓습니다. 베푸는 일도 용서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씀의 빛을 외면하고,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오늘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여 새롭게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진리로 충만하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심오한 이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깊은 명상으로 도달하는 데에 있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용서하고, 살리는 우리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한 아기와 같이 연약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계십니다. 진리는 그렇게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 진리를 반영하여야 합니다. 용서하고, 고치며 살리는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어둠 안에 그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그 진리는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오늘 새롭게 하는 진리로 말씀은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삶 안에 진리를 발생시킬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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