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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05 조회수676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Behold, magi from the east arrived in Jerusalem, saying,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Mt.2,1-2)
 
 
제1독서 이사 60,1-6
제2독서 에페 3,2.3ㄴ.5-6
복음 마태 2,1-12
 

내일 모레 서품을 받을 부제들과 신학생들의 대품피정이 어제 끝났습니다. 저는 이 피정의 마지막 파견미사에 참석했다가 피정지도를 해주셨던 인천교구의 원로사목자 신부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넘었지요. 이 신부님은 제가 중학생 때의 본당 신부님이셨습니다. 당시에 성당을 새로 짓겠다고 신자들을 독려하고 모금을 열심히 하셨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동시에 저를 비롯한 학생들에게도 너무나 잘해주셔서 얼마나 인기가 좋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신부님께서는 미사를 봉헌하며 서 있는데 힘드셔서 지팡이에 의지하시더군요.

시간의 빠른 흐름에 다시금 감탄합니다. 엊그제 같았던 일들이 먼 옛날의 일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삶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30년 전도 마치 엊그제의 일 같은데,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짧은 시간의 삶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 특히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들에 조금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즐겨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즐겨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더욱 더 힘들게 사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요.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애지중지 모았던 돈과 수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하늘나라로 챙겨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마치고 더욱 더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할 주님과의 삶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짧은 이 세상 안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으로 보여주신 날이지요. 이 사실을 알았던 동방의 세 박사는 경배하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자신의 고장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까지 찾아옵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치안이 잘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곳곳에 강도가 득실거렸고, 그 먼 거리를 낙타와 나귀를 타고 또 걸으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먼 거리를 그 귀한 보물을 들고 가겠다고? 메시아로 태어날 아기가 뭐 준대? 그렇지 않다면 그 위험한 곳을 왜 가겠다는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야?”라고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에 자신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지요. 모든 위험을 뛰어넘어 그분을 경배해야만 했습니다.

동방박사가 보여주었던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는 모습들. 가장 중요한 주님을 보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과 시련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그 열정을 우리도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주님 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든, 기쁨이든, 정이든, 즐거움이든,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는 한 남도 내게 주지 않는 것이다(괴테).

 
1월 7일(화)에 서품을 받을 현재 부제들과 신학생들입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희망과 사랑

미국의 어떤 부인이 이러한 광고를 냈습니다.

“남편을 염가로 급히 양도함. 남편의 골프채와 사냥도구와 개도 함께 끼워줌.”

장난이 아닐까 싶은 광고였지요. 그런데 이 광고를 보고 미국 전역에서 문의전화가 불티나게 온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의 편지를 본 이 부인은 자신의 광고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깨달아 없었던 일로 했다고 하네요. 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부인! 남편이 싫어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사랑해 보세요.”

뻔한 내용의 글이지요. 그러나 그동안 무조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모습에 양도되어야 할 사람은 남편이 아닌, 오히려 자신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이 세상 안에 다른 이에 대한 판단과 미움, 그리고 단죄하는 그 모든 행동들이 바로 희망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무조건 희망을 접습니다. 가능성이 도저히 없다면서 미움으로 상대하고 또 극단적으로 단죄하려고 합니다. 이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과연 어디에서 실천해야 할까요?

희망과 사랑.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자신의 이 부족한 모습들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자그마한 결점만을 크게 부풀리려고 하면 할수록, 주님의 자리는 없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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