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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27일(금) 사도 聖요한, 聖女파비올라 님♥
작성자정태욱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6 조회수579 추천수2 반대(0) 신고


 

 12월27일(금) 음11/25

사도 聖요한, 聖女파비올라

 

 


 

 

           ▶요한(12.27)

          성인명 요한(John)
          축일 12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사도, 복음사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00년경?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왕,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삽자가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녀 막달레나, 성 요한(John)


 


  

 



 
 
성 요한(Joannes)은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야고보
(Jacobus, 7월 25일)의 동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겐네사렛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삯군들과 배를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이들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 하였기 때문에
(마르 10,35-41),
예수님은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마르 3,17).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을 때
(마르 5,37; 루가 8,51),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가 9,28),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기도
(마태 26,37; 마르 14,33)와 같은
극히 중요한 시기에 베드로
(Petrus)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또 성서 여기저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인상을 주며,
최후의 만찬 때에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
(요한 19,25-27).
뿐만 아니라 부활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
(요한 20,1-5), 그분의 부활을 믿었으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요한 21,7).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며 투옥당하기도 했다.


         


성 바오로(Paulus)는 야고보와 게파(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갈라 2,9).
후일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진리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
(Patmos)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에페수스
(Ephesus)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를 다하고 선종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9월 30일)에 따르면
성 요한은 너무나 연세가 높아서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와
서간 3개 그리고 묵시록은 성 요한의 저작물이라고 전해져온다.
사도 요한의 문장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서의 서두가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는 유훈을 받으신

사도 성 요한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천상의 축복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 ...아멘+

 


 


 

         ▶파비올라(12.27)

 
     성인명 파비올라(Fabiola)
     축일 12월 27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399년
     같은이름 빠비올라

 

 

로마의 성녀 파비올라(Fabiola)

 

 



 



 

성녀 파비올라는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인 파비아가(Fabia family)에서 태어났고,
얼마 동안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후원자로 활동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그만 두었다.
결혼한 남편의 너무나 방탕한 생활로 말미암아 이혼하였으나
그녀 자신도 사회생활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위로를 찾게 되었고,
교회의 명을 어겼기 때문에 로마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스캔들이 되었다.
즉 이 스캔들은 그녀가 이혼한 상태에서 재혼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두 남자가 모두 죽게 되자
그녀는 공적인 회개를 하고 교회로 되돌아 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화려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교회를 돕는 일과 자선활동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395년에 베들레헴을 순례하였고,
그곳에서 성 히에로니무스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기를 원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서 번역 사업을 후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조용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성격이 부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차제에 팔레스티나(Palestina) 신자들을 지도하는 문제를 두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또 훈족들이 이 지역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그의 후원자들과 함께
야파(Jaffa)로 피신하였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도 그녀는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사위인
성 팜마키우스(Pammachius, 8월 30일)와 함께
병자와 순례자를 위한 자선병원을 포르토(Porto)에 세웠다.
이 병원은 서양 최초의 가톨릭 병원으로 여겨지며,
그 이름이 오늘날의 영국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조차도 그녀의 모든 열정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죽을 당시에도 새로운 사업을 계획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정열적이었다.
399년 성녀 파비올라가 로마에서 사망했을 때,
그녀의 장례식에는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가장 큰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성녀 파비올라를 위해
두 편의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우리가 그녀를 알게 된 주요 자료들이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재혼 과정의 조당 때문에 파문을 일으켰으나

공적인 회개를 거친 후 교회의 품에 안겻고

 

성 히에르니무스의 후원자였으며

포르토에 교회 최초의 자선 병원을 설립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신

정력적인 활동가 성녀 파비올라 님이시여,

 

재호나 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이들이 많은 현세에

천상의 축복으로 저들을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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