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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왜 따로 부르셨을까?- ▒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31 조회수573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왜 따로 부르셨을까?

 

  타임머신 (부제시절)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하느님께서 당신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시는

몇 가지 액션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치유

두 번째 구마

세 번째 치유와 구마를 통해서 믿음의 갑옷을 입혀 세상에 나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치유와 구마의 패턴을 보면 분명히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 치유하실 때 절대로 조건을 붙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것을 수직적인 치유라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와 자식, 교우와 교우들..... 간에 이루어지는 치유를

수평적인 치유라고 합니다.

이 수평적인 치유의 원칙도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시켜 주신

수직적인 치유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첫 번째 조건을 걸지 않기

치유라는 말 대신에 봉사, 봉헌이라는 말을 대신해도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러이러한 조건이 주어지면~~알아서 봉사할거야!’

하지만 하느님이 내 양심을 통해서 봉사를 원하실 때, 이유를 달면 안 돼요.

 

막달라 마리아를 용서하실 때도 예수님은 조건 붙이지 않으셨어요.

“오늘은 내가 너를 살려주었지만 내일 이 시간에도 나와 볼 텐데

그때 너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남자들 꼬드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조건을 붙이는 만큼‘ 아직 나는 너를 덜 믿는다~’ 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와 용서, 봉사 하실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치유시켜주셨듯이

우리도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상처준 사람, 교우들끼리

치유, 용서, 봉사할 때, 조건을 붙이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치유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치유원칙은 치유하시기 전에 철저히 기도하셨고,

치유가 끝나고 난 다음에도 반드시 감사기도로 마무리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봉사 전에 기도해야 되고, 봉사 후에 감사기도로 끝내야 합니다.

봉헌 전에 기도해야 하고, 봉헌 후에 감사기도로 끝마쳐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가 다 빠지셨을 것입니다.

깊은 밤에 열 두 제자들은 지쳐 잠에 떨어졌지만,

예수님은 그 시각에 홀로 산위에 올라가셨어요.

산에는 왜 가셨을까요?

성부께로부터 영적인 에너지를 받기 위해 기도하러 가셨지요.

 

우리도 누군가를 치유하고 봉사할 때에는

내가 먼저 하느님께 영적으로 적셔져야 됩니다.

나를 적신 물이 흘러넘쳐 이웃에 갈 때, 지속적인 봉사가 되고

조건 없는 치유와 용서가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알량한 동정심만으로는 봉사하는데 한계가 있지요.

 

꽃동네에 수많은 봉사자가 오지만 나중에 결과를 보면 어떤 봉사자들은

수사, 수녀가 되지만 어떤 봉사자들은 사고만 치고 나갑니다.

하루 종일 봉사하다가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꾸벅꾸벅 졸면서라도

기도한 봉사자는 살아남아서 수사수녀가 됩니다.

 

‘저 똥오줌 싸는 할아버지가 예수님이다~’

히고 들어 올 때는 동정심을 가지고 봉사하지만

‘나 오늘 네 시간 봉사했으니까 네 시간 기도한 것과 똑같애~’ 하면서

적당히 합리화한 그 영혼은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질 수밖에 없지요.

나중에는 ‘내가 여기 왜 왔지?’ 하면서 똥 쌌다고 기저귀 안 갈아 채우고,

이불 뒤집어 씌워놓고 두들겨 팹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기도를 놓치기 시작하면 찾아오는

첫 번째 마귀가 음란마귀입니다.

기도하면 여자가 여자로 보이지 않고, 남자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찾아오는 마귀는 돈 마귀입니다.

어줍잖은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채워놓으면 되지~’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되는데

봉사하고, 용서, 치유하고 난 뒤에 감사기도로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교만의 마귀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내 말 듣고 저 사람 치유 되었어!’

‘내말듣고 저 사람 성사 보러 갔어!’

‘아, 나에게 이런 탈렌트가 있구나~’

‘나에게 이런 카리스마가 있구나~’

교만의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은사를 받은 사람들, 설교 잘 하는 회장님들,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기도로써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으면 나중에 천주교 무당으로 변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나지 않으면 은사는 마귀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셨고, 기도 끝난 후에 감사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영혼을 구하려면 그냥 다가서지 마십시오.

우리회사 언니 성당으로 오게 하려면 그 언니를 십자가 앞에 이름 걸어놓고

9일기도 들어가야지요~

“성당 좋아, 나가~” 한다고 나가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에수님의 치유의 원칙은 섬세하십니다.

예수님의 스케일은 바다보다 크지만 그분의 섬세함 또한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성서에 귀 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실 때,

군중들 사이에서 그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왜 따로 불러내셨을까?

한 번도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귀머거리가 갑자기 귀가 열린다면

군중들의 소리는 마치 대포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발라 그의 귀를 열어주신 다음 처음에는 바람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사람의 목소리......이렇게 점점 적응이 된 후에 군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겁니다.

 

또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그 상처에 터치를 하십니다.

손을 안 대고도 얼마든지 치유하실 수 있는 그분이시지만

왜 상처에 손을 대셨을까?

“너의 나병이 나아라!” 하면 육신의 치유는 될 수 있어도 자식, 아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는 상실감과 내적상처는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런 나병환자를 예수님은 특별히 터치를 통해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나병환자의 상처가 서로 만났을 때는 우주가 만난 것이지요.

그 순간에 나병환자는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치유됩니다.

문둥이라고 놀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적개심으로부터 치유가 됩니다.

 

예수님은 치유시키실 때, 용서하실 때, 정말 섬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시킨 방법 세 가지!

첫 번째,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치유하기 전에 기도 하시고, 치유하고 난 뒤에 반드시

감사기도로 끝을 내셨습니다.

치유라는 말 대신에 봉사, 봉헌.....도 대입이 됩니다.

세 번째, 섬세하게 치유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평화를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의 옷이 대부분은 잠자리 날개보다 가볍다는 겁니다.

하찮은 바람에도 곧잘 찢어지고 작은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아침에는 천국이었던 마음이 가족이 내뱉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습니다.

 

믿음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하느님 중심으로 삽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다면 어떤 모멸감도 이겨냅니다...

어떤 비방이 들어와도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사람을 담고 살면 다른 사람이 던진 작은 돌멩이에 맞아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내게 상처 준 저 사람, 하느님이 대신 심판하고 벌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백색순교의 길을 갑니다.

 

지금시대는 백색순교, 즉 영적순교를 원합니다.

백색순교를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첫 번째, 입을 다스립니다.

입을 다스리는 자가 영원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 치 혀로 천국과 지옥을 선택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때는 조심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백색순교의 삶입니다.

 

백색순교의 삶 두 번째는 무관심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무관심은 죄입니다.

도둑질, 간음만이 아니라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책임, 무관심하게 사는 것은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에서 보듯이

지옥에 갈 만큼 큰 죄라는 것을 성서에서 가르칩니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 (2013. 12월 15일 대림 제 3주일)

 

 

  에수성탄 대축일 배티성지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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