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가정과 향주삼덕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8 조회수923 추천수18 반대(0) 신고



2013년 가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대축일


<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복음: 루카 19,45-48







 예수에게 우유스프를 먹이는 성모



다비드(David, Gerard) 작, (1520), 오크 유화, 35 x 29 cm, 브뤼셀 왕립미술관


     < 성가정과 향주삼덕 >

      

 

소와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호랑이에게 대접했습니다. 호랑이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호랑이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다 참다 드디어 소와 호랑이는 다툽니다. 결국 둘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소는 소대로,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호랑이와 소는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라고 엮어놓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기대했던 것만큼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와 호랑이가 만나 하나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국 소는 고기에 맛들이고 호랑이는 풀에 맛 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예수님과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은 나무 위에 놓였지만 사람과 나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나무와 하나가 되어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는 덕을 믿음, 희망, 사랑이라 하여 향주삼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힘으로는 나무에 매달려 계실 수 없지만 못 세 개를 통하여 십자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 향주삼덕으로 당신 자신을 뚫어 십자가에 달려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소와 호랑이도 이 향주삼덕으로 자신들을 뚫는 아픔을 감수할 수 있다면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믿음으로 서로의 오른 손을 뚫어야합니다.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덕은 하느님께 가기 위한 덕이지 서로를 위한 덕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몇 달 만에 본 마리아는 배가 불러온 상태였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잉태된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성모님 또한 하느님의 정배로서 남편이 필요치 않았지만 성가정을 지켜줄 가장으로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남편이 요셉임을 믿어야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해주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서로를 믿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서른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그 이유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위해 정해주신 부모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해가지고...’가 아닌, ‘하느님께서 왜 이 사람을 나의 정배로 정해주셨을까?’를 생각해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유를 깨달아 나갈 수 있습니다.

 

왼 손을 뚫는 두 번째 못은 희망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장인이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목적이 있듯이,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다면 합당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맺어주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인류구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 산 결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성가정으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신다면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그 가정뿐만 아니라 그 가정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음화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펙 쵸프라가 자기 두 아들에게 너희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만 생각하라.”라고 가르친 것이 우리 가정교육에도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신앙교육이 아닌 이 현 세상에서만 물질적으로 안녕 되게 살게 만들려고 한다면 올바른 희망을 지닌 가정이 아닙니다. 모든 성가정의 희망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고 하늘나라의 천상가정으로 다시 모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둘의 만남은 기찻길과 같습니다. 기찻길은 두 선로가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합니다. 서로 다른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벌어진다든지 아니면 붙어버려서 더 이상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즉 서로 같은 희망, 같은 목적지를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못, 어쩌면 양 손의 힘이 빠졌을 때 온 몸을 지탱해주어야 하는 못이 바로 양 발을 박은 못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두 날개라면, 그 날개로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몸통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믿음과 희망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조금도 하늘로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란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누군들 사랑하면 행복한 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미워지기 시작해서 용서가 안 될 때가 있고 그냥 냉랭하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운전자는 영혼이고 차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서 에너지, 즉 사랑이 솟아나오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그 힘을 받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넣지 않은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으면 둘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사랑은 우리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만 그 열매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을 때는 누가 나의 뒷담화만 해도 미워질 수 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고정원씨처럼 자신의 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자신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생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세 개의 못으로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내 자신을 죽이는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매일 여기에만 머무르려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알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태울 줄 모른다면 가정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우리는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부부는 성탄절 선물을 고심하다가 남편은 가보로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해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자랑인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옵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내 자신을 그렇게 태우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의 뜨거운 불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성령의 불로 자기 마음을 채우는 좋은 신앙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