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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3 조회수1,055 추천수9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Lk.1,59-60)
 
 
제1독서 말라 3,1-4.23-24
복음 루카 1,57-66
 
젊은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 청년이 이상한 말투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다른 사람들 모두 크게 웃습니다. 솔직히 저는 ‘바보처럼 왜 저런 말을 하지?’라고 생각했고, 또 왜 웃는지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신부님, ** 안 보세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되는 말이라면서, “신부님, 이 정도 프로그램은 봐 줘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합니다.

저도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겠다 싶어서 드디어 어제 저녁 이 프로를 봤습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너무나 많더군요. 그러다보니 보다가 그냥 잠들고 말았네요.

만약 꾸준히 봤다면 장면 하나하나를 다 이해했을 것이고, 잠들지 않고 끝까지 다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도 없고, 또 이해하기도 힘들었기에 결국 중간에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잠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새벽,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즉, 기도와 묵상 등으로 주님과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사람은 신앙생활을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더욱 더 즐기고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신앙인이라 말할 뿐, 기도와 묵상 등을 거의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은 약간의 신앙생활에도 지루함과 힘듦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청년들과의 독서모임이 있었는데, 한 청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본당 11시 미사 중에 세례식이 있었는데요. 미사가 2시간 이상 진행되자 제 앞에 앉아 있던 어떤 자매님은 지루해서 쓰러지기 직전이더라고요.”

세례식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특별한 전례에 집중하면 또 다른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만남이 자주 있지 않았기에 지루하고 그 시간이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입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기 잉태소식에 의심을 품었다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10달 동안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곳에서 ‘요한’이라는 정하자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주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 묵상, 성경읽기, 자선과 희생 나눔 등을 통해 우리는 분명 주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어렵고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쁜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 잘 준비해서 가장 큰 기쁨의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벌이 꿀을 딸 때는 꽃을 가리지 않는다(정민).

 
작년 사제서품식장. 거룩한 사제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좋은 점 바라보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인사이동 발표 이후에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좋은 신부님 오신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반면에, 무섭고 어려운 신부님이 오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본당 신부님이 바뀌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하더군요.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가정방문을 가서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다니셨던 할머니로, 모든 본당신부님을 다 접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떤 신부님이 제일 좋았어요?”

그러자 이 할머니께서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다 좋죠. 이 신부님은 이런 점이 좋고, 또 저 신부님은 저런 점이 좋고. 특히 미사를 해주시니 무조건 좋죠.”

좋은 점만 바라보면 무조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 좋은 점만 보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좋은 점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저는 전에 많은 성인 수녀들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제가 사제가 없는 시골에서 소임을 맡다보니, 성인 수녀 10명보다도 못된 신부 1명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인 수녀가 10명이나 있어도 미사를 할 수 없잖아요.”

좋은 신부님, 나쁜 신부님. 그런 구분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구분이겠지요.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을 수 있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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