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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제22강 두 짐승(묵시록 13장)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01 조회수500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2강 두 짐승(묵시록 13장)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강의 때 제가 말씀드렸던 것 한 주간 어떻게 악마를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구체적인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이

하느님께 반하는 것인가? 한번 찾아보라고,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고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내 생활에 뭐가 하느님 보시기에 조금 아닌 것 같다. 뭐 이런 거 뭐가 있으셔요?

그거 못 찾으면 이거 들을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13장 이 두 짐승을

가지고 이야기할 건데요. 저번에 하늘에서 용과 미카엘 천사가 싸워서 용이 떨어

졌다고 했습니다. 그죠? 바다의 모래가에. 

 

떨어진 게 정말로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이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이 13장을 읽으면

바로 자신들이 처한 지금의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로 느끼고 있거든요.

우리 역시 지금 이 13장을 읽으면서 우리 주위에 뭐가 이 짐승과 같은 모습인가에

대한 것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특별히 13장 끝에 보면요. 숫자를 한번 풀이해

보십시오라고 13장 마지막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묵시 13,17-18: 그리하여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

 

14장부터는 시온 산에 있는 어린양 이야기가 요거는 조금 다른 측면이구요.

구원의 이야기이고. 이 현실의 모습에서 내가 머리를 써서, 장식품이 아니라,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이 머리를 써서 정말로 현실에서 잘못된 부분을 끄집어

내고 그것을 알아 맞히고 "아, 이것이 잘못됐구나." 알아 맞히는 사람이 14장의

어린양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 구원 받은.

 

그래서 오늘 강의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뭐가 내 생활에 있어서, 꼭 사소한 것 하나

에서 하, 요거 요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싫어하실 것 같고, 요렇게 하면 좋을 거 같고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이 강의를 쭉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3장을 이렇게 준비 하다가 뭐가 현실에서 구체적인 측면에서

늘 나의 신앙을 이렇게 자꾸 갈등을 일으키게 만드는가? 밥할 때입니다.

제가 밥을 해 먹고 사는데. 혼자 사니까 밥을 해 먹을 때 보면, 시간을 맞춰 갖고

밥을 하는 거를 제가 제 삶의 규칙으로 정해놨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가 보면, 밥 때를 놓쳐서 "아, 뭐 라면 끓여 먹지." 그러고 미루게

되고 이렇게 자꾸 하면서 이게 한번 깨어지니까 다시 잡기가 힘들고 생활이 흐트러

지는 거예요. 밥을 제대로 해서 먹어야 저녁기도 들어가는데. 저녁기도 하고 저녁

미사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보통 밥 하는 거는 괞찮은데 밥을 해서 먹고 설겆이가 그죠?^^*~~~

진수성찬 해 놓고 다 먹고 나서 설겆이 할 생각을 하면 이게 또 하~, 또 밥하기조차

싫어지는 게 있더라구요. 그리고 또 특별히 더 어려운 거는 찬을 준비하는 거죠.

오늘은 도대체 뭐해 먹나 고민이고. 점심 먹을 때부터 고민이 딱 고민이 되죠.

 

밥을 해 먹고 설겆이 깨끗하게 해 놓고 성무일도 들고 성당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식사 때가 바뀌니까, 이게 흔들리니까 저녁에 라면 끓여  먹으면 되지 이런 식으로

흘러버리니까 문제는 제가 저녁기도 시간도 어느 순간 왔다갔다 되고 그러다보니까

오늘 저녁 하느님을 안 만났으면 저녁 미사 지나고 난 후에 아, 저녁기도 해야지

그러다가 뭐 레지오다, 회의다 뭐다 하다보면 또 기도는 뒤로 가고.

 

그러다보면 낮기도 하고 저녁기도를 세상 천지 11시가 넘어서 하고 앉아 있어요.

제가. 11시 넘어서 낮기도? 아우 안 했으니까 ... 같이 몰아서 해버리는 그런 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밥 때가 문제가 아니라 제 생활의 어떤 규칙적인 리듬을 정해

놨을 때 그것을 내가 지켜내지 못하면, 나하고의 싸움이죠. 나와의 싸움이죠.

 

이 싸움은, 이 약속은 내가 보다 더 힘써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내 나름대로는

뭔가 정해 놓은 것인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벌어지는, 뒤에 나도 감당이 안

되고 내가 맨날 쓰러지는 이런 모습에서 구체적인 어떤 현실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또 열심히 살자. 또 열심히 사는 것이 또 하느님이 보시기에 정말로 이

짐승과 싸워서 이기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뭐 거창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이것 역시 용과의 대립을 하는

그런 모습과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13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겠는데 제가 하나의 예로 제 경험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역시도 하나의 내 삶에서 규칙 정해 놓은 것, 하느님

따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 그것 하나 뭐가 제대로 못 지키고 있는가?

이런 거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13장을 보면요. 13장에 나타나는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그 어떤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그 짐승, 이 두 짐승이 20장까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우리가 그 악마의 세력의 몰락에 대해서 화살표 쭉쭉해서 봤습니다. 그죠?

 

  

 

용에서부터 시작해서 두 짐승, 그 구체적인 로마를 지칭하는 바빌론, 바빌론에서

다시 또 두 짐승이 멸망해 가는 것. 그 다음에 용으로 멸망해 가는 과정. 이게

20장까지 계속된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13장에 나타나는 이 두 짐승의 모습이 계속해서 요한 묵시록에서

후반부에서는 계속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이고 이것이 무엇

때문에 요한 묵시록에서 그렇게 멸망의 길을 악의 어떤 파멸의 길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 왜 그렇게 길게 다루고 있는 것인지 오늘 13자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13장에 나타나는 두 짐승의 모습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두 짐승을 이해할 때는 아, 바다에서 올라왔는 뭐 희안하게 생긴

짐승, 땅에서 또 희안한 뭐 기운이 솟아 오르는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짐 마시고

쓰여져 있는 용어를 보면요. 우리가 그리스 말을 잘 모릅니다. 저도 잘 몰라요.

그저 기껏 그냥 성경 한번 읽어 볼라고 공부한 게 답니다. 그 그리스 말을 쭉

보자면, 13장 첫 부분에 나타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주로 군사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 묵시 13,1 (군사적 분위기)

   나는 또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투하고, 싸우고, 다스리고. 하여튼 이러한 단어들은 군사적인 단어죠. 

두 번째 나타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쓰여진 단어들을 보면,

약간 종교적인 색체가 있어서. 경배하고 혹은 험담을 하고 비난하거나 약간

정신적인 차원의 종교적인 어떤 차원이 있습니다.

 

* 묵시 13,11(종교적 분위기)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신적인 차원의 종교적인 어떤 차원이 있습니다. 요걸 가지고 우리 학자들이

어떻게 말을 하냐하면,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로마의 군자적인

어떤 모습, 군사로 억압하는 힘의 어떤 모습. 그런 논리로 보고 바라보고 있고.

 

*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로마의 군사적인 모습을 상징

 

두 번째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종교적인 어떤 모습, 로마의 황제 숭배라든지

어떤 로마의 다양한 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신들의 어떤 그런

미신적인 것. 그런 것들의 억압 그것을 동시에 요한 묵시록의 저자와 또 요한

묵시록을 읽는 독자들이 그 로마의 어떤 두 가지 측면에 억압을 두 짐승의 모습

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로마의 다양한 신들에 의한 미신적인 억압

 

그리고 우리가 또 우리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가장 억압하고 있는지, 우리의 신앙을 무엇이 우리를 갈아먹고 있는 것인지

그런 구체적인 어떤 차원도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자꾸 드리는 것은 짐승이든, 용이든 자꾸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마라는 것입니다. 귀신 나타나 가지고 우리를 해꼬지 하는 그런 차원

으로 이해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현재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 안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번 보시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자매님들 계신데 TV

드라마가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친다. 묵주기도 하면서도 드라마 보면서 하고.

아, 내 신앙에 이렇게 여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그런 구체적인 거 하나하나 한번

살펴 보시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첫 번째 짐승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짐승 보면요. 처음에 이 짐승을 우리가 용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하늘에서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짐승 이야기에서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옵니다. 자, 바다, 물, 폭풍 막 태풍도 올라오고 하다보면 무섭죠?

 

 

저는 굉장히 물을 되게 물쪽에 있는 군대를 나왔는데 ^^*~~~

잘 해야 되는데도, 이 물을 가까이 해야 되는데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해가지고 물을

되게 무서워합니다. 자, 우리 성경 안에서도 물을 되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물을

됙 싫어해요. 왜? 왜 싫어할까요?

 

우리 창세기부터 딱 한번 가보겠습니다. 우리 너무 잘 아는 얘기, 창조 이야기.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 전에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하느님의 영이 어디 있었어요? 물 위로. 하늘과 땅이 따로 되어 있으니까.

이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다라는 것은 물 자체는 하느님의 손길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하느님이 없는 곳이예요.

 

그래서 이 물은 모든 걸 덮어 버립니다. 노아의 홍수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걸 싹 덮어 버립니다. 여기는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너와 내가 구별됨이

없고 다 그냥 뒤엉켜 있습니다. 카오스 상태죠. 카오스 상태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창조사업입니다.

 

* 창조사업: 카오스 (coaos) 상태에서 질설르 부여하는 것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 창공 위의 물과 창공 위의 물과 창공 아래의 물을 뭐 이런

거를 갈라 놓는 거죠. 예, 그것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구별, 구별이 안 된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우리 역사 이 이스라엘의 어던 체험이나 어떤

사고 안에서 하느님 아닌 것에서 올라오는 개념입니다. 하느님과 먼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없는 곳에서 그렇게 올라오는 것입니다.

 

*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묵시 13,1)

  하느님의 손길이 없는 곳에서 올라온다.

 

자,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은 다니엘 7장에도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을

표현하고 있구요. * 다니 7,1-8: 다니엘이 네 마리 짐승의 환시를 보다.

다니엘서도 묵시문학이죠? 이 네 짐승을 통해서 악적인 요소를 그려나갑니다.

 

이 요한 묵시록에도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왜 하필 바다, 하느님 아닌

것에서 올라 온다고 말씀드렸지만 이 연결 고리를 우리가 어디와 또 봐야 되느냐

하면 용하고. 용이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바닷가 모래 위에

 

* 묵시 12,8: 그리고 용은 바닷가 모래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다라는 장소는 용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용은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새명을 없앨려고 했고, 분열을 조장했던 그 용이 떨어진 곳. 거기서 용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듯이 여인의 후손들, 교회 하느님의 백성과 계속해서 싸우겠다고

나서는. 그 싸움을 이제 짐승이 받는 거예요. 같은 용이 있는 자리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 묵시 12,17: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용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말해서 악의 근본적인 요소의 관계 안에서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기억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로마의 군사적인 차원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용의 악마의 근원인 용과의 연결 고리에서.

 

다시 말해서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로마의 군사적 억압은 악  그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런 악 자체이다. 악 그자체이기 때문에 이 짐승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묵시 13,1: 그 짐승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었으며

 

이게 우리 지난 시간에 봤다시피 용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죠?

불이 열이고. 열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보면 12도 아니고 7도 아니고 어정쩡한

숫자입니다. 이 뿔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힘이 있다는 것이죠. 힘이 있다는

것이 일곱 개의 머리가 있죠. 그만큼 똑똑하다라고 했지만 일곱 개의 머리가 다

따로 있다는 거는 분열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어쨌든 똑똑하고 어쨌든 힘이 있다라는 겁니다. 그 힘과 똑똑함이 어디서 오느냐?

용으로부터 온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로마의 어떤 군사적인 억압은 바로 용,

악마 그 자체다라는 것을 형상적으로 요렇게 표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봤다시피 이 머리가 일곱 이라는 것은 어린양과의

관계 안에서도 어린양은 머리가 하나였다. 그리고 뿔이 일곱 개다.

 

* 어린양(머리가 하나, 뿔이 일곱):

  하나가 된 권능 -> 그리스도의 권능이 묵시록에서 7번 반복됨

 

권능이 일치된, 하나가 된 그 어떤 권능 그 하나가 가장 강력한 이다. 임금 중에

임금이고 주님 중에 주님이 되는 분은 머리가 하나이다. 이렇게 구별됩니다.

 

그 다음에 짐승은,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능을 많이 받습니다.

13장 초반부체 나타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뭐로부터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뭐와 싸울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다스릴 권한을 받았습니다

할 때 다 출발점은 용으로부터 옵니다. 권한 자체가 용으로부터 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은 스스로 자기가 가진

권한이 아니라 바로 악 그 자체에서, 용에게서 받았다.

 

*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권한: 악 자체인 용으로부터 받은 것

 

다른 말로 표현해서 로마가 지금 하는 군사적인 억압. 아이구야, 힘 쎄다. 로마가

힘 쎄구나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거 자체는 악마가 다 위에서 준

것이다. 악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군사력을 악마의 상징으로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3장 초반부에 나타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머리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붙어있었습니다(묵시 13,1).

 

이것은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  이 군사적인 힘이나 이 모든 것이 그 표상이

악마에서 온다면 이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 모독한다

라는 표현 자체가 폄하하고, 비난하고 우리가 그래서 용의 모습에서 봤습니다.

찬가 부르는 장면에서.

 

어떻습니까? 우리 형제들을 뭐하는 자들? 다 연결 되죠? 예, 그래서 이 짐승 역시

결국에는 군자적으로 뭔가 확 억압한다기보다는 이 행위 자체도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보여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용의 어떤 모습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그대로 이어져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 차원에서 이 짐승의

어떤 바깥 외형적인 어떤 모습을 봤는데 이 짐승이 사람과의 어떤 관계 안에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짐승을 용과의 관계 안에서 봤지마는 짐승이 우리 인간들

하고의 관계를 우리가 보게 되면요.

 

* 묵시 13,3: 그러자 온 땅이 놀라워하며 그 짐승을 따랐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온 땅이 따릅니다. 온 땅이 왜 놀라워 했을까요?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뭐를 지향한다구요? 뭘 비유한다구요?

예, 로마의 군사력을 비유한다고 했습니다. 그죠? 일반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 군사력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 힘에 너무나 강하게 자기가 압도

당해서 보니까 아이구야, 저거 안 따르면 안 되겠구나라고 따라게 되는 것이죠.

온 땅이.

 

온 땅이 따른다는 것은 로마 제국이 그만큼 크다. 그만큼 큰 어떤 제국을 가지고

있다라고 우리가 이해하시면 되겠고. 여기서 이제 중요한 관점은 온 땅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하느님 편에 이야기 할 때는 하늘과 땅입니다.

특별히 천상 예루살렘보면 하느님과 그 일치의 그 천상 예루살렘 도시가 21장

22장에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사람들은 산에 있습니다. 산 위로 내려옵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요.

 

그런데 여기서는 온 땅이 경배합니다. 하늘은 없어요. 요런 표현에서도 아주 미묘한

차이지마는 이 요한 묵시록 저자가 이 짐승은 결국에는 반쪽짜리가 따른다는 거죠.

온 땅이라고 표현하지마는.

 

그러나 그 땅에 누가 사느냐? 우리가 살아요. 신자들이, 신앙인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늘 천상, 하늘을 같이 엮어내는 사람이고 지상 안에 하늘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이 지상의 어떤 부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의해 노력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하늘과 땅을 늘 엮어서 생각하지마는 우리 여기서 말하는 온 땅이 놀라고 그

짐승을 따른다는 그 온 땅은 세상 것만, 세상의 힘만, 세상의 논리에만 빠져 들어서

그렇게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면요. 신앙적인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맞는 말인데 세상이 그러나 어디? 현실은 그렇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면서 현실과

좀 적당히 좀 타협을 하면서 좀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라고 말할 때가 있죠.

 

그런데 저는 아직 생속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러시나라는 생각을 저는 좀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려면 뭐할라고

신부가 되고 뭐할라고 신앙인이 됩니까? 세상하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더 타협하고

세상과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야지. 세상의 논리에 그냥 푹 빠져서 살지 뭐하라고

양다리를 걸치냐 이거죠. 특별히 저같이 신부가 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해 봐요.

신부가 안 되고 일반 사회 생활을 했으면 야, 정말로 지금 생속이니까 하는 말이,

정말로 성공했을 거 같다. 예, 뭐 적당히 타협하고 그죠? 좀 소위 잔머리 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신부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느님만 ... 직무적으로 내 일이 그러니까 푹 빠져 살겠다고

작정했는데 굳이 세상의 논리를 내가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제 선배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적인 어떤 이슈가 되거나

갈등이 있는 문제에 있어서 본당 신자분들끼리 뭔가 이렇게 부딪칠 때, 이렇다 저렇다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하시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왜?

한쪽에 신앙적 가치로 그냥 여과 없이 딱 이야기해 버리면 한쪽은 상처 받는 신자분

들이 많이 있는 그런 어떤 인간적인, 세상적인 논리. 이거 다 경험하실 꺼예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안 해드려도.

 

그럴 때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 해야 될 것인가? 온 땅이 놀라워하면서

정말 땅의 논리로 나갈 것인가? 천상의 논리로 이야기 해 줘야 될 것인가? 참

고민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실컷 생명의 빵이고, 세상 안에 온 내가 살아 있는 빵이고, 이것을 너희들이

받아 먹으라고 실컷 설명하고 난 후에 많은 제자들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떠나갑니다. 안 잡았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보고 너희들도 떠나가겠느냐?

열두 제자는 안 가죠. 예수님은 사람 수 불릴려고 제자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온 땅이 놀라고 따라간다. 로마의 군자적 힘이 강하지만 그 강한

힘에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꿋꿋한 신앙심이다.

그래서 뒷부분에 가면

 

* 묵시 13,9-10: 귀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사로잡혀 갈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로 죽을 사람은 칼로 죽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온 땅의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어떤 세상과의 타협 안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설사 그 타협하지 않아서 우리가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에 인내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13장 3절에 보면, 머리가 일곱 개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중에

머리 하나가 상처를 입었다가 다시 나았습니다.

 

* 묵시 13,3:그의 머리 가운데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은 것 같았지만 그 치명적인

   상처가 나았습니다. 그러자 온 땅이 놀라워하며 그 짐승을 따랐습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이게 뭐냐하면, 일곱 개 머리가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데 일곱 개

중에 하나가 왜 상처를 받았는가? 그리고 왜 다시 살아났는가? 요거 로마의 황제

중에 네로 황제를 가리키는. 네로 황제에 관련된 전설이 있어요. 네로가 얼마나

못됐고 정신 나간 짓을 해 갖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서움을 줬냐하면,

 

그 네로가 죽고 난 후에도 지금 요한 묵시록 저자가 이 요한 묵시록을 쓰게 된

시대적 배경이 언제입니까? 95~100년 경입니다. 네로는 60년 경입니다.

이렇게 한참 지나고 난 후에도 네로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네로가

그만큼 무서움의 존재였다는 거죠.

 

왜 이 상처가 한번 났는데 다시 살아났는가? 네로가 다시 환생해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이제 싹쓸이 하겠다.

싹쓸어버리겠다라고 하는 그런 전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일곱 개 머리를 가졌다라는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그만큼

군사적으로,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했던 로마를 이렇게 가리키는데

거기에도 굴하지 않고. 그러니까 칼에 맞아 죽을 이는 맞아 죽고 끌려갈 이는

끌려가고. 그런 군사적인 어떤 억압 안에서도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등지고

요한 묵시록 전체의 구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바빌론 멸망, 두 짐승 멸망, 용의 멸망. 멸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고 그 멸망의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라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나는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고 오늘 13장에 그렇게 살지 않고 온 땅, 다른 사람들처럼

짐승을 따라가는 사람은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죠.

 

* 묵시 13,8: 세상 창조 이래 땅의 주민들 가운데에서, 살해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자, 이제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  이름이 적혀있다, 안 적혀있다라는 것이

내 이름 석자가 정말 천상의 어디 구석에 있는 책에 박병규하는 이름이 적혀 있다

라는 차원으로 알아들으시면 안 됩니다.

 

*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 세상적인 어떤 논리 안에서도 신앙의

   논리로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사람을 드러내는 또 다른 표현

 

그래서 모 어떤 책에 커버가 빨간색입니다. 그 책에 보면, 그 어떤 분이 벼락을

맞아 갖고 돌아가셨는데  다시 살아나 가지고 생명의 책의 내용을 보고 왔다고,

이름이 적혀 있고 안 적혀 있고 다 보고 왔다고. 그러니 생명의 책에 적힐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라고.

 

뭐 이런 식으로 십계명을 풀이 해 놓은 어떤 책인데 그 책 보고 깜짝 놀랐어요.

더 놀란 것은 그 책을 많은 신자분들이 읽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고, 더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성직자들이 소개해 주고 있다는 것에 제가 놀랐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 가지고 다시 생명의 책을 보고 왔어요.

우리 교리에도 전혀 맞지 않는 이런 저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책이

어디 있는지 그분한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제가 배운 바로는 여기에 어린양 이 생명의 책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논리에 타협

하고 사느냐, 살지 않느냐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표징적인 수단이지. 생명의 책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셔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요한 묵시록 강의를 제대로 잘 들어야 되는 것이 많은 신자분들이 혹은

비신자분들이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표징들이 실제로 뭔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 표징들이 실제로 내 삶에 어떤, 뭐 짐승이 나타나면 짐승이 나타나

가지고 뭔가를 이렇게 해꼬지는 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도 제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본당에 전화가 자주 와서 저에게 다른

관점을 제시하지죠.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 왜 신부님은

자꾸 벌어지지 않는 일이고 표징적인 이야기, 상징적인 이야기라고만 자꾸 말을

하느냐고 그러는데 다시 한번 여기서 분명히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표징들은 실제 사건을 위한 그런 미래의 점을 치는

그런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 요한 묵시록 독자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빚대어서 말하는 표징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가? 지금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계속해서 로마의 어떤 군사적인 억압이라고 표현하는 것, 힘의 억압이라고 표현하는

것. 이것을 짐승으로 표현했고 그 억압에 맞서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제가 자꾸 현실의 문제와 자꾸 이야기를 연결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첫 번째 짐승을 봤구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짐승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짐승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 첫 번째 짐승: 용으로부터 권한을 받고 이 세상을 억압하려 함

 

자 두 번째 짐승은 뭔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너무 쉬워요.

첫 번째 짐승하고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제가 약간 종교적인 차원이다라고 처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이다. 리용의 이레네오 성인은 이 두 번째 짐승을

첫 번째 짐승의 시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리용의 이레네오 성인: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의 시종이다.

 

예컨대 이거예요. 우리 예전에 우리의 잘못이죠. 여러 선교지역을 가면서 한쪽에는

칼을 들고 한쪽에는 성경을 들고. 군사적인 힘으로 "야, 믿어!" 이런 거예요.

뭐 예전에 우리가 그랬죠. 밀가루 줄테니까 하느님 믿어. 그걸로 해서 참된 신앙으로

많이 이렇게. 우리 본당 신자분들도 그런 분들이 계시다던데.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랬단 말이죠. 그런 어떤 차원의 로마의 군사적 억압이 황제 숭배. 

정말 내가 황제를 숭배하는 마음이 아니라 안 믿으면 너 불이익간다.

뭐 그런 식의 어떤 것. 같은 연결 고리에서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 묵시 13,11: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어린양처럼 뿔이 둘이었는데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어린양은 뿔이 몇 개였습니까? 일곱 개. 그런데 여긴 달라요. 그죠?

어린양처럼이라고 요한 묵시록 저자가 이래 갖다 놓은 것은 이 짐승을 자꾸 어린양

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요렇게 자꾸 첫 번째 짐승도 그렇고 두 번째 짐승도 그렇고 자꾸 비교해 가지고

어린양과 너희는 차원이 다르다. 흉내는 냈지마는 다르다. 세상의 것이 마치

그리스도 신앙을 잘 간수하는 것 같지마는 실상 그 안의 내용을 보면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는 다른 가치들이다. 예, 이런 것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납니다. 많은 행사를 하면서 실제로

신앙 운동 같고 막 이렇게  하지마는 행사 끝나고 보면 뒤에서 형제 자매님께서

행사 준비하다가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고, 마음의 상처는 상처대로 다 받고.

예, 실제 내용을 보자면.

 

요기도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이 짐승의 모습을 이야기 하면서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계속 비교해서 겉은 선하게 보이나 세상 안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백화점 가면 가끔 느낍니다. 백화점 처음에 문 열고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이고 다 서 가지고 다 90도로 다 인사 하죠? 음악도 잔잔히

깔아 놓고. 실제 이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서 그렇게 뭔가 형식적인거 우리가

느끼죠? 그죠?

 

114도 그래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러는데 진짜 사랑합니까라고 한번 ^^*~~

예, 그런 어떤 형식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형식은 같을지 몰라도, 신앙적일지

몰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 다르다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이 짐승과 어린양에

빚대어서 말하는 것이지요.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짐승도 결국에는 용과의 연결 고리에서

이야기 하죠. 악마 자체, 로마의 종교적인 어떤 억압 자체도 결국에는 악마적

요소다. 미신적 요소다라고 말하는 것이구요.

 

* 묵시 13,12: 그리고 첫 번째 짐승의 모든 권한을 첫째 짐승이 보는 앞에서

   행사하여, 치명상이 나온 그 첫째 짐승에게 온 땅과 땅의 주민들이 경배하게  

   만들었다.

 

자, 요기 '행사하여'  요 말을 좀 많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요기에 두 번째 짐승에서 이 행사하다. 뭔가를 하다라는 이 동사 포이에즈

라는 그리스 말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8번 사용됩니다. 8번 사용되는데 7번이

두 번째 짐승입니다. 모를 행사합니까? 첫 번째 짐승이 했던 것을 이제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이죠. 로마가 왜 힘으로 억압하려고 하는가?

 

황제 숭배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숭배를 뭐냐? 하느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기를 업신여기고 억압할려고 하는 것. 그래서 이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요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사 포이에즈라는 그리스 말 동사 '하다'입니다. 영어의 do입니다.

하다라는 동사를 8번 반복한다.

 

7번을 두 번째 짐승이 주어로 쓰이고 두 번째 짐승이 7번을 '하다'의 주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문제는 마지막  8번째입니다. 8번째 동사에 보면요. 여기는

이 주체가 인간들로 드러납니다.

 

* 하다(포이에르) 동사는 묵시록에서 8번 사용되는데 두 번째 짐승에게 7번

   사용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1번 사용되었다.

 

자, 첫 번째 짐승에 있어서 이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있어서도

온 땅이 놀라워하며 경배 하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누구이고 경배하는

것은 누굽니까? 사람들입니다. 권한은 이 첫 번째 짐승이 다 받았어요.

다 받았는데 실제적으로 이러한 힘에 엎어지고 경배하는 건 사람들입니다. 

인정을 해 버리는 거죠.

 

두 번째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 짐승이 하던 거와 똑같애요.

똑같은 논리예요. 똑같은데 요기 앞에 와가지고 마지막 여덟 번째 동사의

'하다' 뭘 하느냐 하면, 신상을 만듭니다. 상을 만드는데 상을 만드는 것에

있어 사람이 돼 버립니다. 이게 뭐냐? 이것도 인정을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 짐승의 논리로 보자면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고 끌려갈 사람은

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칼이 오면 피하고 끌려 간다고 그러면,

"아우, 나 잘못했습니다. 나 그리스도 안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악은, 모든 악적인 것은,

 

* 모든 악(적인 것)은 악적인 것 그 자체가 인간 세상에 힘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적인 것에 내가(인간이) 동의할 때 그 세상이 악으로 물들게 된다.

 

악마가 있어가지고 뭔가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마가 우리 복음서에

보면 기적, 치유를 해 주시고 악마를 내쫓는 거를 보시면 악마 자체가 인간을

어떻게 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직접 얘기를 하죠? 왜 우리를 괴롭히러 오셨습니까?

그러면서 사람을 쓰러뜨리고 나가서 돼지들에게 들어가서 돼지가 떨어져

죽었다. 이런 식으로 되죠? 인간을 절대 악마는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거기 동의하지 않는 한. 그것이 성경의 어떤 논리죠.

 

그래서 대부분 우리의 행위가 악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  보통 우리가 이분법적

으로 너무 이렇게 갈려져 있는데 이렇게 살다보면 나쁜 것, 좋은 것으로 갈라

놓고 나는 늘 좋은 예수님과 더불어 있으니까 악적인 것은 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괴롭히러 들어오는 것으로. 그러나 악은 내 안에 있습니다.

 

* 마르 7,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 내가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내가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그래서 이 첫 번째 짐승과 두 번째에 있어서 사람의 동조가 없으면 절대 어떤

것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 두 번째 짐승을 아까 '하다'라는 거 있죠? 하다라는 동사가 8번 반복 된다고

했을 때 무엇을 하는가? 한번 더 구체적으로 한번 내용을 들어가서 보도록 하겠습

니다. 두 번째 짐승이 하는 일은 첫 번째로 불을 내립니다. 불을.

 

* 두 번째 짐승의 악행: 1) 불을 내리게 하는 것(묵시 13,13)

 

불을 내리게 하는 것은 엘리야가 어떻게 불을 내려서 무엇을 다 태워버립니까?

내기를 하지 않습니까? 누구랑? 바알 신을 섬기는 사제들과 내기를 하죠?

 

* 1열왕 18,38: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불로 하느님의 권능을 다 내리게 합니다. 두 번째 짐승도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흉내내는. 불을 내려서 뭐를 해버리겠다는 것. 엘리야의 어떤 그런 사건을

흉내내는 그런 식으로 요한 묵시록 저자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마치 드러내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인간 세상을 위협하는데 있어서 하느님과 거의 같은 권능, 힘을 가진

존재다. 그런 것을 한다. 대단해 보인다는 거죠. 로마 황제가 대단해 보인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하고 있구요. 또 요한 묵시록 안에서 보자면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의 모습도 11장에 나타납니다.

 

* 묵시 11,5: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가르침, 하느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뜻을 증언하는

그 증인의 입 안에서 불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은 강한 어떤 증언의 힘을 이야기

하기 위한 것이죠. 요것도 이 두 번째 짐승이 불을 내리게 한다는 것을 요거와

연결해서 빚대어서 반대 비유적인 개념으로, 반대적인 의미로 요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어떤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신앙인이

증언하는 신앙의 증언과도 맞대결 할 수 있을만큼 강한 어떤 힘이다. 긴장해야

된다라는 것이죠. "야도 이만큼 쎄다."라는 것이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엘리야의

어떤 모습과도 같을 정도로 쎄니까 우리 긴장해가지고 대결해야 된다라는 뜻입니다.

 

* 두 번째 짐승의 악행: 2) 첫 번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것(묵시 13,12)

 

두 번째 하는 일이 첫 번째 짐승, 아까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있죠?
그것을 경배하게 합니다. 첫 번째 짐승이 했던 것은 뭡니까?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이렇게 폄하하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어떻게든 억압하려는 것. 그 짐승에게 사람들을 끌고 가서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황제 숭배하고  똑같지요.  황제의 힘으로 누르고 하는 것을

가서 경배케 하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짐승이다.

 

로마의 종교적인 억압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짓 예언자의 역활로

볼 수가 있습니다. 16장, 19장, 20장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것에 대해서 가서 이것이 맞다라고 이렇게 이끌어서 그것이

맞음을 너희들이 인정을 해라. 거기서 경배해라. 놀라워하면서 그것을 따라라

라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진찌 예언자들은 11장에 나타나는 두 증인.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하느님의 어떤

뜻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논리로 이끌고 가는 그런 사람들을

거짓 예언자라고 하고 거짓 예언자가 곧 두 번째 짐승의 모습과도 같다라는 것

입니다.

 

내가 맞는다는 내 논리를 펴가지고 내 뜻대로만 끌고 가는 모든 어떤 사람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런 모든 사람들이 두 번째 짐승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두 번째 짐승의 일은,

 

* 두 번째 짐승의 악행: 3) 모든 이가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함(묵시 13,16)

자, 모든 이를 한번 보겠습니다.

* 모든 사람(묵시 13,16): 낮은 사람, 높은 사람, 부자, 가난한 자, 자유인이나 종

 

자, 당시의 상황에서 낮은 사람, 높은 사람은 이 부자와 가난한 자와 맥락을 같이

하시면 되겠습니다. 낮은 사람은 돈이 상대적으로 없는 사람들이고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고 요기에 분류를 해 놓은 것은 되게 경제적인

차원입니다. 경제적인 사회 계층을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마나 손에 표를 받게 하는 것. 이것은 뭐냐?

 

* 이마나 오른 손에 표를 받게 하는 것: 경제적인 논리에 빠져들게 하는 것

 

나중에 다음 시간에 보게 될 18장에 바빌론이 무너질 때의 그 경제적 상황,

로마의 경제 상황을 한번 보겠습니다. 거기에 종속된, 돈 놀이에 종속되게

만드는 그것이 두 번째 짐승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되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어떤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봐야 되겠습니다. 돈이면 최고다

라는 세상에 요한 묵시록의 두 번째 짐승은 우리가 한번 더 깊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두 번째 짐승이 아까 8번의 '하다'라는 동사의 마지막 8번째가 인간이

한다고 그랬죠? 인간이 우상을, 신상을 세운다고 그랬죠. 이 상을 세운다는 것.

두 번째 짐승의 논리로 봤을 때는 돈의 우상입니다. 경제적인 우상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라는 그런 우상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용과 연결해서 볼 때  악 그 자체라는 거죠.

하느님을 섬기겠는가, 맘몬을 섬기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봐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우리 교회의 행사들이, 교회의 삶 자체가 돈 위주로

간다면 그것 역시 문제인 거죠. 그것 역시 우상 숭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교무금이 얼마냐? 봉헌금이 얼마냐?라는 차원으로 우리 신앙 공동체를 잣대를

드리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분들이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어떠한

신심 활동을 하고, 어떠한 신심에 더 관심이 있는 공동체인지 그런 것들을 살펴

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참된 하느님께 나아가는 어떤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지금 지난 시간에 그리고 이번 시간까지 계속해서 쭈욱 살펴

본 것이 악마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이 악마의 어떤 정체성이 무엇이냐? 그거에

대해서 우리가 봤습니다. 봤는데 한 마디로 우리가 단어로 적어보겠습니다.

 

우리가 12장에 봤을 때 두 가지 주제를 용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두 가지 주제 첫 번째가 반생명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반생명은 결국 메시아에

대한 부정입니다. 어린 아이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그 다음에 뭐를 조장한다구요? 형제들을 고발하면서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짐승이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름이 뭐라고 이름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입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독.

 

그리고 네 번째 짐승은 이 모독하는 첫 번째 짐승의 시종이라고 이레네오 성인이

말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거, 모독하는 것의

실천적인 것. 마지막에 제가 강조했던 부분, 그 실천의 최고 어떤 중심이 되는

인간이 거기 쏠리게 만드는 것이 결국은 경제적인 논리죠. 돈의 논리죠.

어떻게 적을까요? 돈 적으면 좀 그런데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적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뭐든 주의가 돼 버리면 문제가 되요. 그래서 이런 것들, 제가 어떻게 보면,

키포인트를 잡아 낸 어떤 악마 자체의 어떤 논리, 그 어떤 주체, 나는 이런 쪽으로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라는 것.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 한번 정리해 본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여기서는 반대로 나가야 되겠지요? 생명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

말 한마디, 행동하나 제대로 해서 정말 우리의 생명을 지키자. 사람만이 생명이

아니겠죠? 우리모든 피조물의 생명이겠죠. 모든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피조물은 나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품으로서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생명을 지향해야 된다. 분열이 아니라 일치에로 나아가야겠다.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사회, 나만을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모독하고 고발하는 말보다는 서로 칭찬해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 소위

소설 쓰지 말자는 겁니다. 남을 모독할 때는 대부분 소설을 써요. 구체적인 사실

이나 팩트 이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구 저럴꺼야."

모독은 거기서, 거짓말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사실만 투명하게 생각하고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논리를 좀 벗어나서, 그런 우상을 벗어나서 돈보다 더 가치로운 우리

인생,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되겠다.

 

예, 12장, 13장을 통해서 악마의 요소를 봤습니다. 이것이 다음시간부터 무너질

것입니다. 이것이 다 무너지고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요한 묵시록이 무엇

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인가? 이제 점점 더 명확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주제에 대해서 한 주간 한번 생각해 보시고 여기에 반하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또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시간 예고: 대탕녀 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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